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원처럼 한번 만나고 싶었다.
블로거 기사로 매일 오르는 연꽃을 아직 한번도 만난적이 없기에 내일 죽더라도 연꽃 한번 만나 담고 싶었다.
관곡지, 세미정, 안압지, 부여등등 많은 지역의 연꽃이 블로거 기사가 되었지만, 기동성이 미약하다보니 장소 선정도 쉽지가 않았는데, 경북 청도 유호연지가 기사로 올랐기에 얼마전에 검색을 마쳤으며, 가능하면 내가 좋아하는 기차여행을 겸한 연꽃 만나는 날을 만들고 싶어 오늘 청도 유호연지에 다녀왔다.
(기차 여행 이야기와 함께 청도 이야기는 나중에 하고.)
부산역에서 청도까지는 무궁화호로 1시간 조금 넘게 걸렸으며, 청도역에 내리니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 마음이 바빠 비옷과 우산을 준비하지 않았기에 역과 가까운 마트에서 우산을 구입하고 청도읍에서 화양읍까지 택시를 이용하였으며, 거리는 7~8km였다. 택시기사님에게 유호연지라고 하니 몰랐고 옆의 기사님께서 '유등연못'이라고 알려주었는데, 지역이 경북 청도군 화양읍 유등리이기에 청도 사람들은 '유등연못'이라고 부른다고 하였다.
작업 후에 청도역까지 다시 나와야 하기에 기사님에게 명함을 받았는데, 감사하게 콜 비용없이 왕복요금으로 기다려주마하여 마음이 편안하였으며, 유호연지에 도착하였을 때 역시 비가 살풋살풋 내렸지만 우산은 그리 필요하지 않을것 같아 택시에 두었다.
맙소사!
블로거 기사에 오른 그 연꽃들은 어디에 있단 말인가?
2만 600 여평의 연못은 어쩌다 분홍점이 있을 뿐 푸르디푸르기만 하였다. 군자정(君子亭)에 들려 건너편으로 가면 어떻게 가야 하냐고 여쭈니 길따라 돌아올 수 있다는 답변에 군자정 오른편으로 걸었다.[군자정(君子亭) 설명은 아래에]
나, 부산도 아니고 새벽에 일어나서 꽃단장하고 진해에서 왔다구 - 연꽃을 많이 피우지 못한 유호연지의 무심함을 탓할 수 없기에 줌으로라도 연꽃을 담아야했다. 이제 언제 다시 올지 모르는 곳이라, 배터리 12개를 충전하여 갔는데.
걷다보니 연꽃이 보였다. 그런데 너무 멀다. 다른 지역의 연꽃단지처럼 연못 안으로 길이 있는것도 아니며, 내리는 비에 길이 미끄러웠지만 풀을 잡으며 연못가로 최대한 내려갔는데, 수풀에서 뱀이 나올까 무섭기도 하였다.
연못가에 작은 물고기들이 죽어 둥둥 뜬게 보였다. 일단 한컷 담았다. 왜 죽었지?
푸른 연못과 간간히 핀 멀리 있는 연꽃 구경으로 물고기의 죽음은 잊고 그나마 꽃이 핀 연꽃이 보이기에 수풀 아래로 다시 내려가는데 이게 왠 일인가.
악 -
몇됫박은 될만한 죽은 작은물고기가 길 위에 버려진걸 모르고 그걸 밟아 미끄러졌다. 비릿함, 난감함!
왼팔목과 발목이 아팠다. 카메라는 흙을 뒤집어 썼고. 열심히 닦았다. 그런데 닦다보니 오른손엔 피가 흐른다. 흑 -
엉덩이가 축축하며 비린내가 진동을 하기에 만져보니 냇물에 주저앉은 꼴이었다.
카메라의 흙을 닦고 작동을 실험하니 이상이 없어 다행이었으며, 아무리 비릿하고 난감한 일이지만 연꽃 한컷 못담고 돌아서야 한다는건 너무 가혹한 일이라 손을 길에 고인 빗물에 씻고 신발의 흙도 대충 씻고 엉덩이도 빗물을 묻혀 쓸었다. 축축함 - 흑 -
내가 너무 큰걸 소원하였나, 손의 피를 연신 닦으면서 멀리 피어있는 연꽃들을 줌으로 담았다. 넓은 연못도 담고 봉오리도 담고.
그동안 시도하지 않은 줌을 이용하여 접사로 담았다.
놀라웠다. 줌은 '초접사'가능이 되지 않는데, 그럴듯한 접사가 되는것이다. 하느님이여 캐논 카메라여 --
연못을 한바퀴 돌면서 아픔과 축축함은 잊을 정도로 열심히 연꽃을 담았다. 겨우 몇송이였지만, 나는 한 송이 꽃으로도 그동안 여러 풍경을 만들었기에 몇송이의 연꽃은 축복이다.
(내 카메라 기종은 캐논 S2is, 500 만 화소이다. 똑딱이 유저님들에게 부탁드리고 싶다. 기죽을 필요없다고. 나머지는 아래에 올리는 연꽃 줌- 접사로 확인하시길)
물론 줌 접사를 시도하며 위험한 장소에서 위험한 몸짓으로 숨을 죽이며 최선을 다하였다.
비린내와 축축함으로 망가지면 어때, 또 다른 새로움으로 이렇게 기쁜데.
보통 연꽃과의 거리는 2~3m 였으며, 그 이상도 있다.
출발한 장소인 군자정으로 돌아 오는데, 작은배에 여자 한분이 탔기에 불렀다. 탈 수 있나요?
관리인께서 뒤집어질 수 있기 때문에 불가하다는 답변이었으며, 모방송국에서 촬영중이었다. 여자분은 리포트였으며, 나중에 배에서 내려 방송국 관계자분들이 내가 리포트의 모습을 담는게 예사 포즈가 아니었다면서 자신의 사진을 받아볼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나는 그 리포트에게 메일로 사진을 보내주마 하며 메일 주소를 받았는데, 다른 관계자분이 연꽃 사진을 메일로 받아 볼 수 있겠느냐고 물어왔다.
하여, 인물은 이니셜없이 원본으로 보내줄 수 있지만, 풍경등은 이니셜이 삽입되며, 상업적인 용도로는 허용하지 않는다니까, 그럼 됐다면서 저작권을 이해하여 주었다. 흠 --
비는 멎었고 나름 기쁜 시간을 보낸 유호연지였다. (리포트 사진 역시 줌으로 담았으며, 더 가까이 담은 모습도 있지만 개인의 사진이라 많이 올리지는 않음.)
또 하나 욕심을 가져본다. 백련 한번 담아 지난해 담은 백련차(白蓮茶) 내용과 함께 올리고 싶다.
위의 풍경에 있는 정자가 군자정이며, 아래 사진은 입구와 안내 표지이다.
군자정(君子亭)
연꽃은 예로부터 군자에 비유된 꽃이다. 군자정은 연꽃 같은 청정한 군자를 추구한 창건주의 정신과 연꽃사랑 마음이 서려 있는 정자다. 군자정은 조선시대 중종 때 모헌(慕軒) 이육(생몰 시기 미상)이 지어 강학하던 곳으로, 연꽃 같은 군자를 염원하며 정자를 짓고 연밭을 조성한 500년의 역사가 간직돼 있다.
모헌은 함창, 보은, 평택 등지의 현감을 지낸 이평의 다섯 아들 중 넷째다. 맏형 쌍매당(雙梅堂) 이윤은 문과급제 후 청도군수와 부제학 등을 역임했고, 둘째형 망헌(忘軒) 이주 역시 문과급제 후 요직을 두루 거쳤다. 특히 시문학에 뛰어났다. 셋째형 이전은 현감을 지냈다. 안동에서 태어나고 자란 모헌 자신은 안기도찰방(安奇道察訪)을 역임했다. 아우인 이려는 문과급제 후 사간원 정언(正言), 홍문관 수찬(修撰) 등을 지냈다.
5형제 모두 점필재(畢齋) 김종직의 제자로 명성을 떨친 영재들이었으나, 모두 시절과 맞지 않아 제대로 뜻을 펴지 못했다. 쌍매당은 무오사화에 연루되어 거제도로 유배되고, 망헌은 무오사화와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갑자사화 때 처형되었다. 사화로 인해 형제 모두 점필재의 제자라는 이유 때문에 죽거나 유배되고 은둔하게 된다.
모헌은 사화로 가문의 수난이 시작되자 망헌이 유배되어 있던 진도를 오가면서 마음이 끌렸던, 산은 높지 않으나 수려하고(山不高而秀麗) 땅은 넓지 않으나 비옥한(地不廣而肥沃) 청도 유호(유등의 옛이름)에 은둔하게 된다.
안동에서 내려와 이곳 청도에 정착한 모헌은 후학을 가르치고 선비들과 학문을 논하며 일생을 보내게 되었다. 모헌은 이전부터 있던 조그마한 못을 더 파고 넓혀 지금과 비슷한 규모로 만들어 '유호(柳湖)'라 이름 붙였다. 정자 옆에는 지금도 오래된 버드나무가 있다.
모헌은 직접 유호에 연을 심어 연밭을 조성한 뒤 1531년 연못 속에 정자를 지었다. 이름을 군자정이라 붙이고 제자들과 함께 강학에 힘썼다. 모헌이 연을 특별히 사랑하고 정자 이름을 군자정이라 한 데는 그 연원이 있다.
중국 북송시대염계(濂溪) 주돈이에게로 거슬러 올라간다. 주돈이는 모란을 부귀한 자에 비유하고, 국화는 은사(隱士)에 비유했다. 그리고 연꽃은 군자에 비유했다. 모헌은 주돈이의 정신을 이어받아 연꽃처럼 청정한 군자를 추구했기에 정자 이름을 군자정이라 하고, 연밭도 지성으로 가꾸었던 것이다.
4칸 겹집으로 구조가 특이한 군자정은 1915년 중창한 후 수차례의 중수를 거쳤으며, 현재의 건물은 1970년에 중건한 것을 1989년 새로 중수한 것이다. 유호연지의 물은 청도 들녘의 수원이 되고 있고, 연꽃이 만개한 풍경은 장관을 이루어 청도팔경 중의 하나로 꼽힌다.
☆.. 참고 - 지역민의 말씀을 빌리면 연꽃이 유호연지를 분홍색으로 덮으려면 열흘 내지 보름 후가 되어야 한다고 하였으니, 유호연지에서 연꽃을 담고 싶은 분은 그때 가시고 조용히 즐기고 싶은 분은 지금도 좋으니 방문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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