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Re:호남 16구간 참고자료 - 창평 고씨의 역사
[한국의 명가⑥] 전남창평고씨 일가 역사.인물
녹천 고광순, 춘강 고정주가 연주한 보수와 개화의 변주곡
조용헌 원광대 동양학과대학원 교수(cyh062@wonkang.zc.kr)
‘고스톱’의 요체는 고(go)와 스톱(stop)에 있다. ‘고’냐 ‘스톱’이냐?
고스톱을 칠 때마다 항상 번민하는 명제다.
스톱해야 할 때 판단을 잘못 하여 고를 해 버리면 그동안 자기가 벌어놓았던 자본금을 다 내놓아야
할 뿐만 아니라 거꾸로 벌금까지 물어야 한다.
반대로 고를 할 상황에서 그만 겁을 먹고 스톱을 해 버리는 스타일은 ‘쓰리 고에 피박’이라는 통쾌한
승리는 좀처럼 맛볼 수 없다. 두고두고 후회로 남는다.
머무를 때 머물러야 하고 나아갈 때 나아가야 한다.
말은 쉽지만 실전에서 이를 판단하는 일은 대단히 어렵다.
상황 상황에서 고와 스톱을 정확하게 판단할 줄 아는 사람이 능력 있는 사람이다.
고와 스톱의 원리는 고스톱이라고 하는 화투놀이에서만 통용되는 요령이 아니다.
우리 인생사 굽이굽이에서 맞닥뜨리는 문제이기도 하다.
이는 더 나아가 국가와 민족의 진로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역사적 전환기에 닥쳐 기존의 틀을 어느 정도 지킬 것인가.
외투만 벗고 속옷은 그대로 지키고 있을 것인가, 아니면 팬티까지 벗어야 하는가.
새로운 변화를 어느 선에서 받아들일 것인가.
물건만 몇 가지 받아들일 것인가, 아니면 머리 색깔까지 노란 색깔로 모두 바꿔 버릴 것인가.
보수와 개화의 변증법적 관계가 바로 그것이다.
역사를 흔히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정의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보면 역사는 ‘고와 스톱,
보수와 개화'의 끊임없는 마찰’이기도 하다.
이웃나라 일본의 근세사는 메이지(明治)유신의 평화적 정권교체에서 나타난 것처럼 보수와 개화의
끊임없는 대화가 가능하였다. 그 점이 참 부럽다.
반면 한국의 근세 100년은 보수와 개화의 끊임없는 마찰이었다.
비록 외세의 개입이 있었다고는 해도 6·25와 분단은 그 마찰의 정점이었다는 점에서 비극적이다.
대화와 마찰의 차이점은 상대방을 인정하느냐, 못하느냐에 달려 있다.
인정하면 대화할 것이고, 인정할 수 없으면 배척할 수밖에 없고, 배척은 결국 피를 부르는 마찰과
전쟁으로 이어진다. 물론 세상사가 대화로만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격렬한 마찰과 주먹다짐으로까지 갈 수 있다. 하지만 상대를 죽이고 피를 보아야만 하는 전쟁까지
가서야 되겠는가. 우리 근세사에서 아쉬운 대목은 공존의 교훈을 터득하지 못하였다는 점이다.
유명한 집안들도 마찬가지다.
집안 내에서도 좌·우익으로 나뉘는 바람에 골육상쟁을 한 집안이 상당히 된다.
좌·우의 대립이 심화되면서 민족만 분단된 것이 아니고, 같은 집안이라는 공동체 의식도 절단난
경우가 많다. 집안이고 뭐고 없이 너는 너, 나는 나가 되었다.
이러한 와중에서도 드물게나마 보수와 개화파가 공존한 집안이 있다.
전남 창평에 사는 고씨(高氏) 집안이다.
이 집안에서는 구한말 호남의 유명한 의병장이었던 녹천(鹿川) 고광순(高光洵·1848~1907)과 창흥의숙
(昌興義塾)을 세워 호남의 인재들을 길러냈던 춘강(春崗) 고정주(高鼎柱·1863~1933)라는 두 노선이
공존하였다.
보수의 입장이었던 고광순은 목숨을 던져 의병을 일으켰고, 개화의 입장이었던 고정주는 재산을 털어
학교를 세웠다. 그러면서도 커다란 반목 없이 공존 하였던 것이다. 동학과 일제 36년 그리고 6·25를
거치면서도 별다른 인명피해가 없었던 집안이 전남 창평의 고씨 집안이다.
매우 드문 사례가 아닐 수 없다.
창평에는 고씨들이 많이 산다. 본관은 장흥이지만, 창평에 많이 사는 탓에 보통 ‘창평 고씨’라고
부른다. 창평의 고씨들은 호남 4대 명문 집안 중 하나다.
호남의 원로들이 꼽는 4대 명문 집안이라면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1510~60)를 배출한 울산 김씨,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1527~72)을 배출한 행주 기씨, 제봉(霽峰) 고경명(高敬命·1533~92)을
배출한 장흥 고씨, 송강(松江) 정 철(鄭澈·1536~93)을 배출한 연일(지실) 정씨 집안이다.
<제봉 고경명의 후예들>
창평의 고씨는 제봉 고경명의 후손들이다. 제봉의 다섯 아들 가운데 임진왜란 때 금산전투에서 제봉과
같이 전사한 아들이 둘째인 학봉(鶴峯) 고인후(高因厚·1561~92)다.
창평의 고씨들은 바로 둘째아들 학봉의 후손들을 가리킨다. 제대로 이야기한다면 장흥 고씨 학봉파들
이다.
호남에서 인물들이 배출된 지역 을 거명한다면 4군데다. 소위 ‘광·나·장·창’ 지역이다.
광주·나주·장성·창평을 지칭한다. 창평이 이 4군데에 포함되는 배경에는 창평 고씨들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근래에 이 창평 고씨들 가운데 저명인사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고재욱(高在旭, 전 동아일보 사장)·고재필(高在珌, 전 보사부 장관)·고재청(高在淸, 전 국회부의장)·
고재호(高在鎬, 전 대법관)·고재량(高在亮, 전 광주고법 부장판사)·고중석(高重錫, 헌법재판관)·
고윤석(高允錫, 서울대 부총장)·고문석(高文錫, 전 한양대 법대학장)·고명승(高明昇, 전 육군 대장)·
고일석(高馹錫, 무등양말 창업자) 등이다.
이 가운데 고재청·고재호·고재량은 친형제 간이다. 헌법재판관을 지낸 고중석은 고재호의 조카다.
현 대법원장인 최종영이 고재호의 사위다. 그 뿐만 아니다. 인촌(仁村) 김성수(金性洙, 1891~1955)·
고하(古下) 송진우(宋鎭禹, 1890~1945)·가인(街人) 김병로(金炳魯, 1887~1964)·근촌(芹村)
백관수(白寬洙, 1889~납북)와 같은 기라성 같은 인물들이 창평 고씨들과 깊은 관계에 있다.
일제 말부터 1950년대 중반에 이르기까지 민족주의 우파 진영을 이끌었던 인물들의 출발은 창평
이라는 지역으로 압축된다. 아울러 고씨 집안과 깊은 인연을 맺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놓고 본다면 창평 고씨 집안의 역사와 인맥은 일개 집안이라는 울타리를 뛰어넘어 호남의
인물사, 더 나아가 한국의 근세정치사를 연구하는 데 매우 흥미로운 자료가 되는 것이다.
암울했던 왜정 시절. 서울에는 유명한 사랑채가 하나 있었다. 서울 계동에 있던 인촌 김성수의 사랑방
이었다. 민족의 앞날을 걱정하던 우국지사들이 계동 사랑방에 많이 모이고는 하였다.
아무나 사랑방을 운영하는 것은 아니다. 유명한 사랑방을 운영하기 위한 조건은 재력·식견·덕성을
갖추어야 한다. 그래야 사람이 모인다. 돈만 있고 식견이 없으면 밤새워 할 이야기가 없으니
범속(凡俗)에 빠진다. 돈만 있고 덕성이 없으면 인색해서 베풀 줄 모른다. 겸비한다는 것이 어렵다.
특히 인촌은 돈을 쓸 줄 알았던 사람이다. 돈은 벌기보다 쓰기가 어려워 쓰는 법을 따로 배워야 한다고
하는데, 그는 써야 할 곳에 제대로 썼다. 그러니 사람이 모일 수밖에 없었다. 계동 사랑방은 이 3가지
조건을 모두 갖추고 있었던 일급 살롱이었다. 평일에도 보통 머무르는 손님들이 30~40명은 되었다고
전한다. 현관에는 항상 신발이 수북하였다.
그 식객들 수발하고 밥을 해대느라 이 집 안주인과 며느리들은 손이 거칠어져 시장 아주머니 손
같았다고 한다. 계동 사랑방의 단골 멤버들은 사랑방 주인인 김성수를 비롯하여 김병로·송진우·백관수·
김도연·김준연·장덕수·현상윤·조병옥 등이었다. 다들 한 가락씩 하던 인물들이다.
해방정국을 이끌었던 민족주의 우파의 거물들은 거의 계동 사랑방 단골손님이었다.
한국의 우파, 그러니까 양심적인 우파의 태동은 계동 사랑방이었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한국 우파의 발원지 上月亭>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부분이 있다.
계동 사랑방의 연원(淵源)을 소급해 올라가면 창평의 상월정(上月亭)이 나온다는 사실이다.
현재 창평 고씨 학봉파의 14대 종손인 고영준(高永俊·1939~)의 증언에 의하면 계동 사랑방의
핵심 멤버들은 모두 창평 상월정에서 같이 공부하던 친구 들이었다고 한다.
말하자면 어렸을 때부터 상월정에서 함께 놀고 공부하던 친구들이 장성해서는 계동 사랑방으로
옮겨갔고, 그 사랑방 멤버들이 해방 이후 한국의 정계를 이끄는 인물들이 되었다는 이야기다.
한강의 발원지를 찾아 수백 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강원도 태백의 검용소라는 조그마한 연못이 나오듯
민족주의 우파의 발원지는 전남 창평의 상월정이라는 조그마한 정자였다는 이야기 아닌가.
그렇다면 그 정자를 한번 가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도대체 상월정은 어떤 정자인가.
필자는 학봉파 종손의 안내를 받아 상월정을 찾아가기로 하였다.
창평에서 4륜구동차를 타고 2.5km 정도 나무가 우거진 숲길을 따라 올라가니 상월정이 나온다.
월봉산(月峰山·272m) 중턱에 자리잡고 있다. 그러나 상월정은 전망을 즐기기 위한 개념이 아니었다.
숲 속에 있는 아담한 4칸 접집 한옥이었다. 방이 4개이고 마루가 있어서 보통 8~9명이 거주하며
책을 읽을 수 있는 공부방이었다. (*상월정 위치는 호남정맥 지도에도 나옵니다!-범털 註)
좌우측으로 청룡 백호 날개가 꽉 짜여진 지세여서 차분하게 마음을 가라앉히고 공부할 수 있는 터다.
인가와 떨어진 산 속에 있어서 조용한데다 창평에서부터 걸어서 30분 가량의 거리여서 왕래하기에도
크게 불편하지 않은 곳이었다. 그 입지조건으로 인해 대대로 고씨 집안 자제 가운데 공부하고 싶은
사람은 상월정에 올라가 몇 달 혹은 몇 년씩 공부하였다고 전한다.
정자의 규모는 작지만 역사는 깊다. 상월정의 역사를 보면 창평 고씨들이 400년을 사용하였고,
그 이전에는 함평 이씨들이 300년을 사용하다 외손자인 고씨들에게 물려주었다.
고인후의 장인이 황해감사를 지낸 덕봉(德峰) 이 경(李璥)이었고, 덕봉은 금산전투에서 사위가
순절하자 외손자들에게 상월정을 물려준다. 이를 계기로 학봉파가 창평에 눌러앉게 된 것이다.
상월정은 함평 이씨들이 사용하기 이전에는 언양 김씨들이 400년을 사용하였다고 한다.
언양 김씨들 역시 사위였던 함평 이씨들에게 상월정을 물려 주었다.
옛날에는 사위나 외손자들에게 재산을 많이 물려주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언양 김씨라면 임진왜란때 2차 진주성 싸움에서 끝까지 싸우다 순절한 건재(健齋) 김천일
(金千鎰·1537~93)이 그 후손이다. 김천일도 창평 태생이다.
언뜻 보기에는 별 것 아니지만, 1,000년의 장구한 역사를 가진 공부터가 상월정인 것이다.
1,000년이라면 고려시대 초기부터 시작된 공부방이다.
불교가 국교이던 고려시대에는 한적한 사찰이나 암자에 가서 귀족 집안 자제들이 공부하는 것이
관례였다. 불교를 억압하던 조선시대에도 암자에 가서 과거시험 공부하는 전통은 이어졌다.
양반 집안에서는 주변 10~20리 내에 조그마한 사찰이나 암자를 소유하고 있는 경우가 있었는데,
그 용도는 부녀자들이 불공을 드리거나 과거시험 공부하는 아들들을 한적한 암자에서 공부시키기
위한 목적이었다.
충청도 예산의 추사 고택에서 2km 정도 거리에 자리잡은 화암사(華岩寺)나 경주 최부잣집이 남산
자락에 가지고 있던 와룡암(臥龍庵) 같은 경우가 바로 여기에 해당한다.
상월정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원래 이 터는 대자암(大慈庵)이라고 하는 불교의 암자 터였다고 한다.
고려시대까지는 대자암으로써 언양 김씨들이 수시로 가서 공부하는 암자로 관리하다 조선 초기인
1457년 언양 김씨인 강원감사 김응교(金應敎)에 의하여 상월정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
불교에서 유교적인 이름으로 교체된 것이다.
이를 보면 암자에서 고시 공부하던 전통은 고려시대부터 시작된 것임을 알 수 있다.
1990년대 들어서면서부터는 서울 신림동의 고시원이 고시 공부의 주 터전이 되었지만, 8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이 상월정에는 많은 고시생들이 머물렀다고 한다. 평민당 광주 국회의원이었던 故 신기하
의원도 상월정에서 고시 공부를 하였다. 근래까지 합격자가 상당수 배출되었다.
상월정 바로 밑에는 밥해 주던 사람들이 사는 집이 몇 채 있어서, 식사는 이곳에서 해결하고
상월정에서는 공부만 하였던 것이다.
<‘고직각’ 고정주와 상월정>
고씨들 전용 공부방이었던 상월정에 어떻게 김성수나 김병로·송진우·백관수가 같이 어울릴 수
있었는가. 그 배경은 무엇인가.
3가지 이유를 꼽을 수 있다. 첫째는 고정주의 영향이고, 둘째는 서로 간에 혼맥이 얽혀 있다는 점이며,
셋째는 창평의 독특한 분위기다.
첫째, 고정주의 영향 을 살펴 보자.
그는 구한말 규장각(奎章閣) 직각(直閣) 벼슬 을 지냈다. 그래서 보통 ‘고직각’이라고 호칭한다.
직각의 임무는 규장각에 보관되어 있는 각종 서적과 왕실 문서들을 관리 하는 일이다.
동시에 황자전독(皇子典讀)에 임명되었다. 왕자에게 각종 경전을 가르치는 임무였다.
그러다 보니 고정주는 의친왕 이 강(李堈·1877~1955) 공의 비서실장까지 맡게 된다.
그는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맺어지자 벼슬을 내던지고 고향인 창평으로 낙향한다.
나라를 되찾기 위해서는 인재 양성이 절실한 과제임을 깨닫고 학교를 세우기로 결심한다.
교육의 핵심은 신학문을 익히는 일이었다. 세계사의 조류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서구의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판단이었다.
동·서 문명의 패러다임이 정면으로 충돌했던 19세기 후반에 전통 유학을 신봉했던 선비이자
몰락해 가는 민족의 현실을 코앞에서 목격하였던 지식인으로서 그가 지녔던 사상과 시국관은
어떤 수준이었을까. 이것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그가 소장했던 장서들을 보아야 한다.
고정주의 현손(고손자)인 광주대 고영진 교수가 정리해 놓은 장서 목록은 다음과 같다.
‘음빙실문집’(飮氷室文集, 양계초 지음), ‘동서양역사’(東西洋歷史, 玄采 번역, 1907), ‘만국약사’
(萬國略史, 학부편집국 간행, 1895), ‘태서신사람요’(泰西新史攬要, 학부편집국 간행, 1897),
‘세계식민사’(世界植民史, 李埰雨 번역, 1908), ‘애급근세사’(埃及近世史, 朴殷植 지음, 1905),
‘월남망국사’(越南亡國史, 玄采 번역, 1906), ‘5위인소역사’(五偉人小歷史, 李能雨 번역, 1907),
‘중등만국지지’(中等萬國地誌, 朱榮煥·盧載淵 번역, 학부편집국 간행, 1902), ‘중동전기’
(中東戰記, 1899), ‘만국공법요약’(萬國公法要略, 商務印書局 간행, 1903), ‘외교통의’(外交通義,
安國善 번역, 1907), ‘진명휘론’(進明彙論, 李鐘泰 지음, 1905) 등이다.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가를 파악할 수 있는 책들이다. 이러한 책을 볼 정도였다면 고정주는
당시 조선의 일급 지식인이었음에 틀림없다.
규장각 직각이라고 하면 요즘의 국립도서관장에 해당하는 직책인데, 국립도서관장이라면
최신 정보와 서적들을 충분히 접할 수 있는 자리다. 직각이라는 직책 자체가 1급의 현실인식을
지니도록 하는 데 도움이 됐다는 이야기다.
그러한 사람이 전남 창평의 시골로 내려온 것이다.
고향에 돌아와 시작한 첫 사업이 바로 상월정이었다.
상월정에서 자신의 둘째아들인 고광준과 사위인 김성수, 김성수의 동생인 김연수가 첫 학생이었다.
얼마 후에는 송진우가 참여하였고 뒤를 이어 김병로·백관수가 간간이 출입한 것으로 전해진다.
<모든 비용 무료로 제공한 창흥의숙>
이 시기는 대략 1906년쯤으로 본다.
상월정에서 7~8개월 동안 몇 사람을 모아 공부시키다 이를 발전시켜 ‘영학숙’(英學塾)을 세운다.
영학숙이란 글자 그대로 외국어인 영어를 주로 공부하는 학교였다.
영어를 할 줄 아는 선생을 서울에서 모셔다 놓고 공부하였다.
영학숙이 다시 커져 1908년 창흥의숙으로 발전한다. 창흥의숙은 처음에는 창평 객사(客舍) 건물을
수리하여 사용하였다. 학생수는 50여 명에 이르렀다고 하는데 초등과는 3년, 고등과는 6개월의
속성이었다. 교과 과목은 한문·국사·영어·일어·산술이었다.
창흥의숙은 창평학교로 개칭되었고 현재는 창평초등학교로 변하였다.
고직각이 창흥의숙을 열었을 당시에는 학생이 부족하였다.
학교에 오려면 단발하여야 했기 때문에 부모들이 이를 꺼려 자녀들을 학교에 보내려고 하지 않았다.
의병활동을 하다 순절한 집안 내의 분위기로 보아 단발한다는 것은 쉽게 용납할 수 없었을 것이다.
창흥의숙은 수업료는 일절 받지 않았고, 오히려 학교에 오는 학생들 점심을 무료로 제공하는 입장
이었다. 고직각은 만석꾼의 재산가여서 일체의 비용을 자비로 담당하였다.
학생이 결석하는 날이면 고직각은 하인을 학생집으로 보내 데려올 정도였다고 한다.
그만큼 초창기 창흥의숙 운영은 고직각의 열성적인 후원에 의하여 유지되었던 것이다.
창흥의숙에는 고직각이 데려온 ‘이표’라는 이름의 교사가 있었는데, 이 사람은 수학과 영어에
아주 능숙하였다고 전해진다.
일설에 의하면 이표는 조선인이 아니고 외국인이었다는 설이 있다. 당시 조선사람으로서는 수학과
영어에 능통할 수 없었다는 이유 때문이다.
순천대 홍영기 교수의 연구(‘고정주. 근대교육의 선구자’)에 의하면 고재천(전 전남대 농대학장)과
고재필(전 보사부 장관) 형제, 고재기(전 서강전문대 학장)·고재종(전 전남교육감)·고정석(전 산업
은행장)·고윤석(전 서울대 부총장)·고광표(대창주식회사 회장), 해방후 국회의원을 지낸 김홍용·
문용·성용 3형제, 우리나라에 최초로 야구를 소개한 박석윤(東京제대 졸업)·석기(일제에 맞선 국악인)
형제 등이 창평학교 출신이라고 한다.
3형제 모두 국회의원을 지낸 김홍용·문용·성용은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였던 이회창의 외숙들이다.
이회창의 외가가 바로 창평이었기 때문이다.
동네 사람들의 증언에 의하면 이회창의 어머니인 김사순도 경기여고를 나와 친정 동네인 창평초등
학교에서 몇 년 동안 교편을 잡았다고 한다. 창평 출신의 70대 초반 원로들은 김사순 선생에게 배운
기억을 지금도 간직하고 있다.
이회창도 외가 동네인 창평학교에서 2~3년간 재학한 바 있다고 알려져 있다.
아쉽게도 그 학적부가 6·25 때 불타버리는 바람에 이회창의 기록은 확인할 수 없다.
알고 보면 이회창도 호남과 인연이 깊은 사람인데, 2002년 대통령 선거 때 호남에서 표가 너무
안 나온 셈이다.
다시 본론으로 들어가자.
김성수와 송진우·김병로를 비롯한 호남의 젊은 인재들이 상월정에 이어 영학숙과 창흥의숙에 출입
하게 된 첫째 이유는 고직각의 영향 때문이었다.
두번째, 혼맥관계를 보자.
호남의 4대 명문가인 창평 고씨, 행주 기씨, 연일 정씨, 울산 김씨 간에는 혼맥이 얽히고설켜 있다.
조선시대 혼사라고 하는 것은 수준이 비슷한 양반끼리 하게 마련이다.
A급은 A급끼리, B급은 B급끼리 어울렸다. 이 네 집안은 A급 집안이라고 여겼기 때문에 별로
따지지 않고 많은 혼사가 이루어졌다.
그 가운데서도 창평 고씨와 울산 김씨 사이에 혼사가 많았다.
대표적 사례가 울산 김씨인 인촌 김성수 집안이다. 인촌의 어머니도 고씨였다.
부인은 고직각의 큰딸이었다. 인촌은 상월정을 출입하면서 고직각의 사위가 되었다.
뒤에 며느리 둘도 고씨 집에서 얻었다.
외가도 고씨요, 처가도 고씨, 사돈댁도 고씨였다. 주변에 온통 고씨들이 둘러싸고 있다.
그래서 나온 우스갯소리가 ‘인촌은 고씨들로 병풍을 쳤다’는 말이다.
이렇게 보면 인촌이 17~18세 무렵 창평의 상월정을 출입하게 된 배경이 자연스럽게 이해된다.
<가인 김병로의 외가도 창흥 고씨 집안>
이번에는 가인 김병로 를 보자.
가인의 고향은 창평과 가까운 거리인 순창군 복흥이다.
필자는 가인의 선조 묘가 복흥의 소쿠리명당에 있다고 해서 1990년대 중반에 이곳을 몇 번 답사한
적이 있다. 호남의 지관들 사이에는 소문난 명당이자 답사 코스이기도 하다.
뿐만 아니라 가인의 생가 터도 보니 산줄기 끝자락이어서 기운이 단단히 뭉친 자리였다.
가인의 평소 대쪽 같은 성품도 그 생가 터에 뭉친 기운과 무관하지 않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가인의 외가도 역시 창평이다.
어머니가 창평 고씨였다. 보사부 장관을 지낸 고재필은 가인의 외가와 가까운 촌수다.
가인도 어렸을 적에 외가인 창평에서 성장하였다고 알려져 있다. 가인의 며느리도 역시 창평 고씨다.
동아일보 사장을 지낸 고재욱 씨 누이동생이 가인의 며느리가 되었다.
고하 송진우 가 상월정에 출입한 경위는 색다르다.
고하는 고씨들과 인척이 아니다. 인척이 아닌데 어떻게 인연이 닿았는가.
고하는 이웃 동네인 담양에서 살고 있었다. 청소년 시절부터 물건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이 소문을 들은 고직각은 “담양에 똑똑한 놈이 하나 있다는데 그 놈을 한번 데려와 봐라” 하고
주문하였다. 그렇게 해서 고하는 상월정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그러나 고직각이 청년 송진우를 부른 이면에는 좀 더 깊은 배경이 깔려 있다.
그 배경이란 선대의 인연 으로, 면앙정(傘仰亭) 송 순(宋純·1493~1582)과 제봉 고경명 과의 아름다운
인연이다. 송 순은 담양 소쇄원 일대의 수많은 누정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던 계산풍류(溪山風流),
즉 호남가단(湖南歌團)의 좌장격인 인물이다.
조선 중기 호남의 고급문화를 태동시킨 주인공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면앙정은 뛰어난 학문과 거기에 비례하는 관대한 인품으로 90세라는 보기 드문 장수를 하면서
많은 제자들을 길러냈다.
하서 김인후·고봉 기대승·임제 백 호·제봉 고경명·송강 정 철이 그의 애제자들이다.
모두 한 시대를 풍미한 일급 문사였다.
송 순 이 1552년 담양 제월봉 아래의 정자인 면앙정에서 회갑을 맞이할 때는 기대승이 ‘면앙정기’를
쓰고, 임 제가 부(賦)를 쓰고, 김인후·임억령·박 순·고경명이 시를 지었다.
구전에 의하면 이 회갑잔치에서 기대승·고경명·임 제·정 철 4명의 제자가 스승인 송 순이 탄 가마를
멨다고 한다. 최고의 드림팀이 가마를 멨으니 스승인 송 순의 심정은 얼마나 흐뭇하였겠는가.
면앙정은 필자가 답사해본 정자 가운데 가장 인상적인 정자였다.
정자 자체는 3칸밖에 되지 않는 매우 작은 정자이지만, 산세는 무등산에서 추월산까지,
들판은 창평에서 나주까지 펼쳐지는 100여 리의 전망이 장관을 이루는 곳이다.
180도 파노라마 사진 속에 서 있는 것 같다는 착각이 들었다.
주체인 나와 객체인 산천이 한 덩어리로 동화되도록 만드는 힘이 느껴지는 명당이었다.
주변 경관을 최대한 고려하는 차경(借景)의 미학이란 이런 곳을 두고 하는 소리다.
어떤 장소를 선호하느냐는 그 사람의 취향이나 성격과 관계된다.
이러한 장소를 선호한 인물이라면 생전에 그의 삶이 얼마나 호탕하면서도 담백하였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송 순은 이처럼 비중 있는 인물이다.
고직각의 선조인 고경명이 그의 회갑연 가마까지 멨던 제자였다.
그런데 신평 송씨(新平宋氏)였던 송진우가 바로 송 순의 후손 이었던 것이다.
고직각의 뇌리 속에는 호남가단의 좌장인 송 순과 고경명의 사제관계가 박혀 있었다.
350년 전에 송 순이 고경명을 불렀듯 이제는 고경명의 후손인 고직각이 그 답례로 송 순의 후손인
송진우를 불렀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350년 전에 뿌려 놓은 인연의 씨앗이 상월정에서 꽃피운 셈이다.
세번째는 창평의 독특한 분위기 다.
호남에는 삼성(三城) 삼평(三平)이 있다.
삼성은 곡성(谷城)·보성(寶城)·장성(長城)이고, 삼평은 함평(咸平)·창평(昌平)·남평(南平)을 말한다.
삼성 삼평이 거론되는 이유는 일제 때 일본 사람들이 뿌리내리기 어려웠던 지역 이라고 알려졌기
때문이다.
이 지역 사람들의 단결심과 저항이 강했음을 말해 준다. 창평은 그런 곳 가운데 하나다.
창평은 또한 고씨들의 집성촌이다. 사족들 가운데 고씨 이외의 집안은 거의 살지 않았다.
고씨 외에는 중인들이나 하인들이 함께 살았을 만큼 고씨 일색의 동네였다.
소위 자작일촌(自作一村)의 경우다.
창평현 내에서 일어나는 모든 문제는 집안내의 문제 이기도 하였으므로, 집안의 원로들이 모여
협의해 해결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기강이 잡혀 있던 동네라고도 볼 수 있다. 어떻게 보면 철저한 양반동네라고 볼 수 있다.
그런가 하면 부자동네였다. 들판이 넓고 물이 좋아 농사가 잘 되었다.
특히 물이 좋아 흉년이 다른 동네에 비해서 훨씬 적었다. 천석꾼 부자가 수두룩하였다.
창평에는 쌀로 만든 엿과 한과가 유명하다.
쌀이 귀하던 시절 쌀로 엿과 한과를 만들어 먹을 정도였다면 이 지역의 풍요로움을 짐작할 수 있다.
<동학란과 고씨 집안의 처세>
양반과 지주 계층에 적대적이었던 동학이 일어났을 때 고씨들이 보여준 행태도 주목할 만하다.
고씨 문중의 도유사를 지낸 고재건(80) 옹의 증언에 의하면 다른 지역은 동학군과 양반들 간에
충돌이 많았다.
평소 착취가 심하다고 평판이 난 지주 양반들을 동학군들이 습격하는 과정에서 피를 많이 흘렸다.
그러나 창평 지역은 동학군과의 충돌이 거의 없었다. 명분상으로는 동학에 찬성할 수 없었지만,
비공식적으로는 동학군들에게 식량과 물자를 대주었다는 것이다.
식량과 물자를 공급받은 동학군이 창평의 고씨들을 굳이 습격할 이유는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창평은 난리가 없는 지역이라고 해서 인근 사람들에게 피난처로 인식되었다는 것이다.
인촌이나 가인이 동학이후의 혼란기인 유년시절부터 창평에 머물렀던 이유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 부분이다. 부모들이 어린 아들들을 안전한 피난처라고 여겨지던 창평으로 보냈던 것이다.
기득권을 가진 양반지주 계층이면서도 동학군들과 피를 보지 않고 원만하게 지냈다는 점.
필자는 이 점에 주목하고 싶다.
이 부분이 창평 고씨 내부의 강·온 양파가 공존하게 되는 핵심 원리 이기도 하다.
동학군들에게 비공식적으로 식량을 제공한 처사는 한편으로 보면 타협책이고 처세술일 수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보면 세상 사는 지혜가 아닌가 싶다.
논리적으로는 동학에 공감할 수 없었지만, 정리적(情理的)으로는 차마 모른 체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 처신이 공감이 된다. 세상사에서 논리만 따르다 보면 수수깡처럼 건조한 인간이 될 수 있고,
정리만 따르다 보면 일관성 없이 왔다 갔다 갈 ‘지’(之)자 행보를 걷는 수가 있다.
논리와 정리가 일치하면 행동하기 편하지만, 양자가 서로 일치하지 않을 경우에는 어떻게 할 것인가.
딜레마에 빠진다. 굳이 따진다면 논리가 40%, 정리가 60%쯤 되는 것 아닐까.
밑바탕은 정리가 기본이 된다. 그런 배합에서 나온 행동이 지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러한 절충적 태도는 고직각과 의병을 일으킨 고녹천의 관계에서도 나타난다.
양자는 서로 입장이 달랐다. 한 사람은 학교를 세우자는 입장이었고, 한 사람은 총을 들고 나가자는
입장이었다. ‘세상이 어떻게 변하고 있는데 지금 몇 사람 총 들고 나간다고 문제가 해결될 줄 아느냐?’
‘국가와 민족이 일본의 말발굽에 밟히고 있는데 나가 싸워야지 한가하게 애들이나 가르치고
있느냐?’의 차이였다.
서로 부닥칠 수 있는 충분한 관계였다. 둘 사이에는 이런 일화가 있었다고 한다.
고녹천이 의병을 일으키면서 군사들을 먹일 식량과 군자금이 필요하였다.
식량과 군자금의 조달은 의병대장인 고녹천의 몫이었다.
같은 지역에 살고 있던 고직각은 만석꾼의 부자였다.
하지만 표면상으로는 고녹천의 의병을 지원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밤에 고녹천쪽 사람들이 고직각의 쌀창고에 들어가 쌀을 꺼내가도 추궁하지 않았다고 한다.
알고도 모른 체한 것이다.
드러내놓고 줄 수는 없지만 알아서 가져가라는 태도였던 셈이다.
서로 지향하는 노선이 달라 각기 갈 길을 갔지만, 최소한의 통로는 뚫려 있어서 충돌하는 관계는
아니었던 것이다.
고직각과 고녹천은 같은 집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표면적으로는 서로 지원하는 관계가
아니었으므로, 후일 의병이 실패한 뒤 의병 가담자들이 일제의 가혹한 보복을 당할 때도
고직각 라인은 상대적으로 피해가 적었다.
<독립자금 갹출 때 보였던 인촌의 행태>
이러한 태도는 고직각의 제자이자 사위인 인촌의 행보에서도 발견된다.
인촌은 부자로 알려져 독립운동가들이 군자금을 요청하는 경우가 많았다.
때로는 총을 들고 인촌집에 들어와 돈을 요구하는 경우도 있었다.
부자는 이러한 상황에서 처신하기 어렵다.
인촌은 그 자리에서는 가타부타 아무 말 없이 금고에서 돈을 한 다발 꺼내 방바닥에 놓고 나갔다고
한다. 자금조달을 하러 온 독립투사가 그 돈을 가지고 갔음은 물론이다.
뒤에 일본 경찰이 인촌에게 왜 돈을 주었느냐고 추궁하면 ‘나는 강도를 당해 돈을 뺏긴 것이지,
내가 자발적으로 독립자금을 댄 것은 아니다’라는 논리로 피해 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필자는 어렸을 때 어른들로부터 이와 같은 인촌의 일화를 듣고 감탄하고는 했는데,
이번에 고씨 집안 사람들을 만나 보니 그 원조는 창평의 동학 때부터 시작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창평에는 창흥의숙 외에 또 하나의 명물이 있었다. 1930년대 중반에 세운 창평상회다.
만석꾼이었던 고직각 형제가 자본금을 출자하여 일제의 자본침탈에 대항하기 위하여 세운 근대식
상회다. 당시 일제는 아전들에게 장기저리로 자금을 빌려주었다.
아전들은 일제로부터 빌려온 값싼 자금으로 고리대금업을 하였다.
고리대금업 방법은 ‘장치기’라는 방법이었다고 한다.
장치기는 돈 없는 서민들에게 높은 이자의 돈을 빌려준 다음 5일마다 돌아오는 장날마다 돈을
회수하는 방법이었다. 5일장이라는 것은 양반들은 돈을 쓰는 날이지만, 돈이 없는 민초들은 물건을
내다 팔아 돈을 만지는 날이다. 때문에 장날에 민초들에게는 돈이 들어온다.
장치기 수법은 민초들이 돈을 만지는 장날을 기다렸다가 돈을 회수하는 것이었다.
일제로부터 장기저리로 돈을 빌려 민초들에게 고리로 돈을 빌려주는 장치기는 그야말로 땅 짚고
헤엄치는 돈벌이였다. 시간이 흐를수록 서민들의 돈은 아전들에게 들어갔고, 결국 그 돈은 다시
일제로 들어갔다. 일제는 식민지 정책에 협력하는 아전층을 육성하는 한편, 그 아전들을 통하여
기존의 자본시장을 해체하고 자신들의 의도대로 재편하려는 계획을 깔고 있었던 셈이다.
창평상회의 업무는 2가지였다.
하나는 과자를 비롯한 잡화를 파는 일이었다. 당시 일본에서 나온 과자가 대중들 사이에 선풍적
인기를 끌었다고 하는데, 창평상회는 이 과자를 취급하였다.
과자 외에도 일용잡화를 수십 가지 진열해 놓아 창평상회는 일명 만물상회로 불리기도 하였다.
다른 하나는 서민들에 대한 대출 업무였다.
새마을금고와 농협을 합쳐 놓은 성격이었다. 일본인의 물건과 돈을 쓰지 않게 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또 한 가지 목적은 고씨 집안 부잣집 청년들 가운데 놀고먹는 청년들을 취업시켜 일도 배우게 하고
경제도 익히게 하려는 의도도 있었다. 창평상회가 세워지자 인근 지역민들의 호응은 대단하였다.
주민들이 창평상회로 몰려드는 바람에 5일마다 서는 창평 장날이 한산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창평상회는 광주에 지점을 내기까지 하였다. 창평상회의 설립으로 인해 창평에는
일본인들이 뿌리를 내릴 수 없었다. 관공서에 근무하는 일본인 외에는 거주하는 일본인이 없었다
는 것이 중론이다.
1930년대 후반 창평상회에 근무한 바 있는 고재건(80)의 기억에 의하면 현재 창평농협이 있는
자리가 과거의 창평상회 자리라고 한다. 창평농협 길 건너에는 창평장터가 지금도 남아 있다.
장터에는 그 유명한 국밥집이 있어서 창평에 들르는 답사객들이 요즘도 한번씩 들르는 명소
이기도 하다.
창평상회는 해방 이후 흐지부지되었다.
일제 때 대출해 주었던 돈이 해방 이후에는 화폐가치가 폭락하면서 쓸모 없게 된 까닭이었다.
화폐가치의 폭락은 자본금을 바닥나게 만들었다. 고직각 형제가 자금을 출연하여 세운 창평상회로
인해 전남의 시골인 창평에는 일본자금이 들어올 수 없었다는 사실은 기억해야 할 일이다.
고녹천은 의병을 일으켜 자존을 지키려 하였다.
구한말 의병은 전·후기로 구분할 수 있는데, 1차 의병은 1895년 민비 시해와 단발령에 대한 반발로
일어났고, 2차 의병은 을사조약 체결 후에 일어났다.
호남에서 1차 의병은 장성의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이 주도하여 일어났다.
기우만은 19세기 호남을 대표하는 학자인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의 손자다.
기정진은 외세를 배격하고 자존을 지켜야 한다는 ‘위정척사’를 주장하였고, 손자인 기우만 역시
위정척사의 사상적 배경 하에 의병활동을 하였다.
호남의 2차 의병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인물이 바로 고녹천이다.
녹천은 1차 의병인 기우만 의병에 참여하다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2차 의병을 일으킨다.
녹천이 의병을 일으키면서 내건 기치 가운데 하나가 ‘가국지수(家國之讐)를 갚자’였다.
‘집안과 국가의 원수를 갚자’는 내용이다. 녹천에게 일본은 국가의 원수이기도 하였지만,
집안의 원수이기도 하였다. 임란 때 금산전투에서 순절한 고경명과 고인후는 그의 12대조와
11대조에 해당하므로 일본은 집안의 원수이기도 하였던 것이다.
<고녹천과 13명 의병의 장렬한 최후>
녹천이 죽을 각오를 한 것은 집안의 가풍과 관련된다.
또한 녹천을 따라 같이 의병에 참가했던 병사들 대부분이 창평 고씨들이라는 사실에서도
‘임란 때 3부자 순절’이라는 고씨 집안의 역사가 후손들의 뇌리에 큰 영향을 미쳤음이 드러난다.
의병활동은 무수한 대가를 치러야만 하는 가시밭길이었다.
왜경은 의병활동에 대한 보복으로 창평에 있는 그의 집을 불태워 버렸다.
녹천은 고인후의 11대 종손이므로, 종가가 모두 불타버린 것이다.
후손들의 증언에 의하면 1907년 8월 누런 옷을 입은 왜경 수백 명이 첫새벽에 녹천의 집이 있는
유천(柳川)에 들이닥쳤다. 중대병력이 출동했던 것으로 보인다.
왜경은 100호 되는 동네사람들을 녹천 생가 큰집 마당에 집합시켰다.
아랫마당에는 남자들을 모아놓고, 윗마당에는 부녀자와 어린애들을 모아 놓았다.
그러고는 대검을 착검한 총으로 남자들을 두들겨 팼다.
“고대장은 어디 있느냐? 고대장 있는 곳을 대라.”
두들겨 맞으면서도 누구 하나 대답하지 않자 결국 종가를 불태웠다.
수백 년 내려온 고서와 유품들이 모두 불타버리는 참화를 겪었다.
불타는 집을 보고 벙어리였던 녹천의 아들이 저항하자, 왜경은 대검으로 생식기 부분을 찔러
선혈이 낭자하였다. 이 때문에 녹천 종택에는 현재 유물이 하나도 전해지지 않는다.
한편 녹천은 의병들을 이끌고 여기저기 게릴라전을 펼치다 지리산 연곡사(燕谷寺)로 들어갔다.
지리산은 산이 깊어 본격적인 게릴라전을 펼치기에는 적당한 지형이었다.
그러나 의병들이 연곡사에 은신해 있다는 첩보를 입수한 일본 군경 도꼬로 소대의 포위 공격을
받는다.
1907년 10월11일 이른 새벽이었다. 고녹천을 포함한 13명의 의병이 전사하고 만다.
이때 고녹천의 나이 60세였다. 노인의 몸으로 총을 쏘다 장렬하게 전사한 것이다.
우연의 일치일까. 임란 때 금산전투에서 전사한 고경명의 나이도 60세였다.
315년을 간격으로 조상과 후손이 똑같은 나이에 의병으로 나섰다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순절한 것이다.
매천 황 현은 고녹천의 전사 소식을 듣고 녹천의 초라한 무덤 앞에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연곡의 수많은 봉우리마다 숲은 울창한데
(千峰燕谷鬱蒼蒼)
평생 나라 위해 숨어 싸우다 목숨을 바쳤도다.
(小 蟲沙也國喪)
전마는 흩어져 논두렁에 누워 있고
(戰馬散從禾 臥)
까마귀 떼만 나무숲 사이로 날아 앉는구나.
(神鳥齊下樹陰翔)
나같이 글만 아는 선비 무엇에 쓸거나
(我曺文字終安用)
이름난 조상의 집 그 명성 따를 길 없네.
(名祖家聲不可當)
홀로 서쪽을 바라보며 뜨거운 눈물 흘리니
(獨向西風彈熱淚)
새 무덤 옆에 국화가 향기를 품어 올리네.
(新墳突兀菊花傍)
보통 지도자가 전사하면 그를 따르던 병사들은 흩어지게 마련이다.
그러나 고녹천이 연곡사에서 전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따르던 의병들은 흩어지지 않고
활동을 계속하였다.
대장이 죽어도 흩어지지 않고 활동이 이어졌다는 점이 고녹천 의병의 특징이라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씨족결사였다는 데 그 원인이 있다.
녹천을 따르던 의병들은 대부분 창평 고씨들이었다고 한다.
고씨들이 의병에 나서게 된 핵심적인 이유는 한 개인을 추종해서라기보다 ‘임란 때 삼부자가 순절한
집안’이라는 고씨들 특유의 긍지와 의무감이 작용한 탓이라고 보인다.
녹천이 전사하자 그 뒤를 이은 의병활동은 두 갈래로 나뉜다.
한 갈래는 고광수(高光秀·1875~1945)였고, 다른 갈래는 고광문(高光文·1864~1944)이었다.
이들은 녹천과 같은 광(光)자 항렬이었다.
참고로 고씨 집안의 항렬을 보면 고인후의 10대손이 목(木)에 해당하는 주(柱)자 항렬이다.
직각을 지낸 고정주가 바로 주자 항렬이다. 그 다음이 화(火)에 해당하는 광(光)자 항렬이고,
토(土)에 해당하는 재(在)- 금(金)에 해당하는 석(錫)- 수(水)에 해당하는 영(永)-
목에 해당하는 병(秉)자 항렬로 이어진다.
<천석꾼 고광수의 항일 투쟁>
고광수는 의병진의 선봉장이었다.
연곡사 습격이 있던 전날 밤 선발대를 이끌고 미리 화개를 향하였다.
화개장터에 있는 일본군을 습격하기 위해서였다.
그 시간에 화개에 있던 일본군은 다른 길로 해서 연곡사를 습격했던 것이다.
길이 두 개여서 서로 엇갈렸다고 한다. 화개에 도착해 보니 일본군은 한 명도 없고 얼마 뒤에야
연곡사가 공격당한 것을 알게 되었다.
고광수는 천석꾼의 부잣집 아들이었다. 재산을 털어 의병활동에 소요되는 비용을 담당하였다.
천석의 재산을 여기에 다 썼다고 한다. 일본군은 그 보복으로 남원 효기리 응령에 있던 그의 집을
불태워 버렸다.
집이 하도 커서 불타고 남은 문고리를 모아 보니 가마니로 하나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고래등 같은 기와집이 모두 탄 것이다. 그 뒤로도 여기저기에서 게릴라전을 펼치다 끝내는
도망다니는 수배자의 처지가 되었다. 금강산으로 피신해 숨어 있다 해방되던 해에 죽었다.
고광문을 보자. 고광문은 연곡사가 포위공격당할 때 포위망을 뚫고 탈출할 수 있었다.
포위당하였음을 안 녹천이 의병 명단이 적혀 있는 문건을 주면서 어서 빨리 피하라고 엄명을
내린 탓이었다.
만약 이 의병 명단이 일본군 손에 넘어가면 수많은 가족들이 피해를 당할 터이니 이것을 가지고
도망가라고 당부했던 것이다.
고광문 역시 연곡사 이후 광양·구례·순천·곡성을 몇 달간 전전하면서 게릴라전을 펼쳤다.
마지막으로 그가 주력한 일은 무등산에 200명의 의병을 모아 놓고 광주 공격을 계획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 일 역시 첩자가 있어서 정보가 미리 새나가는 바람에 무산되었다.
할 수 없이 고광문은 집안 동지인 고광수와 함께 금강산으로 들어가 은신한다.
해방 바로 전해인 1944년에 죽었다.
고광문은 일본 헌병의 추적을 피하기 위하여 1907년 이후부터는 고광술(高光述)로 이름을 바꾸어
사용하였다. 최근까지 후손들도 고광문과 고광술이 서로 다른 사람으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몇 년 전 일본 경찰측에서 의병들의 신상을 조사한 기록인 ‘전남폭도사’라는 문건이 발견됨
으로써 고광문과 고광술이 같은 인물이라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고씨 집안에서 의병활동으로 국가의 훈장을 받은 인물은 총 6명이다.
이 수는 신원이 확인된 경우이고, 신원이 확인되지 않은 사람까지 포함하면 훨씬 더 많은 수가
나올 것이다.
의병에 투신한 고녹천과 고광수·고광문 후손들은 고생을 많이 하였다.
집안도 불타고 아버지가 피신 생활을 하는 통에 집안 형편이 말이 아니었다.
학교도 많이 다닐 수 없었다. 하지만 그 후손들의 긍지는 아직도 이어지고 있다.
전국의 명문가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보유하고 있는 고홍석(高洪錫·72)은 고광수의 손자이고,
고씨 집안의 역사와 구전자료를 광범위하게 기억하고 있는 고중석(高中錫·72)은 고광문의 손자다.
필자는 고씨 집안을 취재하면서 이 두 분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이 두 사람이 집안의 역사와 보학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 계기는 의병에 가담한 선조를 두었기 때문
이었다. 자랑스러운 조상의 업적을 후손으로서 알아야 한다는 사명감이 그 동력이었을 것이다.
고씨 집안이 명문으로 전국적 명성을 얻게 된 계기는 삼부자 불천위(不遷位: 위패를 옮기지 않음)다.
보통 제사는 4대까지만 지낸다. 즉, 아버지·할아버지·증조부·고조부까지만 제사를 지내도록 되어 있다.
5대조의 위패는 자동으로 옮겨져 묘소 앞에 묻힌다. 하지만 대학자가 되거나 국가에 공로가 큰 인물
에게는 4대라는 기간이 넘어서도 그 위패를 옮기지 않고 영원히 제사를 지내도록 국가에서 지정한다.
마치 영국의 왕실에서 공이 큰 신하에게 작위를 내리는 경우와 비슷하다. 그
러한 영광이 바로 불천위다. 집안에서 불천위가 한 명만 나와도 명문이라고 할 수 있는데,
고씨 집안은 고경명과 그의 큰아들 준봉(?峯) 종후(從厚), 둘째아들 학봉(鶴峯) 인후(因厚) 등 3명이
불천위를 받았다. 필자가 보기에 조선조 500년 동안 한 집안에서 삼부자 불천위를 받은 유일한 사례다.
제봉이 전라도 의병장으로 금산전투에 참가했던 시점은 그의 나이 60세였다.
40세만 되어도 중늙은이를 자처하던 조선시대의 풍습에 비추어볼 때 60세라는 나이는 노인 중에서도
상노인으로 취급받던 나이였다. 백발이 성성한 상노인이 분연히 말에 올라 칼을 잡았던 것이다.
존경받던 원로가 앞장을 서서 전쟁터로 나가자 이에 감격한 6,000명의 전라도 사람들이 그의 뒤에
구름같이 모였다.
<제봉 고경명의 ‘마상격문’>
제봉이 말에 올라 전쟁터로 나가면서 작성한 격문이 오늘날까지도 식자층들에게 회자되는
‘마상격문’(馬上檄文)이다.
최치원의 ‘황소격문’(黃巢檄文), 제갈공명의 ‘출사표’(出師表)와 함께 3대 격문에 들어갈 만큼
명문으로 알려져 있다.
‘옷 소매를 떨치며 단상에 올라 눈물을 뿌리고 군중과 맹서하니, 곰을 잡고 범을 넘어뜨릴 장사는
천둥 울리듯 바람치듯 달려오고, 수레를 뛰어 오르고 관문을 넘어가는 무리는 구름 모이듯 비 쏟듯
한다…’는 내용의 마상격문은 광주·남원·전주·여산을 비롯한 전라도 선비들의 심금을 울리고 말았다.
제봉의 동생이었던 경신(敬身)은 전투에 필요한 말을 구하러 제주도에 갔다 오다 풍랑을 만나
익사하였고, 또 다른 동생인 경형(敬兄)은 1593년 진주성 싸움에서 전사하였다.
당시 32세였던 고경명의 둘째아들 인후는 아버지와 함께 금산전투에서 전사하였고,
40세였던 큰아들 종후는 1년 뒤 진주성 싸움에서 숙부인 경형과 함께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전사한 두 아들 모두 대과 급제를 한 수재들이었음은 물론이다.
16세였던 막내아들 청사(晴沙) 용후(用厚)도 아버지 제봉을 따라 가려고 하자 “너는 나이도 어리고,
집안에 남아서 할 일이 있다”고 제봉이 타이른다.
임란이 끝난 후 대과에 급제한 용후가 아버지와 형님들을 비롯한 집안의 모든 기록들을 정리하여
세상에 남긴다. 그러한 역할을 충실하게 이행한 청사를 가리켜 호남에서 떠도는 표현이
‘무청사(無晴沙)면 무제봉(無霽峯)’이라는 말이다.
막내아들 청사가 없었더라면 제봉 집안의 행적도 남아 있지 않았을 것이라는 의미다.
창평면에는 유천(柳川)이라는 동네와 삼지내(三川)라는 동네가 있다. 냇물을 따라 이름을 지었다.
유천쪽에는 고녹천의 종가를 비롯하여 의병에 참여했던 후손들이 많이 사는 지역이고,
삼지내에는 창흥의숙을 세운 고직각의 후손들이 주로 사는 지역이다.
유천에 사는 후손들은 나라를 지키기 위해 싸웠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고,
삼지내에 사는 후손들은 국가의 계몽에 기여하였다는 자부심을 지니고 산다.
한 집안에서 이처럼 두 방면으로 뚜렷한 업적을 남긴 집안도 우리나라에서는 드물다.
녹천과 직각이 추구했던 보수와 개화의 두 노선은 근세 100년 동안 우리 민족이 고민했던 화두다.
그 고민은 명분과 실리의 고민이기도 하였다. 어느 것 하나 버릴 수 없다.
이 두 가지를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 그것이 여전히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