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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독립운동가, 미국 박사, 정치가, 외교관, 초대 대통령, 독재자, 3·15 부정선거, 하와이 망명.

만년지기 우근 2007. 8. 7. 00:46
독립운동가, 미국 박사, 정치가, 외교관, 초대 대통령, 독재자, 3·15 부정선거, 하와이 망명.

우남(雩南) 이승만(李承晩)을 지칭하는 수식어는 이 밖에도 많다. 어떻게 평가하며 어느 것을 먼저 떠올리느냐는 것은 전적으로 그를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의 몫이고 재량이다.

1875년(고종 12)부터 1965년까지 91년을 이 풍진 세상에 살다 간 우남. 애증이 그토록 엇갈리는 사람도 흔치 않을 것이다. 그가 미국 프린스턴대에서 ‘미국의 영향을 받은 영세중립론’으로 철학박사 학위를 받은 건 1910년. 일본이 대한제국을 병탄해 경술국치의 민족 치욕을 안겨준 해다.

요즘에야 ‘미국 박사’가 흔해졌지만 당시 미국 박사는 아무나 받는 게 아니었다. 우남은 영어에 능통해 미국 조야를 누비며 일본 침략의 부당성을 호소했고 약소국의 기사회생을 위해 동분서주하며 온갖 역량을 발휘했다. 민족의 암흑기에 우남의 행보는 겨레의 희망이었고 암울한 민중의 갈채도 많이 받았다.

너무 앞서가고 아는 게 많다 보니 정보에 어둡고 못 배운 다른 우국지사들을 얕잡아 보고 무시한 것일까. 그의 이 같은 행적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와의 껄끄러운 행장(行狀)에서 엿볼 수 있다.

◇국립서울현충원(구 동작동 국립묘지) 내의 우남 이승만 묘. 대통령도 반 평의 광중에 누우면 말이 없고 사후 평가를 각오해야 한다.


우남은 3·1운동 이후 한성정부, 노령정부, 상해임시정부 등 국내외에 설립된 모든 정부조직에서 대통령, 총리로 추대됐다. 탁월한 외교 능력과 명성을 감히 덮을 자 없었고 그를 내세워야 활동 영역을 넓힐 수가 있어 서로 경쟁적으로 모셨던 것이다.

1919년 4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면서 초대 국무총리로 추대했으나 이를 거부하고 대통령제를 주장하며 스스로 대통령이라는 직함을 사용하고 다녀 논란을 일으켰다. 결국 임시정부 직제를 대통령제로 고치게 되고 내부 갈등이 증폭됐다. 21년 대한민국의 ‘위임통치안’ 제출설까지 나돌아 상해임시정부 내 논란이 극심했고 이듬해 6월 임시정부 의정원이 불신임안을 결의한 후 25년 3월에는 탄핵안을 상정해 통과시켰다. 그런데도 이승만은 임시정부의 모든 결정을 무시하고 구미위원부를 통해 독립활동을 독단으로 계속했다.

해방된 조국에 와 분단국의 대통령이 된 후 정치파동(1952)을 일으켜 개헌안을 강압적으로 처리하고 자신의 3선 금지를 면제하는 사사오입(四捨五入) 개헌안도 통과(1954)시키고 만다. 결국 3·15 부정선거를 저질러 그에 항거하는 젊은 학도들에게 총부리를 겨누어 하와이 망명 신세가 되고 그곳에서 생을 마감하고 만다. 그의 독재 근성은 임시정부 대통령을 할 때부터 배태된 만큼 45년 10월 귀국 직후 대한민국 국민들은 알아차렸어야 했다.

그 후 우리가 살아온 군사정권과 강압 통치 시대를 생각하면 본(本)이 되는 삶이 얼마나 소중하고 영향이 큰지를 묻지 않아도 알게 된다. 민주주의를 한다는 미국이나 영국에서 정해진 임기 외에 대통령을 더해보겠다는 사람이 어디 있고 국민을 살상하며 억지로 정권 잡겠다는 사람 있었는가.

◇우남 묘 후룡맥에 솟아오른 결인목. 행룡 거리는 짧지만 응기석까지 뭉쳐 있어 누구라도 찾아낼 자리다.


이런 현대사의 질곡과 명암을 반추하며 ‘동작동 국립묘지’ 우남 묘 앞에 서니 착잡한 느낌이 든다. 그의 치적 사후 평가를 놓고는 언론사 간에도 견해가 엇갈려 국민적 내홍을 겪기까지 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국립현충원’으로 알아 왔는데 2006년 1월30일부터 ‘국립서울현충원’으로 바뀌었다. ‘국립대전현충원’과 구분짓기 위함이다.

“원래 서울현충원은 명당으로 소문난 자리 아닙니까. 관악산 공작봉을 주산으로 동작능선이 병풍 치듯 3면을 둘러싼 말발굽 모양 국세입니다. 그 중에서도 이 박사 묘는 배꼽에 해당되는 지점으로 바로 옆 창빈 안씨 묘와 함께 좋은 혈처입니다. 저 앞에 도도히 굽이쳐 내려오는 한강물을 보세요. 우측에서 내려와 좌측으로 거수(去水)하니 우수도좌(右水到左)죠.”

동행한 동우(東愚) 정헌주(동아문화센터 풍수·역학강사) 선생이 좌우의 혈을 짚어 가며 상세히 설명해 준다.

왕릉 못지않은 묘역에 올라서니 신좌을향(辛坐乙向)으로 인천(서쪽)에서 강릉(동쪽)을 바라보는 좌향이다. 이수교 쪽의 우백호가 동작동의 좌청룡을 큼지막하게 얼싸안으며 얼핏 대칭을 이루지만 상쟁지세는 아니다. 박정희 전 대통령 묘의 주맥에서 내려온 후룡맥이 장군묘역에 와 멈칫했다가 국가유공자 묘역에서도 결혈한 후 우남 묘에 와 똬리를 틀었다. 박 전 대통령 묘는 서울현충원의 가슴 상단이고 장군묘역은 가슴 하단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우남 묘의 후룡맥을 따라가다 보니 입수도두(入首倒頭)가 두툼하게 급히 솟구쳐 있다. 비록 행룡(行龍) 길이는 짧지만 응기석까지 버티고 있어 이만하면 누구라도 골라 낼 자리다. 창빈 안씨 묘역에서 갈라져 내려온 용맥이다.

◇학도의용군 무명용사탑. 군번도 없이 조국을 위해 스러진 숭고한 희생 앞에 숙연해질 따름이다(왼쪽), 창빈 안씨 묘 앞의 신도비. 선조대왕 할머니로 이 묘가 있어 한때는 ‘동작릉’으로 불리기도 했다.


이곳에 와서 창빈 안씨 묘를 그냥 지나칠 수 없다. 조선 11대 임금 중종의 후궁이자 14대 선조대왕의 할머니다. 차남 덕흥대원군이 선조의 아버지로 조선왕조는 이때부터 후궁 왕자가 거의 왕위 대통을 이어가게 된다. 나경을 꺼내 드니 신좌인향(申坐寅向)이다. 문득 어느 간산 길에서 ‘신좌을향’과 ‘신좌인향’이 어떻게 다르냐는 질문을 받았던 기억이 난다. 신좌(辛坐)는 천간의 양간(陽干 갑·병·경·임)과 음간(陰干 을·정·신·계) 중 음간좌를 가리킨다. 신좌(申坐)는 12지지(자·축·인·묘·진·사·오·미·신·유·술·해) 가운데 신에 해당한다. 여기서 천간에서는 무·기의 토(土)가 빠져 있으나 지지에서는 진·술·축·미의 토가 들어 있음을 유의해야 한다. 신(辛)과 신(申)이 다르니 풍수 기사에서는 가급적 한자 사용을 피하려 해도 부득이한 경우가 있다.

원래 경기도 장흥에 있던 창빈 안씨 묘를 이곳에 이장하면서 동작릉(銅雀陵)이라 불렀으니 길지 명당 터를 골라 썼음은 자명한 일이다. 서울현충원에는 구한말 항일의병과 조국광복을 위해 투쟁한 애국지사를 비롯하여 국군장병, 경찰관, 예비군 등 16만5000여위(位)의 묘역 표시가 모두 돼 있으나 창빈 안씨 묘는 안내 책자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서울 동작구 동작동 44번지 7호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54호’라는 안내판 바로 옆에 신도비가 서 있다. 숙종 9년(1683)에 세워진 비문을 읽어 내려 가노라니 ‘有明朝鮮國(유명조선국)…’으로 시작하여 ‘崇禎紀元後五十六年(숭정기원후오십육년)’으로 끝나는데 스쳐 지나가는 게 있다.

수년 전, 갑자기 떼돈 벌어 잘사는 사람이 증조 할아버지 묘비를 입비(立碑)한다 하여 초청받아 간 적이 있다. 조선 철종(1850년대) 때 사람인데 ‘유명조선국…’으로 비문이 음각돼 있다. 연유를 물으니 ‘유명한 조선시대를 살았다’는 의미라고 했다. 소가 웃을 노릇이다. 나중에 비문을 고치게 했지만 ‘유명조선국’은 조선국이 명나라 속국이라는 비하칭(卑下稱)이다. 더구나 철종 때면 명나라가 아닌 청나라 시대다.

차제에 ‘숭정기원후…’에 대해서도 부연하고자 한다. 숭정(1628∼1644)은 명나라 마지막 황제(제17대)가 자신의 재위 시 사용했던 연호다. 기울어 가는 나라를 부흥시키려고 애를 썼고 당시 팽창 중이던 만주 세력(후에 청나라)을 막아내기 위해 몸부림쳤으나 멸망하고 자신은 목매 죽은 비운의 황제다.

광해군을 몰아내고 반정으로 등극한 인조는 새로 건국한 청나라와는 남한산성 ‘삼전도 치욕’으로 불구대천의 원수지간이었다. 명나라 숭정황제가 죽은 후 조선에서는 겉으로는 청국 연호를 어쩔 수 없이 사용하면서도 묘비에는 명나라 연호를 표기했다. 이래서 ‘숭정 황제가 죽은 후 56년’이라는 의미로 ‘숭정기원후오십육년’을 썼던 것이다.

우남 묘를 뒤로하고 현충문 쪽으로 내려오니 바로 옆에 학도의용군 무명용사탑이 있다. 6·25 때 청년기를 살다 조국 수호를 위해 펴보지도 못하고 스러져간 이들…. 때를 잘 만나 호의호식하며 누릴 것 다 누리는 ‘시대의 수혜자’들이 이 묘역 앞에 서서 할 말이 무엇일까. 자신의 결정이 마치 ‘구국의 결단’인 양 현충문에 와 참배하는 ‘산 자’들 앞에 틀림없이 남길 말이 있을 것 같다.

인천에서 왔다는 김종렬(77) 할머니가 우남 묘 앞에 향을 사르며 ‘나라 잘되게 지켜 달라’고 빌고 있다. 14년 전 위패봉안관에서 남편 이름을 찾은 뒤 한 해도 거르지 않는다고 했다. 그는 박 전 대통령 묘소에도 꼭 들른다며 “어쨌든 대통령은 훌륭하신 어른 아니냐”고 한다.

시인·온세종교신문 발행인

출처 : 가평군향토문화연구회
글쓴이 : 화악산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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