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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52] 번뇌야 놀자

만년지기 우근 2009. 4. 1. 04:34

 

 

 

 

부처님이 깨우친 내용이 이와 같이 '연기법'입니다.

연기법은 불교의 모든 명제에 대한 이론적 근거가 될 뿐만 아니라

수행의 기준이 되며 부처님이 있던 없던 이 우주 삼라만상의

기본법칙입니다.

 

부처님의 제자 아난이 연기법의 내용이 간단하고 자기 기대에

못 미쳤는지 시큰둥하니까 부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아난아, 그런 말하지 말아라.

연기법은 매우 심오한 법이니 보통 사람이 능히 깨칠 수 있는

법이 아니다."

 

이 연기법 속에서 오온五蘊12처ㆍ생로병사生老病死를 여의는 모든 법이

짜여지게 되고, 인과법칙因果法則, 인연화합因緣和合, 일체존재의

상의상관성相依相關性 등 모든 불교적 개념들이 연기법 속에

포섭되는 것입니다.

또한 연기법은 공사상의 주체인 중도中道의 이론적 근거가 되며,

인과응보因果應報 또는 업보業報라는 인간존재의 법칙이 되어

나타나기도 합니다.

또한 연기법은 인연화합으로 성주괴공成住壞空의 이합집산離合集散

거듭하며 흘러가는 우주宇宙의 존재법칙存在法則이 되기도 합니다.

 

나중에 말씀 드리겠지만 연기법은 불교의 핵심 사상인 무상, 무아,

, 유식, 중도 등 모든 명제의 기본 틀이 되는 것이고,

특히 수행을 통해서 깨달아야 할 목표이기에 잘 이해하셔야 합니다.

연기법으로 통하지 않는 것이 하나도 없게 됩니다.

 

이렇게 모든 불교 사상의 기본법칙으로서의 연기법은 그 기초에

십이연기설十二緣起說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십이연기설은 사성제와 마찬가지로 '어떻게 하여서 괴로움이 생기고,

어떻게 해야 괴로움이 소멸하는가?'라는 명제를 논리적으로

풀이한 것입니다.

 

괴로움의 원인은 무명無明과 갈애渴愛라고 했습니다.

곧 집착執着입니다.

무명無明은 명[vidya]이 아닌 상태입니다.

즉 진리에 대해 밝게 인식하지 못함을 이르는 말입니다.

괴로움의 최초의 근본원인은 무명이라는 얘기입니다.

십이연기설은 무명에서부터 어떻게 생. . . . . .

. 라는 고통이 생기는가에 대한 자세한 과정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무명으로 말미암아서[연기해서 - ] 이 있게 되고,

으로 말미암아 식이 있게 되고, 이어서 명색名色이 있게 되고,

육입六入이 있게 되고, 이 있게 되고, 가 있게 되고,

가 있게 되고, 가 있게 되고, 가 있게 되고,

이 있게 되고, 생을 말미암아서 노, , , , ,

가 있게 된다.

그리하여 커다란 하나의 괴로운 온의 집이 있게 된다".

 

따라서 불교의 이상인 "괴로움의 소멸을 위해서는,

즉 노. . . . . 뇌를 소멸하기 위해서는 생이 소멸되어야 하고,

유를 소멸하기 위해서는 취가 소멸되어야 하고"하는 식으로 역으로

소멸하여, 결국 괴로움이 소멸하기 위해서는 무명이

소멸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초기 경전에서 설해진 가장 종합적이고 체계적인 가르침입니다.

그 안에는 사성제四聖諦, 오온五蘊, 십이처十二處 등의 교설敎說

종합적으로 정리, 조직되어 있습니다.

 

좀 장황한 해설 같은데 간략히 말씀 드리면, 고통苦痛의 원인은 깨닫지

못한 상태, 즉 무명으로 인해 집착이 생기고 또 고통을 겪고 있다는

것이고 그 고통을 없애기 위해서는 무명을 없애야 한다는 논리입니다.

무명을 없애는 길이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바로 수행을 의미합니다.

결국 고통의 원인은 집착執着이며 그 집착으로 인한 결과는 고통입니다.

또한 수행이 원인이 되어 고통을 멸한 열반의 상태가 결과가 되는

또 다른 연기법이 성립됩니다.

 

이런 이유로 십이연기를 고통의 생멸 혹은 제법의 생멸을 설명하는

견해로 볼 수도 있는데 이는 '있음'을 전제로 하는 생멸의 개념으로

볼 것이 아니라 법계의 연기로 봐야 오해가 없습니다.

법계의 연기는 그 자성이 없음을 얘기하는데 곧 중도中道를 말합니다.

중도를 근거로 하면 불생불멸이기 때문에 십이연기를 생멸의 근거로

보는 견해를 잘못된 것으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연기법은 불법의 요체로서 부처님께서 발견하셨을 뿐이지 진리

그 자체로 영원한 것입니다. 그 진리를 발견하는 과정이 참선입니다.

참선 자체가 목표가 아니라 연기법을 깨닫기 위한 하나의

''일 뿐입니다.

깨달음으로 가는 길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아니 수 없이 많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느 길을 가느냐는 각자의 선택입니다.

 

옛날 어떤 선사는 "부처가 말한 일체 법은 일체의 마음을 제도하기

위함인데, 나에겐 일체의 마음이 없으니 일체 법이

무슨 소용이 있으리"라고 했습니다.

어떤 길이 더 좋고 나쁘고는 없습니다.

 

오조연의 재미있는 도둑 얘기가 있습니다.

아마 이 얘기를 들어 본 분들도 많이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옛날에 어떤 도둑이 있었는데 도둑질하는 실력이 뛰어 났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의 자식이 커서는 그에게 그 실력을 가르쳐 달라고

졸라대는 것입니다.

하루는 그 성화에 못 이겨 같이 도둑질을 하러 가자고 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은 몰래 한 집에 들어가 방안에 있는 큰 궤짝을

하나 발견했습니다.

아버지가 자물쇠를 열고는 아들에게 들어가 물건을 꺼내

오라고 했습니다.

아들이 궤짝 안으로 들어가자 아버지는 즉시 자물쇠를 잠가 버리고는

큰 소리로 "도둑이야"하고 외치고 나서 자기는 도망쳤습니다.

이때 고함 소리를 들은 집안 사람들은 등불을 들고 도둑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여자아이가 촛불을 들고 궤짝 주변에 나타났습니다.

아들은 급한 나머지 꾀를 내어 찍찍거리며 쥐 소리를

내기 시작했습니다.

여자아이는 마님에게 도둑은 없고 쥐가 있다고 하면서

자물쇠로 궤짝을 열었습니다.

아들은 문이 열리자 재빨리 튀어 나와서는 입으로 촛불을 불어 끄고는

도망쳤습니다.

 

집으로 달려와 보니까 아버지는 자고 있었습니다.

아들은 아버지를 깨워 왜 자기를 놔두고 도망쳤냐고 따졌습니다.

아버지는 별일 아니라는 듯이 말했습니다.

"너 나오지 않았느냐?

그래 너 성공했다, 내가 의발衣鉢을 너에게 전하마"

 

도둑질하는 데는 정해진 법이 없으니 잘 도망쳐 나오면 된다는 것입니다.

오조연은 말하기를 성불하는 데는 정해진 법은 없다.

아무것이나 어느 한 가지를 닦으면서 스스로 방법을

생각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부처님이 깨달아 '부처'라는 이름을 얻은

그 명제는 바로 연기법입니다.

연기법은 깨닫지 못한 중생의 입장에서 이 세상의

도리를 설명한 것입니다.

저는 부처님이 발견한 진짜 훌륭한 점은 우리 모두가 불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라고 생각합니다.

 

부처님은 이와 같이 중생들이 그 자체로 이미 완벽한 부처인데도

번뇌로 가득한 미혹한 마음이 이를 가로 막고 있어

스스로 부처임을 망각한 채 온갖 세상일에 마음을 빼앗겨

자기도 모르게 탐진치貪瞋痴 삼독심三毒心을 내어 결국 윤회의 사슬에서

헤어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는 이를 가엽게 여겨 49년간 수 많은

방편을 동원하여 중생들로 하여금 마음의 중요성을 깨닫게 하고

궁극적으로는 스스로 성불의 길을 가게 하려고 무진

애를 쓰신 것입니다.   

 

불교의 궁극적 목적은 물론 깨달음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무엇을 위한 깨달음인가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부처님은 증지부경전에서 "내가 가르치는 것은 괴로움과 괴로움의

소멸이다"고 말했습니다.

부처님의 모든 가르침은 궁극적으로는 괴로움에서의 해탈이라는

목적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고집멸도苦集滅道 사성제에 잘 설명되어 있습니다.

 

십이연기설十二緣起說에서 무명無明은 사성제의 이치를 모르는 것이라고

설해져 있습니다.

깨달음이라는 어떤 실체가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그 실체를

쫓아다니는 것은 무지無智의 소산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러한 무지의 환상에서 깨어나는 것이야말로 바른 깨달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깨닫기 위해서는 반드시 수행이 필수적입니다.

부처님은 괴로움을 멸하는 수행의 길잡이로 중도中道를 주창하였고

중도를 실천함에 있어 기준이 되는 점을 팔정도로써 설명하였습니다.

팔정도의 첫째인 정견正見은 바로 연기법을 바르게 아는 것입니다.

 

연기법이 불교의 시작이자 끝이며 수행의 길잡이입니다.

깨달음을 신비스럽게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깨달았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신통력을 얻을 수도 있지만 여기에 집착하는

순간 이미 깨달음은 가고 없습니다.

그 어느 것에도 집착하는 마음을 내지 않는 것이 바로 깨달음입니다.

집착하지 않기 위해서는 마음을 철저히 지켜봐야 합니다.

이 순간을 철저히 알아차리는 것이 바로 깨달음으로 가는 길입니다.

 

깨달은 분들은 마음을 24시간 알아차리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특별할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것이 깨달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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