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 한마당

[스크랩] 내 삶을 돌아보게한 영화입니다(펌)

만년지기 우근 2011. 1. 30. 14:53

 

 

                                 

 

 

                                                 수단의 슈바이처
                                           이태석 신부를 아십니까?

 

얼마 전,

어느카페에서 이태석 신부님의 소식을 들었습니다,

대장암으로 인해

고통을 받고 있고,

그를 알고 그를 사랑하던

수 많은 사람들의 간절한 기도와

안타까움을 뒤로 한채

그 분이 운명하셨다는 비보를 보고

가슴이 미여지는 슬픔을 느꼈습니다,

 

오직 사랑을 위햐여,

수단이라는 오지에서 사랑을 실천 하던

아름다운 젊은 사제를 

하느님은 왜?!,,,

부르셨을까,,,



 



영화 제목은 ‘울지마 톤즈’.
내전 중이던 아프리카 수단에서 의료 선교를 하다가
수단의 톤즈 주민들을 위해
한국에 후원회를 통해서
음악회와 모금을 위해 나왔다가
건강검진중,,,
대장암 말기라는 소식에 접한다,
그 후!!
항암을 하다 지난 1월 숨진
고(故) 이태석(1962~2010) 신부의 삶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다.







영화를 제작한 구수환(KBS 책임프로듀서) 감독도
“이 영화를 찍으면서 많이 울었다.
25년간 방송 생활하면서 이렇게 많이 울어본 적이 없었다.
각박한 시대에 따스함을 주는 영화가 되길 바란다”고
소감을 밝혔다.
영화는 가수 심수봉의 노래 ‘그때 그 사람’으로 시작했다.
생전의 이 신부가 색소폰으로
그 곡을 연주하는 장면이 이어졌다.







“비가 오면 생각나는 그 사람∼” 그랬다.
영화 속 사람들도, 영화 밖 사람들도 그 선율을 따라가며
그때 그 사람, 이태석 신부를 그리워했다.
그리고 모두 울었다,







이 신부는 2001년 로마 교황청에서 사제 서품을 받고
자청해서 아프리카 수단으로 갔다.
내전 중인 남수단은 위험하기 짝이 없는 지역이었다.
그곳을 자원하는 성직자는 거의 없었다.
거기서 이 신부는 헐벗고,
굶주리고, 다치고,
병에 걸리고,
희망을 상실한 주민들에게 의술과 예술, 따뜻한 가슴을 베풀었다.
그리고 올해 1월 14일 대장암으로 선종했다.
48세의 젊은 나이였다.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수단의 슈바이처’라고 부른다.
이국 땅 아프리카에서 의료 봉사를 하다 숨을 거두었으니 붙여준
형식적인 수식어가 아니다.







영화에는 이태석 신부가 톤즈의 배고픈 아이들,
밤낮 사흘간 걸어서 찾아온 환자들,
수단인조차 외면하는 한센인을 바라보는
선한 시선과 해맑은 미소가 장면마다 배어난다.
이 신부는 이렇게 말했다.







“처음에는 워낙 가난하니까
여러 가지 계획을 많이 세웠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갈수록 같이 있어주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떤 어려움이 닥친다 해도 그들을 저버리지 않고 함께 있어주고 싶었다.”
‘진정한 선교란 과연 무엇인가’에
대해 묵상케 하는 대목이다.







이 신부의 고향은 부산이다.
어머니는 자갈치 시장에서 삯바느질을 하며 10남매를 키웠다.
어릴 적,
집 근처의 성당은 그에게 놀이터였다.
거기서 벨기에 출신인 다미안(1840~1889) 신부에 대한 영화를 봤다.
다미안 신부는 하와이 근처 몰로카섬에서 한센인을 돌보다가
자신도 한센병에 걸려 49세에 숨을 거둔 인물이다.
지난해 교황 베네딕토16세는 그를 성인 반열에 올렸다.
이 신부는 그 영화를 본 뒤
사제에 대한 꿈을 꾸기 시작했다.







인제 의대를 졸업한 그는 집안의 기둥이었다.
그는 어머니께 “사제가 되겠다”는 뜻을 밝혔다.
신부가 된 형도,
수녀가 된 누이도 있었다.
어머니는 눈물로 반대했다.







“남의 아들은 (신부로) 가면 다 훌륭하고 거룩해 보이던데…,
왜 내 자식은 몇 명이나 데려가시냐?”고
반문했다.
그는 “어머니께 효도 못 하고, 벌어주지도 못 해서 죄송하다.
그런데 하느님께 자꾸 끌리는 걸 어떡하느냐?”고 울면서
대답했다.
그리고 뒤늦게 신학대에 진학했다.







수단은 아프리카에서 가장 큰 나라다.
그러나 내전으로 인해 모든 게 황폐해졌다.
특히 남수단의 상황은 최악이었다.
말라리아와 콜레라 등으로 약도,
치료도 없이 사람들이 죽어갔다.
이 신부는 남수단의 톤즈란 곳으로 갔다.
그는 톤즈에서 유일한 의사였다.
하루에 300명의 환자가 찾아왔다.
100㎞를 걸어서 밤에 문을 두드리는 환자도 있었다.
“그곳에 가면 살 수 있다”는 소문이 톤즈에 퍼졌다.
공간이 모자랐다.
이 신부는 손수 벽돌을 구워서 병원을 지었다.
전기도 없었다.
지붕에 태양열 집열기를 설치해 냉장고를 돌렸다.
더운 날씨에 상하기 쉬운 백신을 보관하기 위해서였다.
이 신부는 학교도 지었다.
초·중·고 11년 과정을 꾸렸다.
손수 수학과 음악을 가르쳤다.
케냐에서 교사도 데려왔다.
톤즈의 아이들은 거기서 미래를 찾았다.







다큐멘터리 속의 이 신부는 자신에게 묻고, 답했다.
“예수님이라면 이곳에 학교를 먼저 지으셨을까,
성당을 먼저 지으셨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학교를 먼저 지었을 것 같다.”







톤즈 사람들은 그를 “쫄리 신부”라고 불렀다.
‘존 리(John Lee)’라는 세례명을 그렇게 발음했다.
많은 사람이 이 신부에게 물었다.
왜 굳이 신부가 됐느냐고, 의사로서도 소외된 이웃을 도울 수 있다고,
왜 굳이 아프리카까지 갔느냐고,
한국에도 가난한 사람이 많다고.
그 모든 물음에 이 신부는 이렇게 답했다.







예수님께선 ‘가장 보잘것없는 이에게 해 준 것이
곧 나에게 해 준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영화를 보던 관객은 눈물을 흘렸다.
그건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예수의 메시지 앞에서 솟는 눈물이기도 했다.







이태석 신부의 묵상,
십자가 앞에 꿇어 주께 물었네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리는 이들
총부리 앞에서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이들을
왜?!
당신은 보고만 있냐고
눈물을 흘리면서 주께 물었네,
세상엔 죄인들과 닫힌 감옥이 있어야만 하고
인간은 고통 속에서 번민해야 하느냐고
조용한 침묵 속에서 주 말씀 하셨지,

사랑, 사랑, 사랑
오직 서로 사랑하라고
난 영원히 기도하리라
세계 평화 위해
난 사랑하리라
내 모든 것 바쳐!!,,,

 
카톨릭 성가 206번
(성심의 사랑)
 



                     수단에서 사랑을 베푼 이태석 신부님의 가슴 벅찬

                                        감동의 동영상2010.12.23방영

                              "울지마 톤즈" KBS 스페셜 (60분 소요)

 


                                    < 위 버튼을 눌러 감상하세요>

출처 : 제주도에서 살기위한 모임
글쓴이 : 짱비 원글보기
메모 :

 

 

 

위 글 작품은 제가 블로그를 시작해서 어디에선가 가져온것인데 오래되다 보니 생각이 안나는군요.

이 작품을 만드신분께도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故 이태석신부님께 고개 숙여 감사드리는 건.

내가 대한민국의 국민이라는 겁니다.

이런 훌륭한 故 이태석신부님이 계시기에 그래도 한국이 지탱해 나갈 수 있나 봅니다.

위를 보아도 옆을 보아도 앞을 보아도 다 그렇고 그런 사람 뿐.

오직 자신만을 위해서 자신밖에 모르는 사람들 ---.

어쩌면 저도 그중에 한 사람일 뿐 입니다.

故 이태석신부님 영상을 두번 보았습니다.

故 이태석신부님은 우리에게 자신을 통해 "사랑"이 무엇인지 깨닫게 합니다.

제가 고등학교를 사레지오를 다녔습니다.

언제부터 이름이 살레시오로 바뀌어졌는지도 잘 모릅니다.

사업에 한창 열중할 무렵 고등학교 후배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서울에도 살레시오 동창 모임이 있는데 나와서 무언가를 맡아 달라고 했었어요.

그런데 저는 그 부탁을 일언지하에 거절했었답니다.

아이도 어리고 그때 상황이 잠을 두세시간밖에 잘 수 없었어요.

 

고2때 생각이납니다.

교장수녀님께서 영세를 받고 학교에서 중책을 맡으라고 하셔서 저는 그 일을 하고 싶었습니다.

아빠는 그렇게 하라고 하시는데 엄마는 한집에 종교가 두개면 망한다고 절대로 반대를 하셨지요.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엄마가 되어서 생각해 보니 반대 입장을 이해하고 싶었습니다.

왜?

오직 공부만 강요를 했는지 지금도 저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나는 내가 살아가는 인생인지 엄마가 정해놓은 길을 걸어가야 만 하는  인형인지 모르겠습니다.

마흔이 넘어가고 어느날.

아! 인생은 이렇게 사는게 아니야.

지금 뭘하고 있는거야.

내 인생의 주인공은 나야.

눈물이 너무나 흘러서 서울의대 연구지원점에서 나와서 회화나무 아래에서 얼마나 길게 눈물을 펑펑 쏟았는지 모릅니다.

나중에는 소리까지 내면서 엉엉하고 울었던 그 시간 이후로 나는 내 인생을 살아가는 걸음마를 시작했습니다.

그 이후부터 나는 모든 결정을 혼자서 하고 살아왔습니다.

지금 상황이 어떨지라도 그건 내가 결정한것이기에 후회하지 않습니다.

어느때든지 아닌것은 아닙니다.

나만 그런가!

가끔씩 아주 가끔씩 순수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보입니다.

혼탁한 현대를 살아가는데 그 분들을 생각하면 입가에 미소가 번지는 걸 느낍니다.

故 이태석신부님께서 홀로 수단에 가셔서 아픈환자가 밤에 찾아와도 두번 문을 두드리게 하신적이 없다고 합니다.

故 이태석신부님은 철인이셨을까요?

저는 故 이태석신부님이 왜 이렇게 빨리 가실 수 밖에 없는지 느껴집니다.

사람인데 잠이 깜박 들 수 도 있으셨을텐데 밤중에 환자가 찾아와서 두번 문을 두드리지 않았다면

잠을 주무셨을까요?

故 이태석신부님의 삶은 우리가 살고 있는 삶에 몇백배를 사시다 가셨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제가 두세시간만 잠을 자고 오년을 하다가 지쳐서 세상살이를 다시 바꾸었는데

누군가가 故 이태석신부님이 하시는 일들을 나누워서 했었어야 했는데

누구도 할 수 없으셔서 외로이 홀로 그 많은 일들을 스스로 감당하셨으니

의사인 자신도 자신이 병을 알텐데도 ---.

故 이태석신부님은 이 땅에 오셔서 "사랑"이라는 씨앗 하나를 땅에 떨어 뜨리고 가셨습니다.

그 씨앗이 썩어 많은 열매를 맺을 거라고 확신합니다.

 

故 이태석선생님은 가셨지만 수단에 있는 그 아이들의 눈에서 나오는 하염없는 눈물로

故 이태석신부님은 사랑으로 다시 아이들의 가슴에 내내 남아서 기록되고 성인으로 남아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겁니다. 

저에게 이 글을 읽게 해주시고 영상을 보게 해주신 분께 깊이 깊이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

故 이태석신부님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