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라는 함정에 빠진 한민족
일본에는 ‘구다라 나이’라는 말이 있다. 직역하면 ‘백제 것이 아니다’ 또는 ‘백제에는 없는 것’이란 뜻으로 ‘시시한 것’을 말할 때 일본인이면 누구나 쉽게 쓰는 용어다.
어떻게 사물의 가치를 평가하는 기준이 ‘백제’가 된 것일까?
어떻게 ‘백제 것이 아닌 것은 시시한 것’이라고 말 할 수 있는 것일까?
일인들은 어떻게 해서든 역사적으로 일본과 우리가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말하고 싶어 안달이 난 사람들이다. 경제적으로 우위에 서다보니까 한껏 우쭐대고 싶어지는데 왠지 역사와 문화 앞에만 서면 한없이 작아지는 자신이 초라하기 짝이 없을 것이다.
벌건 대낮에 역사를 왜곡하고 왜곡된 역사를 교과서에 담아서 전 일본의 국민들에게 주입하려는 시도가 그래서 서글픈 몸부림으로 보인다.
그러나 가냘픈 갈대가 밀려오는 바닷물을 몸으로 견디어 내듯 왜곡하고 감추고 발버둥치는 몸부림이 강해질수록 ‘구다라 나이’는 말없이 역사의 진실을 웅변할 것이다.
이렇듯 역사는 곳곳에 진실의 씨앗을 남겨 놓아 미래를 기약하는 한편 반대로 아픈 상처가 되어 정신을 황폐하게 만드는 유용한 도구가 되기도 한다.
‘구다라 나이’는 백제가 일본에 심은 역사의 씨앗이라면 일제가 우리에게 남긴 씨앗도 있으니 ‘반도’라는 역사지리 용어가 그것이다.
우리가 흔히 자랑스럽게 쓰는 ‘한반도’라는 용어를 비롯하여 몇몇 용어들에 대해서 왜 우리가 이들 용어를 쓰면 안되는지를 살펴보려 한다.
1. 한반도
세계 동서 대립의 구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분단국의 하나인 우리나라에서는 남한과 북한 두 개의 정권이 들어선 이래 90년대 들어 남북 화해무드의 조성에 따라 정치권에서는 남북한을 동시에 호칭하는 새로운 호칭의 필요성이 대두 되었다.
이런 사정을 배경으로 적절한 호칭을 찾던 당국에서는 우리 지형을 묘사한 ‘반도’라는 호칭을 주목하고 거기에 우리 민족의 상징어라고 하는 ‘한’을 머리에 덧붙여 ‘한반도’라는 말을 쓰기로 합의하였다.
당연히 우리의 지형을 이용하여 남북한을 동시에 호칭할 수 있다는 장점 때문에 ‘한반도’라는 호칭은 널리 두루 사용되었다.
그러나 이 ‘한반도’라는 호칭은 조어법(造語法)에도 맞지 않고 우리의 정서에는 더구나 맞지 않는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대체로 각 나라들이 용어를 만들어가는 과정에는 자기들이 지향하는 방향성이 있기 마련이다. 예를 들면 대륙에 바탕을 둔 나라들은 대륙을 전제로 해양으로의 진출을 꾀하기 때문에 대륙으로부터 뻗어나간 지형을 ‘곶(串)’이라 부른다. ‘곶’이란 ‘고추’를 연상하면 적당한 용어로 대륙에서 해양으로 ‘고추처럼 쭉 뻗어 있다’라는 뜻이다. 남자의 좆이나 여자의 젖이 이에 해당한다.
반면에 섬나라들은 자기 섬나라를 위주로 용어를 만드는 습성이 있다. 때문에 자신들이 살고 있는 섬은 ‘전도(全島, 완전한 섬)’이고 우리나라나 이태리처럼 해양으로 쭉 뻗어있는 지형은 ‘반도(半島)’ 즉 ‘반동아리 섬’이라고 부른다.
동일한 지형을 두고 ‘곶’과 ‘반도’라는 서로 다른 용어가 탄생하게 되는 것은 그 주체의 거주지의 특성에 따른 것으로 이로부터 우리는 역사 용어의 탄생의 배경을 읽어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반도’란 분명 섬나라에서 기인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우리나라를 ‘반도(半島)’라고 부른 것은 분명 섬나라 일본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며 더구나 그 용어가 사용되기 시작한 시기가 일제가 우리나라를 침략하여 강제로 침탈할 때이므로 우리로서는 단순한 지형을 일컫는 의미를 넘어 치욕의 역사까지를 고려하여 신중히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더구나 야만적인 침탈과 침중한 억압 속에 노예처럼 살다 생을 마감한 수많은 우리 백성들을 고려할 때 도저히 일제가 남긴 찌꺼기를 그대로 놓아 둘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반도’라는 말에 익숙해져가고 있으며 한술 더 떠 마치 ‘반도’ 앞에 ‘한’을 붙이면 ‘반도’가 빛나는 한민족의 반도라도 되는 양 ‘한반도’를 즐겨 사용하고 있는 실정이다.
우리는 스스로 우리나라 이름을 지을만한 역량도 없고 철학도 없어서 하필이면 일제가 우리를 얕잡아 보고 비아냥거리며 지칭한 ‘반도’를 쓸 수밖에 없는 것일까?
역사적으로 우리 남북한을 통합할 호칭으로 적합한 호칭을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우리 역사가 일만 년인데 어찌 그 안에 우리 한민족을 먹여 살릴 양식이 없겠는가? 어찌 그 안에 우리를 통합할 이데올로기가 없을 것이며 그 가운데 우리 모두를 부를 호칭이 하나도 없겠는가?
역사에 무지한 세대를 안타까워 할 뿐이다.
2. 개화기
동일한 논리로 고려할 용어가 ‘개화기’라는 우리 국사교과서의 시대구분 표기이다.
어느 경우든 ‘개화’란 ‘미개’를 전제로 한 용어이다. 따라서 우리 역사에 개화기가 있다면 그 이전의 역사는 미개와 야만의 역사인 것이다.
과연 어느 때에 우리 선조들은 ‘미개한 종족’이었던가? 이 ‘개화기’라는 용어가 일제의 침탈과 더불어 사용되기 시작했으므로 일제의 침략 이전에 우리는 ‘야만인’과 같은 삶을 살았다는 것인데 과연 그럴까?
그러나 이런 논의는 그 자체로 이미 의미가 없는 일이다. 왜냐하면 이 용어 역시 일제가 우리를 식민화하기 위한 술책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우리보다 조금 앞서 서구화 즉 근대화에 참여한 일제가 우리를 식민지화할 목적으로 우리나라를 미개한 나라로 규정해버렸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제치하에서는 어쩔 수 없이 그랬다 하더라도 이제 광복 60주년이다. 광복 후 60년이 되도록 아직도 우리 국사교과서에 버젓이 시대구분의 한 용어가 되어버린 ‘개화기’라는 말은 우리 스스로 우리 조상들을 욕보이고 우리 스스로의 자존심을 뭉개버리는 수치스러운 용어이다.
이런 까닭에 우리는 스스로 우리에게 ‘민족의식’ 또는 ‘역사의식’이 있는가를 자문하게 된다.
자기 조상들을 야만인으로 규정하여 국민교육을 시키는 나라가 이 세상에 또 있을까? 설령 정말 야만인으로 살았다하더라도 그 후손된 입장에서 조상들의 명예를 고려하여 미화하고 꾸미려하는 것이 인지상정일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인류사상 우수한 철학과 문화민족인 선조를 결과적으로 ‘미개’한 존재로 규정하고 후손들에게 대대로 교육하고 있는 실정이니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를 일이다.
우리 국민들이 갈팡질팡 혼란에 빠져있는 이유를 새삼 알 것 같다.
3. 중국
우리가 아무런 규정 없이 무분별하게 사용함으로써 혼란을 야기하는 용어에 ‘중국’이 있다.
우선 스스로 반문해보자.
‘중국’이란 어느 나라를 말하는가?
대부분 지금의 ‘중화인민공화국’을 거론할 것이다. 그러나 그 나라는 ‘중화인민공화국’이지 중국은 아니다. 만일 ‘중화인민공화국’을 약칭하여 ‘중국’이라고 할 수 있다면 우리나라의 호칭인 ‘대한민국’은 ‘대국’으로 불러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도 하나의 말작난에 불과하다.
대체로 중원 대륙에 자리한 나라를 ‘중국’이라고 부르는 인식이 동양인의 저변에 깔려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중원 대륙을 ‘중국’이라고 부르게 된 까닭은 무엇일까?
그 전에 먼저 우리가 대체로 ‘중국’이라고 부르는 곳에 세워진 나라의 이름들을 거론해보자.
가까이로부터 청, 명, 원, 금, 요, 송, 당, 수, 한, 진, 전국(7웅), 춘추(5패), 주, 은, 하에 이르기까지 많은 나라들이 있었지만 ‘중국’이라는 나라이름은 없다.
그런데 어디를 ‘중국’이라고 하는 것일까?
지금의 우리나라 학자들은 대부분 이들 중 어느 나라를 지칭하더라도 무분별하게 ‘중국’이라고 부른다. 아무런 구분이나 정의도 없이 주나라도 중국이요 수나라도 중국이요 송나라도 중국이라고 부른다.
어느 새로운 것이 우리나라에 출현했는데 그 뿌리를 잘 알 수 없으면 ‘고대 중국으로부터 들어온 것으로’라고 얼버무린다.
고대 중국은 또 어느 나라를 말하는 것인가?
우리 역사에 대한 지식이 없으면 그야말로 뭐가 뭔지도 모르고 둘러대기 십상이다.
대체로 동양에는 ‘중심국’이라는 개념이 있다. 정치적인 체제와는 관계없이 정신적인 지도자가 이끄는 나라를 ‘중심국’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그 정신적인 지도력을 따르는 나라들은 자신들의 국체를 유지한 상태에서 정신적인 지도자가 있는 나라를 ‘중국’이라고 불렀다.
역사적으로 고대에는 한국(桓國)이, 배달국(倍達國)이, 조선(朝鮮)이, 고구리(高句麗)가 맥을 이어 ‘동양의 중심국’이었다.
고구리를 다른 말로 ‘가우리’라고 하는데 ‘가우리’란 ‘중심’이라는 말이다.
따라서 동양사에서 ‘중국’이라는 나라의 개념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않으면 그 난맥을 풀 길이 없다.
우리는 우리대로 ‘중국’이라는 호칭이 낯설어 중화인민공화국의 몫으로 돌리고 중화인민공화국은 구태여 아니라고 물리칠 이유가 없으므로 그냥 앉아서 들어오는 떡 다 받아먹고 입다물고 있으니 도대체 누가 주인공이고 누가 객인지를 알 수가 없게 되어버린 것이다.
훈민정음을 창제하신 세종대왕께서 정인지 서문을 통하여 ‘나랏말씀이 듕귁에 달라’ 라고 하시고 주하기를 ‘듕귁은 황제가 계신 곳’이라고 풀이하였으니 이때의 ‘중국’은 ‘명’나라를 말한다고 볼 수도 있다. 그렇다면 그냥 ‘明과 달라’라고 하면 될 것을 굳이 있지도 않은 ‘듕귁’을 거론한 까닭이 무엇일까?
적어도 조선조까지만 해도 이 ‘중국’이란 개념은 곧 ‘중심국’을 말하는 것으로 당시는 이미 ‘중심국’이 명나라로 넘어가 있을 때이므로 명이란 국호 대신에 ‘듕귁’을 말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우리가 중심국이었던 시절에 우리는 저들을 ‘지나(支那)’라고 불렀다. ‘지나(支那)’란 ‘곁가지가 되는 땅’이란 뜻이다. 지금은 ‘남중국해’라고 고쳐 부르지만 고치기전에는 ‘남지나해(南支那海)’라고 불렀다. ‘중국’을 ‘지나’로 불렀다는 움직일 수 없는 증거다.
곁가지가 있다면 본줄기가 있을 것인데 누가 본 줄기이고 누가 곁가지 인지는 말하지 않아도 자명하다.
이런 역사인식을 회복하게 되면 동양사에서 우리 한민족의 위상이 저절로 드러난다.
음습하고 자학적인 학문의 토양을 털어버리고 저 대륙에서 태양을 지향하며 한덩어리산(희말라야맥)을 내지르던 한민족의 위상을 지향하자.
거기 우리와 지나와 동양의 산과 기슭과 섬들에 뿌리두고 살아가는 모든 겨레들의 살 길이 있다.
펌 : 고륜의 한소리( http://goryun.com/ha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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