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 장군 묘에는 정말 풀이 나지 않았을까.’ ‘떼를 입혔는데 처음에는 자라다가 나중에 말라 죽은 것일까.’ 어릴 적부터 이만저만 궁금한게 아니었다. 이런 의문과 관심은 어른이 되어서도 마찬가지여서 꼭 한 번 가보고 싶었다.
작년 늦가을 혼자 묘역에 올랐다가 어스름 땅거미에 쫓겨 기겁하고 종종걸음을 친 적이 있다. 겨울에 가까운 해가 그토록 짧은 줄 깜빡 잊었던 것이다. 올봄에는 거봉 김혁규 회장(한국풍수지리중앙회)과 임원들이 동행하여 든든했다. 이렇게 두 번을 가보고서야 ‘역사적 의문’은 풀렸다. 최영(1316∼1388) 장군 묘에는 풀과 떼가 잘 자라고 있다.
황금을 보기를 돌같이 하라/ 이르신 어버이 뜻을 받들어/ 한평생 나라 위해 바치셨으니/ 그 이름 빛나리라 최영 장군.
처음 이 노래를 배우면서 아버지 가르침에 따라 일평생 재물을 탐 안 내고 나라만 위하며 살다간 장군을 하늘같이 흠모했다. 최영은 회군하는 이성계군을 맞아 싸우다 체포돼 73세에 참형됐는데, 이때 생을 마감하며 “내가 탐욕한 마음이 있었다면 내 무덤 위에 풀이 날 것이고 그렇지 않았다면 풀도 나지 않을 것이다”고 유언했다.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 산 70-2번지. 경기도 기념물 제23호로 지정된 그의 묘를 찾아가는 길은 좀 험하다. 서울시립 장재장(벽제화장터)을 지나 통일로에 들어선 후 이정표를 따라 한참을 가다 보면 대자산 자락이 앞을 막아선다. 모든 차량은 이곳에서 멈춰서야 한다. 궁궐이나 종묘 앞에 서 있는 ‘대소인원개하마(大小人員皆下馬·누구든지 이 앞을 지날 때 말에서 내리라는 뜻)’라고 쓴 ‘하마비(下馬碑)’는 없지만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차에서 내려 0.5㎞는 걸어야 한다. 낭만적인 이 오솔길도 최영 장군과 무당과의 접신(接神) 관계를 알고 나면 금방 등골이 오싹해지고 만다.
묘역에는 두 묘가 상하로 있는데 위쪽은 아버지 동원부원군 최원직이고 아래는 최영 장군과 부인의 합폄 묘다. 고려 말 우왕(재위 1375∼1388) 당시 문하시중과 팔도도통사로 권력의 최정상에 있을 때 골라 쓴 좋은 자리다. 자신의 첩 딸이 우왕에게 시집가 영비(寧妃)가 되었고 부원군(왕비의 친정아버지) 자리에 오르면서 모든 권력이 그의 손아귀에 있을 때다.
“장군의 묘에는 5·16 이전부터 풍수공부 한다고 찾아다녔습니다. 정말 그때만 해도 떼 한 장 살지 않는 붉은 황토 무덤이었어요. 상석, 비석, 문인석에는 촛농이 두껍게 쌓였었고 근처 나무마다 오색 헝겊이 덕지덕지 걸려 있어 대낮에도 으스스했습니다. 전국 각 곳의 무녀들이 찾아와 ‘최영 장군 신’을 받는다며 굿판을 벌인 때문입니다. 아마 그 때문에도 잔디가 못 살았을 겁니다.”
“이런 산국(山局)을 회룡은산(回龍隱山)이라 하는데 발복이 더딘 곳입니다. 대자산 중심맥은 양편으로 갈라섰고 구불구불한 지맥이 속살을 파고드는 형세잖아요. 용은 하늘로 머리를 두어야 승천하는데 땅속을 향했으니 후손들이 감응받기엔 세월이 좀 걸렸을 겁니다.”
최영 이후 동주 최씨는 조선왕조에 와 이렇다 할 벼슬길에 오른 후손이 없다. 태조 6년(1397) 무민공(武愍公)이란 시호를 내려 넋을 위로하고 제전답(祭田畓)과 함께 복권시켰으나 500년 동안 숨어 지냈다. 3·1운동 때 독립선언서를 작성한 육당 최남선과 국무총리와 대한적십자사 총재를 지낸 최두선이 형제간으로 동주 최씨다.
묘 좌향은 모두 자좌오향으로 정남쪽이다. 혈처 뒤에서 논둑처럼 솟아 내려오는 입수(入首) 용맥은 임(壬·북에서 서로 15도) 방향이니 좌(시신의 머리를 두는 곳)와 15도 차이밖에 안 나 거의 곧게 뻗은 내룡이다. 물길이 처음 보이는 입수(入水) 지점은 무덤 좌측의 갑(甲·동에서 북으로 15도) 방향이고 물이 빠져나가는 끝 파구는 미(未·남에서 서로 30도) 방향이어서 혈처를 감아 돌았다. 묘를 중심삼고 물길이 거의 반원을 그린 지형으로 부귀왕정한다는 자왕향(自旺向)이다. 간략하긴 하나 이렇게 용맥과 물길을 판단하는 것이 수국사대법이다.
지관들은 누구나 입수(入首) 용맥을 중요시해 묘 자리를 잡을 때는 반드시 산등성이에 오른다. 이때 무를 심는 밭 두둑처럼 생긴 용맥이 내려오면서 좁아졌다 넓어졌다를 반복하면 길한 것이다. 중간중간에 큰 바위가 있어 기를 모았다가 풀어 주고는 혈처 위에 와 우뚝 멈춰서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자리다. 용맥이 굴절하는 것을 결인이라 하며 바위가 가로막는 것을 여기(餘氣·땅기운이 남아 뭉친 것)라 하여 길격 중의 최상으로 친다. 그러나 어느 명당혈처엘 가 보아도 이기(理氣)에 딱 맞아떨어지는 형기(形氣)를 갖춘 산은 찾아 보기가 힘들다. 이 또한 공평한 땅의 이치로 자연은 모든 것을 한 곳에 내주지 않는다.
최영은 역사적 공적이 두드러진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그에 관한 자료는 의외로 허술하다. 가장 중요한 본관도 엇갈려 묘역 입구 안내판에는 동주(철원의 옛 지명) 최씨로 철원에서 태어났다고 기록해 놓았으나 다른 자료에는 창녕 최씨로 경기도 고양이 출생지라고 기술한 곳이 있다.
역사적 평가도 구구하다.
팔도도통사 최영의 주장대로 조민수·이성계 좌·우도통사가 위화도 회군을 않고 요동정벌에 나섰더라면 의당히 그 전쟁에 승리하여 우리 영토를 넓혔을 것처럼 비분강개하는 시각들도 있다. 하지만 사학계는 그 당시 국제정세를 그토록 녹록하게 보고 있지 않다. 고려가 종주국으로 섬기던 원나라(1271∼1368)는 이미 중원을 석권한 주원장에게 패해 북원(北元)으로 쫓겨간 뒤였고, 그 후 주원장이 건국한 명나라(1368∼1644)는 300년 가까이 대륙을 지배했다. 일부에서는 최영 측의 구파 군벌과 조민수·이성계의 신파 군벌 간 대립으로 보며 당시 고려 군사력으로는 요동정벌 자체가 무리였다고 분석하고 있다.
고려사 ‘최영열전’에는 군졸이 한 걸음만 물러서도 곧 목을 베었으며 그러기에 가는 곳마다 공을 세웠고 한번도 패한 적이 없었다고 기록해 놓았다. 동 시대의 간대부(諫大夫) 윤소종이 “최영의 공은 한 나라를 덮었고 죄는 천하에 가득하다”고 평하자 세상에서는 이를 명언이라고 했다.
이 같은 무당의 접신 활동은 세습무(世襲巫)보다 강신무(降神巫) 쪽이 더 왕성하다. 접신 현상은 타고난 혈통과 무관하며 어느 날 갑자기 신의 계시를 받아 무당(여자 무당)이나 박수(남자 무당)가 되는 것이다. 이들은 무당들끼리만 혼인하는 무계혼(巫系婚 또는 동간혼·同間婚이라고도 함)으로 계보를 이어 간다.
세습무는 가계 혈통에 의해 사제권(司祭權)이 계승되는 직업 무당이다. 진도 씻김굿, 동해안 별신굿, 제주 영등굿, 서해안 대동굿 등 주로 해안선을 따라 집중되고 있으나 서울굿, 도당굿 등 내륙지방에도 명맥이 이어지고 있다. 굿판에 동원되는 무악(巫樂) 무가(巫歌) 무무(巫舞) 등은 모두 인간문화재로 지정돼 그 기능이 전수, 보존되고 있다.
최영 장군은 죽은 지 600년이 넘었지만 아직도 우리의 전통 민속문화 속에 시퍼렇게 살아 있다. 굿판에서 만나는 그의 위세와 잡신 장악 능력은 실로 놀랍다. 최영과 접신된 무당은 머리카락을 썰어 날려 버리는 예리한 작두 날 위에서 맨발로 훌훌 날며 춤을 춘다. 도대체 인간의 죽음과 무덤의 진실이 무엇인지 산행이 거듭될수록 미지의 영역으로 다가온다.
시인·온세종교신문 발행인
작년 늦가을 혼자 묘역에 올랐다가 어스름 땅거미에 쫓겨 기겁하고 종종걸음을 친 적이 있다. 겨울에 가까운 해가 그토록 짧은 줄 깜빡 잊었던 것이다. 올봄에는 거봉 김혁규 회장(한국풍수지리중앙회)과 임원들이 동행하여 든든했다. 이렇게 두 번을 가보고서야 ‘역사적 의문’은 풀렸다. 최영(1316∼1388) 장군 묘에는 풀과 떼가 잘 자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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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에서 본 아버지 동원부원군 최원직 묘(뒤쪽)와 함께 있는 장군 묘역. 회룡은산의 작국으로 안산이 혈처보다 높아 은둔하기에 좋은 곳이다. |
황금을 보기를 돌같이 하라/ 이르신 어버이 뜻을 받들어/ 한평생 나라 위해 바치셨으니/ 그 이름 빛나리라 최영 장군.
처음 이 노래를 배우면서 아버지 가르침에 따라 일평생 재물을 탐 안 내고 나라만 위하며 살다간 장군을 하늘같이 흠모했다. 최영은 회군하는 이성계군을 맞아 싸우다 체포돼 73세에 참형됐는데, 이때 생을 마감하며 “내가 탐욕한 마음이 있었다면 내 무덤 위에 풀이 날 것이고 그렇지 않았다면 풀도 나지 않을 것이다”고 유언했다.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 산 70-2번지. 경기도 기념물 제23호로 지정된 그의 묘를 찾아가는 길은 좀 험하다. 서울시립 장재장(벽제화장터)을 지나 통일로에 들어선 후 이정표를 따라 한참을 가다 보면 대자산 자락이 앞을 막아선다. 모든 차량은 이곳에서 멈춰서야 한다. 궁궐이나 종묘 앞에 서 있는 ‘대소인원개하마(大小人員皆下馬·누구든지 이 앞을 지날 때 말에서 내리라는 뜻)’라고 쓴 ‘하마비(下馬碑)’는 없지만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차에서 내려 0.5㎞는 걸어야 한다. 낭만적인 이 오솔길도 최영 장군과 무당과의 접신(接神) 관계를 알고 나면 금방 등골이 오싹해지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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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원부원군 묘 앞의 고려 석비. 무당들의 촛불로 시커멓게 그을려 있다. |
묘역에는 두 묘가 상하로 있는데 위쪽은 아버지 동원부원군 최원직이고 아래는 최영 장군과 부인의 합폄 묘다. 고려 말 우왕(재위 1375∼1388) 당시 문하시중과 팔도도통사로 권력의 최정상에 있을 때 골라 쓴 좋은 자리다. 자신의 첩 딸이 우왕에게 시집가 영비(寧妃)가 되었고 부원군(왕비의 친정아버지) 자리에 오르면서 모든 권력이 그의 손아귀에 있을 때다.
“장군의 묘에는 5·16 이전부터 풍수공부 한다고 찾아다녔습니다. 정말 그때만 해도 떼 한 장 살지 않는 붉은 황토 무덤이었어요. 상석, 비석, 문인석에는 촛농이 두껍게 쌓였었고 근처 나무마다 오색 헝겊이 덕지덕지 걸려 있어 대낮에도 으스스했습니다. 전국 각 곳의 무녀들이 찾아와 ‘최영 장군 신’을 받는다며 굿판을 벌인 때문입니다. 아마 그 때문에도 잔디가 못 살았을 겁니다.”
“이런 산국(山局)을 회룡은산(回龍隱山)이라 하는데 발복이 더딘 곳입니다. 대자산 중심맥은 양편으로 갈라섰고 구불구불한 지맥이 속살을 파고드는 형세잖아요. 용은 하늘로 머리를 두어야 승천하는데 땅속을 향했으니 후손들이 감응받기엔 세월이 좀 걸렸을 겁니다.”
최영 이후 동주 최씨는 조선왕조에 와 이렇다 할 벼슬길에 오른 후손이 없다. 태조 6년(1397) 무민공(武愍公)이란 시호를 내려 넋을 위로하고 제전답(祭田畓)과 함께 복권시켰으나 500년 동안 숨어 지냈다. 3·1운동 때 독립선언서를 작성한 육당 최남선과 국무총리와 대한적십자사 총재를 지낸 최두선이 형제간으로 동주 최씨다.
묘 좌향은 모두 자좌오향으로 정남쪽이다. 혈처 뒤에서 논둑처럼 솟아 내려오는 입수(入首) 용맥은 임(壬·북에서 서로 15도) 방향이니 좌(시신의 머리를 두는 곳)와 15도 차이밖에 안 나 거의 곧게 뻗은 내룡이다. 물길이 처음 보이는 입수(入水) 지점은 무덤 좌측의 갑(甲·동에서 북으로 15도) 방향이고 물이 빠져나가는 끝 파구는 미(未·남에서 서로 30도) 방향이어서 혈처를 감아 돌았다. 묘를 중심삼고 물길이 거의 반원을 그린 지형으로 부귀왕정한다는 자왕향(自旺向)이다. 간략하긴 하나 이렇게 용맥과 물길을 판단하는 것이 수국사대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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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 앞 전순의 돌계단과 안내표시판. 기록된 내용 일부가 사실과 다르다. |
지관들은 누구나 입수(入首) 용맥을 중요시해 묘 자리를 잡을 때는 반드시 산등성이에 오른다. 이때 무를 심는 밭 두둑처럼 생긴 용맥이 내려오면서 좁아졌다 넓어졌다를 반복하면 길한 것이다. 중간중간에 큰 바위가 있어 기를 모았다가 풀어 주고는 혈처 위에 와 우뚝 멈춰서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자리다. 용맥이 굴절하는 것을 결인이라 하며 바위가 가로막는 것을 여기(餘氣·땅기운이 남아 뭉친 것)라 하여 길격 중의 최상으로 친다. 그러나 어느 명당혈처엘 가 보아도 이기(理氣)에 딱 맞아떨어지는 형기(形氣)를 갖춘 산은 찾아 보기가 힘들다. 이 또한 공평한 땅의 이치로 자연은 모든 것을 한 곳에 내주지 않는다.
최영은 역사적 공적이 두드러진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그에 관한 자료는 의외로 허술하다. 가장 중요한 본관도 엇갈려 묘역 입구 안내판에는 동주(철원의 옛 지명) 최씨로 철원에서 태어났다고 기록해 놓았으나 다른 자료에는 창녕 최씨로 경기도 고양이 출생지라고 기술한 곳이 있다.
역사적 평가도 구구하다.
팔도도통사 최영의 주장대로 조민수·이성계 좌·우도통사가 위화도 회군을 않고 요동정벌에 나섰더라면 의당히 그 전쟁에 승리하여 우리 영토를 넓혔을 것처럼 비분강개하는 시각들도 있다. 하지만 사학계는 그 당시 국제정세를 그토록 녹록하게 보고 있지 않다. 고려가 종주국으로 섬기던 원나라(1271∼1368)는 이미 중원을 석권한 주원장에게 패해 북원(北元)으로 쫓겨간 뒤였고, 그 후 주원장이 건국한 명나라(1368∼1644)는 300년 가까이 대륙을 지배했다. 일부에서는 최영 측의 구파 군벌과 조민수·이성계의 신파 군벌 간 대립으로 보며 당시 고려 군사력으로는 요동정벌 자체가 무리였다고 분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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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역에 오르는 오솔길의 낙엽. 무당들이 ‘최영장군 신’을 접신하러 가는 외통로로 혼자 걷기에는 섬뜩하다. |
고려사 ‘최영열전’에는 군졸이 한 걸음만 물러서도 곧 목을 베었으며 그러기에 가는 곳마다 공을 세웠고 한번도 패한 적이 없었다고 기록해 놓았다. 동 시대의 간대부(諫大夫) 윤소종이 “최영의 공은 한 나라를 덮었고 죄는 천하에 가득하다”고 평하자 세상에서는 이를 명언이라고 했다.
이 같은 무당의 접신 활동은 세습무(世襲巫)보다 강신무(降神巫) 쪽이 더 왕성하다. 접신 현상은 타고난 혈통과 무관하며 어느 날 갑자기 신의 계시를 받아 무당(여자 무당)이나 박수(남자 무당)가 되는 것이다. 이들은 무당들끼리만 혼인하는 무계혼(巫系婚 또는 동간혼·同間婚이라고도 함)으로 계보를 이어 간다.
세습무는 가계 혈통에 의해 사제권(司祭權)이 계승되는 직업 무당이다. 진도 씻김굿, 동해안 별신굿, 제주 영등굿, 서해안 대동굿 등 주로 해안선을 따라 집중되고 있으나 서울굿, 도당굿 등 내륙지방에도 명맥이 이어지고 있다. 굿판에 동원되는 무악(巫樂) 무가(巫歌) 무무(巫舞) 등은 모두 인간문화재로 지정돼 그 기능이 전수, 보존되고 있다.
최영 장군은 죽은 지 600년이 넘었지만 아직도 우리의 전통 민속문화 속에 시퍼렇게 살아 있다. 굿판에서 만나는 그의 위세와 잡신 장악 능력은 실로 놀랍다. 최영과 접신된 무당은 머리카락을 썰어 날려 버리는 예리한 작두 날 위에서 맨발로 훌훌 날며 춤을 춘다. 도대체 인간의 죽음과 무덤의 진실이 무엇인지 산행이 거듭될수록 미지의 영역으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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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덤 뒤에 솟아 있는 암석. 용맥이나 전순 안의 바위는 여기(餘氣)라 하여 상서롭게 여긴다. |
시인·온세종교신문 발행인
출처 : 가평군향토문화연구회
글쓴이 : 화악산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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