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한마당

[스크랩] 아산시에는 해위(海葦) 윤보선(尹潽善·1897∼1990)

만년지기 우근 2007. 8. 7. 00:38
아산시에는 해위(海葦) 윤보선(尹潽善·1897∼1990) 제4대 대통령 묘소와 생가가 있다. 그의 집안 내력을 아는 사람들은 한 문중이 어떻게 몇 대에 걸쳐 그토록 번성할 수 있는지 부러워하며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인물사를 연구하는 학자들 간에도 연구 대상이다. 구한말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해위 친·인척처럼 출세를 많이 한 가문은 유례를 찾기 힘들다고 말한다. 인명사전에만 50여명이 올라 있다.

어찌하면 한 사람의 후손이 이렇게까지 고루 발복해서 잘살 수 있을까. 그 해답을 구하는 풍수가들에게 관심을 끄는 묘 자리가 바로 충남 아산시 음봉면 동천리 산록에 있다. 해평(海平)윤씨 문중 묘역 내 해위 고조할아버지 윤득실의 묘다.

조선 후기 공찬(恭贊) 벼슬을 지낸 윤득실(협판공)이 당파싸움에 염증을 느껴 아산으로 낙향해 살게 되었다. 그는 끼니조차 잇기 어려운 상황에서도 자식들에게 선행을 당부하며 죽었다. 아들 대에 와서는 가세가 더욱 기울어 집안 형편은 말이 아니었다. 득실의 3남 취동공(증조부)은 사십이 넘도록 자식이 없었다. 궁핍한 살림 속에서도 항상 죽을 쑤어 집 앞에 놓고 걸인들을 보살피는 등 남을 위해 적선했다.

어느 날 취동공이 둔포 장을 다녀오다가 노상에 쓰러져 기진맥진해 있는 스님을 발견했다. 오가는 길손 모두 그냥 지나쳤지만 집에 업고 와 극진히 보살폈다. 기력을 회복한 스님이 은공을 갚겠다면서 묘 자리를 하나 점지해 주었다. 곧바로 그 자리에 아버지 묘를 이장했다. 이후 뒤늦게 아들까지 낳고 아산의 해평윤씨 집안은 용광로에서 불이 활활 타오르듯 큰 복을 받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하는 일마다 성사되어 재물도 크게 모았고 자손들이 객지에 나가기만 하면 관직에 올랐다. 이 얘기는 설화가 아니고 충남의 내포지역(서해안을 낀 장항선 일대) 옛 어른들 사이엔 널리 알려진 얘기다.

◇해위 윤보선 대통령 묘. 비룡상천의 용맥으로 국립묘지를 마다한 채 이곳 선영에 와 영면에 들었다.


이런 자리다 보니 풍수학인들의 발길은 연중 끊일 날이 없다. 수원에 살고 있는 거봉 김혁규(한국풍수지리중앙회장) 선생을 만나 현장에 도착하니 이른 아침이다. 동짓날 팥죽 끓듯 변덕 심한 봄 날씨가 겨울보다 더 춥다. 평생을 지관으로 살아 왔다는 그에게 한담(閑談)을 청했다.

“사회적으로는 묘지난이 심각하고 국토를 잠식한다 하여 화장을 권하고 있는데 명당 찾아 묘 쓴다는 건 시대에 역행하는 것 아닐까요.”

“저 역시 매장을 권하는 사람은 아닙니다. ‘설풍수’한테 걸려 묘 잘못 쓰고 산화(山禍)를 당하느니 차라리 화장을 하는 편이 낫다는 주장입니다. 국토 면적의 상당 부분을 잠식하고 있는 무연고 묘나 풍수적으로 살격(殺格)인 분묘도 후손들을 위해 정비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옛날 명지관들이 좋은 자리 다 잡아 써서 ‘요즘 명당이 어디 있느냐’는 사람들도 있던데요.”

“옛 분들이라고 모두 땅속까지 들여다 본 건 아닙니다. 놓친 자리들도 얼마든지 많아요. 천장지비(天藏地秘)의 숨겨진 혈처를 찾아 보자고 간산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 기자는 유명 지관들과 전국을 누비고 있어 더 잘 아는 일일 텐데….”

◇해위 묘에서 바라본 여의주 봉. 용이 승천하려면 반드시 여의주를 무는 법인데 청룡 자락 건너편에 있다.


동구 안에 들어 서더니 “산은 멀리서부터 보고 가야 한다”며 지팡이를 들어 먼 산을 가리킨다. 말로만 들어오던 비룡상천(飛龍上天)형의 해위 묘 주봉 능선이다. 때마침 아침 안개가 산 중턱을 가로지르고 있어 상서로운 기운마저 감돈다. 후손들의 정성이 지극해 묘역을 정갈하게 가꿔 놓았다.

가장 궁금해 하던 협판공 묘를 찾았다. 일행 모두가 예의를 표하고 혈처를 살피니 뜻밖에도 좌측 사성(묘 양 옆을 감싸는 활개)이 아주 미약하다. 문중 발복의 근원지라고 할 수 있는 묘역을 왜 이리 조영했을까 싶어 물었다.

“이 묘의 좌측 사성을 거의 안 쌓은 건 수국(水局)사대법이 아니고는 설명할 수 없습니다. 간룡(艮龍) 입수에 계좌정향으로 거의 정남향이고, 수구는 갑득수(甲得水)에 미파구(未破口)로 완벽에 가까운 혈처입니다. 이 자리에서 좌측 사성을 높이면 갑득수 좌청룡(동쪽)이 막혀 버립니다. 재혈에 관통한 큰 스님이 수국법을 활용한 것입니다.”

조선 개국 초 한양 궁궐터를 잡은 무학대사는 계좌(정북에서 동으로 15도)정향(정남에서 서로 15도)이 아니면 묘를 쓰지 않았을 정도로 큰 자리를 쓸 때 주로 찾는 좌향임을 내 비친다. 마치 비법을 듣는다는 생각에 득파(得破)까지 명시해 달라하니 “계룡(癸龍) 입수에 갑득수 곤파(坤破)면 나머지 국세는 물어볼 것도 없이 묘를 쓰라”한다. 풍수에 문외한인 사람들에게야 우이독경일지 모르겠으나 동업 학인들에게는 비장의 한 수다.

◇동사택 구조로 화장실까지 완벽하게 배치된 생가. 이 부근은 근·현대사에 걸쳐 여러 인재를 배출해 낸 문중 집성촌이다.


앞의 안산 쪽을 보니 좌청룡과 이어진 바로 뒤에 ‘여의주 봉’이 있다. 용이 승천하려면 여의주를 무는 법이어서 반드시 여의주 봉이 받쳐 줘야만 비룡상천혈이 될 수 있다. 안개가 걷히고 나니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

협판공 묘 바로 위에는 해위가 부인 공덕귀 여사와 함께 안식에 든 혈처가 있다. 국립묘지를 마다하고 생전에 명풍수를 불러 잡은 자리라고 한다.

고조부묘보다 훨씬 넓은 묘역이나 인공으로 채워진 부토가 많다. 만두로 뭉친 결인목과 혈처와의 거리가 너무 가깝다는 아쉬움으로 용맥을 타고 오르니 우측 멀리에 희끗한 저수지 물이 보인다. 물길이 당판을 감싸 돌지 않고 설핏 넘겨다 본다하여 월견수(越見水)라 하는데 저 물을 좋게 보는 풍수는 없다. 나중에 생긴 저수지나 낚시터라면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만 비보로라도 막았으면 하는 생각이다.

일행 중에서 “할아버지 묘 위에 손자 묘가 있으면 역장(逆葬)이라서 못쓰는 것 아니냐”고 묻는다. 이를 의식했음인지 후손들이 세워 놓은 안내판에는 윤보선 대통령이 “할아버지가 손자를 무동 태우고 계신 모습이어서 보기에도 좋다 하며 생전에 준비해둔 자리”라고 기록돼 있다.

이 같은 장법은 문중 묘역을 조성하면서 자칫하면 친척간 불화로까지 번지는 일인데 그에 대한 예법은 이렇다. 순서가 바뀌었다 해서 도장(倒葬)이라고도 하는데, 수십 수백 년을 두고 조성된 문중 묘역에서는 얼마든지 실례를 찾을 수 있다.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왕손 묘역에도 도장 사례는 흔하며 흠잡을 일도 아니다. 후일에라도 ‘군왕지지’가 있다 하여 손자 묘 쓰고 후손들이 잘될 수만 있다면 더없이 좋은 일 아니겠는가.

◇생가 대문 옆의 해위 별장. 한때는 중앙 정치무대에 진출하려는 정객들이 밤낮없이 드나들던 곳이다.


해위는 어떤 집에서 태어났기에 영국 에든버러대학을 졸업하고 초대 서울시장, 상공부장관, 대한적십자사 총재, 국회의원을 지낸 뒤 대통령 자리까지 올랐는가. 그의 생가(아산시 둔포면 신항리 143)에 들어 가면서 거봉이 “곤(坤)득수 을진(乙辰)파구에 수국이 되어 생왕(生旺)이니 좌향은 임좌병향이어야 맞는다”고 한다. 실제로 좌향을 재보니 임좌병향이다. 수국 방향만으로 좌향을 예측해낸 것이다. 양택·음택 가릴 것 없이 길지 구성 요건에는 공통적인 자연이치가 적용된다는 설명이다.

생가는 1907년 해위 아버지(윤치소)가 지은 집으로 1984년 12월24일 중요민속자료 제196호로 지정됐다. 후손들이 살면서 자랑스럽게 지켜낼 줄 알았는데 문이 잠겨 있다. 이 마을 박종대(73) 경로당 회장의 안내로 안에 들어가 보니 파(巴)자형 구조로 전형적인 중부지방의 평면 구성 가옥이다.

동사택으로 남쪽 대문, 동남쪽 부엌, 진방에 화장실이 있으니 좋은 방위 조건을 모두 갖춘 양택지다. 여기에 우물은 포태법상 욕(浴) 방향에 자리하고 있어 가뭄에도 마를 일이 없는 융취수다. 해위는 이곳에서 10세까지 살다가 서울 종로구 안국동 8번지의 100칸짜리 저택으로 옮겨 성장하게 된다.

구중궁궐도 사람이 살지 않으면 폐허가 되는 법―. 풍우에 창문이 찢기고 부서져 있다. 인간의 부귀영화와 가문의 영고성쇠가 무엇이던가.

그 바로 옆은 제6대 서울대 총장과 학술원 회장을 지낸 윤일선 박사의 생가다. 해위와 사촌간이다. 해위 친·인척들은 구한말과 일제강점기를 살아오면서 ‘외국 유학 안 간 사람 없고 벼슬 안 한 사람 없다’할 정도로 부귀영화를 누렸다.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오음 윤두수(1533∼1601)가 해위 10대조며 큰할아버지가 구한말 군부·법무대신이었고 할아버지는 안성군수·육군참모장을 지냈다. 애국가를 작사했다고 전해지는 윤치호가 당숙이며 아버지는 중추원 의관을 역임했다. 이렇게 일제 치하에서 고루 누리며 잘살다보니 친일파 사슬과 무관할 수 없어 이들 중 일부가 친일행위자 명단에 들어 있어 곤욕을 치르고 있다. 이승만 정권 아래 내무장관, 서울시장을 역임하고 5·16 군사쿠데타 후 집권한 민주공화당에서 당의장을 지낸 윤치영씨는 삼촌이다.

해위는 대통령 자리를 내주고 대통령 선거에 두 번 출마했으나 고배를 마셨다. 군부독재 타도를 외치며 민주화 운동에 앞장서 구속됐을 당시는 숙질 간에 갈 길이 달랐던 때이다.

시인·온세종교신문 발행인
출처 : 가평군향토문화연구회
글쓴이 : 화악산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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