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한마당

[스크랩] 인촌김성수

만년지기 우근 2007. 8. 7. 00:45
수구초심(首丘初心). 여우도 수명이 다할 때면 자기가 살던 굴을 향해 머리를 둔다고 했다. 미물도 태어나 어미 품에서 젖 먹으며 함께 자라던 형제들을 잊을 수 없어서일 것이다.

하물며 만물의 영장인 인간은 어떠하랴. 평생 어머니를 못 잊어 회한으로 응어리지고, 고향 그리워 견디기 어려운 마음이 빈부귀천에 따라 나뉘겠는가. 할 수만 있다면 죽어서라도 형제들과 함께 묻혀 다시 그 품에 안기길 간절히 원할 뿐이다.

할아버지, 할머니 묘 밑에 부모가 있고 그 아래 아들, 손자와 친척까지 함께 있는 묘역을 볼 때마다 부러움이 앞서는 건 인지상정일 것이다. 거기에다 합장이나 쌍분으로 다정하게 모셔져 있으면 더욱 친근하여 큰 위안으로 다가옴은 얼핏 스쳐가는 감상만은 아닐 듯싶다.

전북 고창군 부안면 봉암리의 인촌(仁村) 김성수(金性洙·1891∼1955) 생가와 그 선조들의 묘를 간산하고 나면 그 같은 고정관념에 의구심이 깃든다. 혈육이라 하여 혈처가 아닌 곳에 올망졸망 모여 있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판단이 앞서기도 한다.

◇지기가 뭉쳐 솟구치는 생가 내의 융취수(우물). 인촌과 수당이 태어난 방 바로 아래에 있다.


호남의 거부로 현대사에 큰 족적을 남긴 인촌가(仁村家)는 발복지 생가로부터 호남의 제일가는 길지 명당만을 찾아 묘를 썼기로 유명하다. 풍수학계서는 인촌 문중처럼 풍수지리를 굳게 신봉한 집안도 없을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일명당일묘(一明堂一墓)’라 하여 정확한 재혈(裁穴)이 아니고서는 자칫하면 혈처를 비껴 갑니다. 그래서 제대로 명당에 모시려면 단장(單葬)으로 모시는 법입니다. 더구나 쌍분으로 용사할 경우는 두 분 중 한 분은 혈장에 모실 수가 없다는 이치지요. 인촌가는 9대조 합장 이후 다음 대부터는 단장으로 모셨습니다.”

거봉(巨峰) 김혁규(73·한국풍수지리중앙회장) 선생은 ‘오차 없는 재혈’부터 강조한다. 재혈이란 용맥을 타고 내려오다 지기가 머무른 지점인 당판에서 혈처를 정확히 찾아내 하관토록 하는 정교한 장법으로, 명지관을 가려내는 잣대가 되기도 한다. 사신사와 국세를 제대로 보았어도 재혈이 어긋나면 모든 게 헛수고가 돼 버리고 만다.

정음정양법(淨陰淨陽法)과 사대수국법(四大水局法)의 권위자로 정평난 거봉의 이번 간산길에는 심순희, 이상호, 신현웅씨 등 대를 잇는 제자 10여명이 동행했다. 이 중 심씨는 여성풍수로 학맥을 이어 후학들의 주목을 받고 있다. 거봉의 명성을 익히 알고 있는 터라 첫 대면이 마음 쓰였는데 안광은 날카롭지만 매우 따뜻하고 자상하다. 겨우내 푸근하던 날씨가 경칩(3월6일)인데도 기온이 급강하하고 눈보라까지 몰아쳐 노구가 염려스럽다.

거봉은 제자들과 함께하는 인촌가 간산길이 몇 번째인지 셀 수 없다고 했다. 호남명당을 제대로 학습하려면 이곳을 꼼꼼히 봐둬야 한다는 평소의 소신 때문이다. 미리 연락된 이기화(73) 고창문화원장과 김주운 사무국장, 김장천(74) 고창문인협회 부회장, 김정하 시인도 합류하여 일행은 20여명으로 늘어났다.

◇좌청룡이 허약해 일부러 지은 사랑채. 이날 고창에는 함박눈이 내렸다.


인촌 생가 안채의 좌향은 정좌계향으로 15도 기운 정북향이다. 북향집을 꺼린다는 상식이 무너져 버린다. 떡봉재(시루봉)를 주산으로 우백호의 노적봉이 감싸는 가운데 인촌마을은 좌청룡 쪽에 자리하고 있다. 거봉이 나경을 띄워 “대문은 감방(坎方·북쪽), 안방은 이방(離方·남쪽), 부엌은 손방(巽方·동남쪽)이니 동사택”이라며 양택삼요결에 의한 길한 방위배치라고 제자들에게 기록을 당부한다. 눈보라가 시야를 가려 안 보이지만 생가 앞 곰소만 바다 건넛산이 화형(火形)이어서 이 집에 불이 자주 났다는 풍수학적 풀이다.

생가는 한 담장 안에 두 집 살림을 할 수 있게 특이한 구조로 지어졌다. 생부 경중과 큰아버지인 양부 기중이 함께 살았고, 인촌과 동생 수당(秀堂) 김연수(1896∼1979)가 이곳에서 태어났다.

호남 인맥을 논함에 울산 김씨 인촌가는 단연 으뜸이다. 동아일보, 고려대, 경성방직을 창립하고 제2대 부통령을 지낸 인촌이 우리 현대사에 끼친 영향은 대단하다. 동생 수당은 삼양사를 설립해 실업가로 우뚝 섰다. 고 김상만 동아일보 회장이 인촌의 아들이고, 김상협 전 국무총리는 수당의 아들이다. 조선중기 유학자로 문묘(文廟)에 배향된 하서 김인후(1510∼1560)가 인촌의 13대조다.

생가 양택지가 음택지보다 발복이 빠른 이유는 살고 있는 후손들에 의해 그 감응이 확인되기 때문이다. 특히 수면과 휴식을 취하는 공간이어서 생기의 순환은 더욱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잠잘 때 무방비 상태의 외부 지기(地氣) 영향은 인성을 가름하는 데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전남 장성의 ‘여흥 민씨 할머니’ 묘. 호남 8대 명당 중 하나로 마치 거대한 가마솥을 엎어 놓은 듯한 대표적인 복부혈이다. 울산 김씨의 중시조가 된다.


생가의 용맥을 확인하기 위해 집 뒤 산으로 오르니 은맥(隱脈)으로 숨어 있어 쉽게 찾을 수는 없으나 작은 물길이 양 옆으로 나 있다. 조금 위로 올라가니 주룡이 뚜렷하게 드러나며 현무봉까지 이어진다. 인촌과 수당은 이 집의 작은 채에서 태어났다. 그 아래에는 우물이 있다. 우물은 융취수(融聚水)로 수맥과는 구분되며 기가 응결되는 곳이다. 사랑채는 좌청룡이 허(虛)하여 비보로 지은 것이라고 이기화 원장이 유래를 설명한다.

거봉이 몇 곳은 더 봐야 한다며 당도한 곳이 전남 장성군 북이면 명정마을의 ‘여흥 민씨 할머니’ 묘다. 하서 김인후의 5대 조모가 되는 여흥 민씨는 조선 3대 임금 태종의 사촌 처제로 왕권강화 일환으로 가문이 화를 당할 때 이곳으로 와 숨어 살면서 울산 김씨의 중시조가 된다.

당판에 올라서니 거대한 가마솥을 엎어 놓은 모양이다. 이곳이 그 유명한 복부혈(覆釜穴)이다. 민씨 부인은 자신이 죽으면 이곳에 묻으라고 위치까지 정해 주면서 “말 탄 사람들이 묘 앞 넓은 뜰을 가득 채울 것”이라고 예언했다 전한다. 그 예언은 그대로 적중했다. 이 혈처가 있어 인촌가의 부귀가 우연이 아니라면 누가 풍수의 동기감응(同氣感應)설을 부인하겠는가.

거봉은 인촌가의 선대 묘 모두가 호남일대의 명당 혈처를 점찍고 있어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고 탄복한다. 각 묘에 대한 유래와 전해 오는 근거도 확실해 이 지역 울산 김씨 명당만 돌아봐도 ‘山공부’의 깊이는 크게 진전된다고 동행한 제자들에게 일러 둔다.

◇여흥 민씨 묘비 앞에서 호남명당 유래를 설명하는 김혁규 선생(맨 왼쪽). 그 옆부터 심순희, 이상호, 신현웅씨로 아끼는 제자들이다.



▲전북 부안군 산내면 지서리 변산해수욕장 뒷산에 있는 비룡승천혈의 증조부(김명환) 묘 ▲순창군 상치면 시산리 보평마을의 증조모(전의 이씨·갈용음수혈) 묘 ▲고창군 아산면 선운사 뒤 도솔산 옛 백련암 자리의 조부(김요협·복치혈) 묘 ▲고창군 아산면 반암리 호암마을의 조모(영일 정씨·선인취와혈) 묘 모두가 말 그대로 천하길지 대명당이라는 데 풍수학계의 이론(異論)이 별로 없다. 순창군 복흥면 반월리 화개산의 9대조(김창하·순천 박씨) 묘만 합장으로 용사돼 있는데 이 또한 ‘삼천년향화지지’로 너무나 유명하다. 인촌 묘는 경기 남양주시에 있으며 첫 부인 고씨 묘(전남 장성군 백양사 백암산 정상)는 ‘군신봉조혈’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 묘들은 수십리에서 멀게는 수백리까지 떨어져 있어 산 사람의 정서로는 외롭게까지 느껴질 정도다. 명당을 찾아 멀고 가까움을 개의치 않고 ‘일명당일묘’를 고수한 것이다. 이런 까닭에 흩어진 묘를 일일이 살펴보느라 수일이 걸린 적도 있다고 한다. 묘 하나하나에 얽힌 일화와 혈처를 찾기 위해 쏟은 정성만을 얘기하려 해도 밤새는 줄 모를 것이란다.

거봉이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정음정양법은 주역을 관통해야 가능한 향법(向法)이다.

건(서북) 곤(서남) 감(북) 리(남) 진(동) 손(동남) 간(동북) 태(서) 팔괘의 삼효(三爻) 중 가운데 효를 빼고 나면 상·하의 효가 같은 건·곤·감·리는 정양이 되고 상·하의 효가 다른 진·손·간·태는 정음이 된다. 이 중 음양배합이 안 된 것은 흉이고 잘된 것은 길이다. ―은 양효(남자)이고 --은 음효(여자)다. 이 중에서 건괘와 리괘를 고양(孤陽·양끼리 상충), 곤괘와 감괘를 허음(虛陰·음끼리 상충)이라 하여 버리고 손·간괘는 왕양(旺陽·양상음하), 진·태괘는 상음(相陰·양하음상)이어서 취하는 것이다. 남자와 남자, 여자와 여자가 만나면 대립하고 남녀가 함께하면 합을 이룬다는 자연의 이치다.

예로부터 명당 혈처가 있다고 해서 아무나 임자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3대를 적선해야 ‘한 자리’를 얻고, 베풀었다 해도 재물이 있어야 그 자리를 차지한다고 했다.

고창읍성과 함께 복분자술로 유명한 이 고장은 판소리의 비조 동리 신재효와 명창 김소희의 고향이며 미당 서정주 시인이 태어나 잠들어 있는 곳이기도 하다. 선운사 동백꽃을 볼까 했으나 날도 저물고 꽃샘추위가 훼방을 놔 들르지 못하고 귀경길을 재촉했다.

시인·온세종교신문 발행인

 

세계일보 16일자 기사 눈길…"풍수지리 굳게 신봉, 일명당일묘 고수"

[미디어오늘 이수강 기자]

'호남 명문가 인촌 김성수 문중이 인촌 9대조 이후 대대로 부부 합장을 안 한 이유는?'

세계일보에 동아일보 창업주인 인촌 김성수 생가와 그 선조들의 묘를 풍수적 관점에서 조명한 글이 실려 눈길을 끌었다. 16일자에 실린 <이규원 객원전문기자의 대한민국 통맥풍수(21)-인촌 김성수 생가와 조상묘>가 그것이다. 기사는 <땅기운이 뭉쳐 솟구친 호남 제일가는 양택지(陽宅地)>를 큰제목으로, W13면 한 면 전체에 걸쳐 실렸다(광고없음).

▲ 세계일보 3월16일자 W13면.
이 기자에 따르면 "인촌가는 발복지 생가로부터 호남의 제일가는 길지 명당만을 찾아 묘를 썼기로 유명하다"며 "풍수학계서는 인촌 문중처럼 풍수지리를 굳게 신봉한 집안도 없을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이 기자와 함께 인촌 생가와 선조 묘들을 답사한 거봉 김혁규 한국풍수지리중앙회장은 " '일명당일묘(一明堂一墓)'라 하여 정확한 재혈(裁穴)이 아니고서는 자칫하면 혈처를 비껴 갑니다. 그래서 제대로 명당에 모시려면 단장(單葬)으로 모시는 법입니다. 더구나 쌍분으로 용사할 경우는 두 분 중 한 분은 혈장에 모실 수가 없다는 이치지요. 인촌가는 9대조 합장 이후 다음 대부터는 단장으로 모셨습니다"라고 말했다.

"△전북 부안군 산내면 지서리 변산해수욕장 뒷산에 있는 비룡승천혈의 증조부(김명환) 묘 △순창군 상치면 시산리 보평마을의 증조모(전의 이씨·갈용음수혈) 묘 △고창군 아산면 선운사 뒤 도솔산 옛 백련암 자리의 조부(김요협·복치혈) 묘 △고창군 아산면 반암리 호암마을의 조모(영일 정씨·선인취와혈) 묘 모두가 말 그대로 천하길지 대명당이라는 데 풍수학계의 이론이 별로 없다. 순창군 복흥면 반월리 화개산의 9대조(김창하·순천 박씨) 묘만 합장으로 용사돼 있는데 이 또한 '삼천년향화지지'로 너무나 유명하다. 인촌 묘는 경기 남양주시에 있으며 첫 부인 고씨 묘(전남 장성군 백양사 백암산 정상)는 '군신봉조혈'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 묘들은 "수십리에서 멀게는 수백리까지 떨어져 있어 산 사람의 정서로는 외롭게까지 느껴질 정도"이지만, "명당을 찾아 멀고 가까움을 개의치 않고 '일명당일묘'를 고수한 것"이라는 것이다.

기사에 따르면, 전북 고창의 인촌 생가 역시 '호남 제일의 양택지'로 손꼽히는 곳이다. "인촌 생가 안채의 좌향은 정좌계향으로 15도 기운 정북향이다. 북향집을 꺼린다는 상식이 무너져 버린다. 떡봉재(시루봉)를 주산으로 우백호의 노적봉이 감싸는 가운데 인촌마을은 좌청룡 쪽에 자리하고 있다."

세계일보 문화부장 출신인 이 기자(온세종교신문 발행인)는 지난해 9월부터 풍수 전문가들과 함께 전국 곳곳의 명당을 답사, 해설하는 '대한민국 통맥풍수'를 연재하고 있다.

그렇다면, 인촌 이후는 어떠할까. 인촌은 1955년 2월 타계 당시 고려대 구내 인촌동산에 안장됐다가 1987년 경기 남양주시 화도읍 금산리로 이장됐다. 동아일보의 여러 보도를 종합하면, 인촌의 아들인 일민 김상만 전 동아일보 사장 부부와 손자 김병관 전 명예회장의 부인인 안경희 여사도 '화도읍 선영'에 안장돼 있다. 가족과 부부의 묘를 함께 쓰지 않아온 8대에 걸친 '문중의 전통'이 깨진 셈이다. 이제는 '일명당일묘' 등 풍수지리 원칙을 따르지 않는 것인지, 아니면 화도읍 선영 일대가 모두 명당인지 궁금해지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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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강 기자, sugang@mediatoday.co.kr


 

출처 : 가평군향토문화연구회
글쓴이 : 화악산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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