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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1762∼1836년)은 75년을 살면

만년지기 우근 2007. 8. 7. 00:54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1762∼1836년)은 75년을 살면서 17년을 유배지에서 보냈다. 그는 누구보다도 고향을 못 잊어 했다. 자신이 태어난 고향집에서 눈을 감으며 “지사(地師)들에게 물어보지 말고 집 뒷동산에 매장하라”고 유언했다.

다산의 생가와 묘는 아래 위로 한곳에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집터와 묘 자리가 누구나 알아볼 수 있는 명당 터다.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산 75-1번지. 경기도 기념물 제7호로 지정돼 보존되고 있다. 강원도 춘천 쪽에서 흘러오는 북한강과 충북 충주 쪽에서 달려온 남한강이 합수(合水)되어 만나는 곳이 양수리(兩水里). 바로 그 아래 위치한 절경 중의 절경이다.

옛 어른들은 말씀하셨다. 따로 물어볼 것 없이 ▲배산임수(背山臨水·뒤에는 산이 받쳐 있고 앞에는 물이 있는 형국)되고 ▲전저후고(前低後高·앞은 낮고 뒤는 높은 지형)하여 ▲전착후관(前窄後寬·출입문은 좁고 뒤뜰 안이 넉넉한 구조)이면 명당 집터라고. 이곳 다산의 생가에 와 보면 문자를 써가며 풀어내는 양택(陽宅·집터) 풍수가 무색해진다. 그냥 바라만 보아도 현장학습이 되기 때문이다.

“보시는 대로 아주 좋은 집터입니다. 등 뒤에 기혈(氣穴)이 뭉친 산등성이가 있고 집 앞에는 도도히 흐르는 한강수가 에워싸 무엇 하나 나무랄 데가 없습니다. 자좌오향(子坐午向)이니 정남쪽을 바라보는 지형입니다.”





◇다산과 부인 풍산홍씨 합장 묘. 자좌오향으로 정남쪽을 바라보고 있다(왼쪽), 다산 묘 후면에서 바라본 한강수와 먼곳의 안산. 남한강과 북한강이 합수되는 양수리 바로 아래 지점으로 경관이 빼어나다. 집터와 묘터가 함께 있으면 원래 큰 자리로 형성된다.


윤갑원 교수는 몇 번을 이곳에 왔지만 다녀갈 때마다 탐나는 자리라고 말문을 연다. 이번 산행에는 민주당 사무총장을 지낸 조한천(趙漢天) 전 국회의원도 동행하여 꼼꼼히 챙겨 듣고 있다.

필자도 다산의 생가에 모두 다섯 번을 다녀왔다. 그럼에도 의문을 풀지 못했다. 이렇게 좋은 집터에서 태어난 다산이 한평생 겪은 우여곡절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75년의 생애 중 21세에 과거 급제하여 19년 동안 관직 생활을 하다가 40세 되는 해 유배를 시작해 17년 동안을 귀양살이한 다산이다.

고향인 생가에 돌아와서는 다시는 벼슬길에 나서지 않고 저술에만 전념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후세인들은 실학의 대가로 추앙하지만 17년간 타관 객지에서 가족과 떨어져 살아야 했던 심사는 어떠했겠는가.

윤 교수는 그런다.

“아버지가 진주목사였고 형님들도 벼슬을 했지만 당시 서학과 천주교를 접하면서 집안이 결딴나 버리고 맙니다. 집터가 명당이어서 좋은 곳에서 태어났다 해도 성장하면서 맞게 되는 운세 흐름이야 누군들 어쩌겠습니까. 그래서 양택 풍수에서는 환경을 중요시합니다.”

현재 복원된 생가는 ㄱ자를 맞물려 지은 ㅁ자 형태로 대문이 동쪽인 진(震) 방향에 있어 동사택에 속한다. 집터를 가리는 양택 풍수에서는 묘지를 고르는 음택 풍수와 방향에 대한 표기를 약간 달리한다.

북쪽은 감(坎·차남), 동북쪽은 간(艮·막내아들), 동쪽은 진(震·장남), 동남쪽은 손(巽·장녀), 남쪽은 이(離·차녀), 서남쪽은 곤(坤·어머니), 서쪽은 태(兌·막내딸), 서북쪽은 건(乾·아버지)으로 부르며, 각 좌향마다 가족들이 배속돼 있다. 흔히 동사택·서사택이라 부르는데 대문이 감·진·손·이 방향에 나 있으면 동사택이요, 건·곤·간·태 방향으로 있으면 서사택이라 이른다. 주역에 근거한 괘(卦)의 표기로 얼핏 생각하면 복잡한 것 같아도 의외로 간단한 이치다.

다산 생가의 경우 대문, 안방, 부엌의 배치가 모두 좋다. 다만 우측 담장에 낸 샛문이 기(氣)를 새게 하고 있어 마음에 걸리지만 복원하기 전의 집 구조는 그렇지 않았을 것이란 게 윤 교수의 말이다. 현재 사람이 살고 있지 않아 크게 마음 쓰이는 위치는 아니란다.





◇다산 생가와 묘. 이곳에서 태어나 성장했고 유배길에서 돌아와 만년을 유유자적한 곳이다. 묘터도 자신이 택하여 그가 뛰놀던 뒷동산에 묻혔다.


“아무래도 안방 자리를 우측으로 몇m 옮겨야 할 것 같은데…” 하고 주위를 탐색하던 일행이 4m쯤 옆에서 ‘여유당(與猶堂)’이란 표석을 찾아냈다. 1974년 10월 다산의 후손인 정일권 당시 국회의원(전 국무총리)이 원래 집터를 찾아 써놓은 당호(堂號·사는 집에 지어 부르는 이름)이다. 무심코 지나치기 쉬운 자리다.

보릿고개는 태항산처럼 높고 험한데/ 단오 지나야 가을이 시작되네/ 그 누가 이 풋보리죽 사발을 들고 가서/ 대감나리께도 맛보라 나눠 줄까.

1801년 다산은 현재의 포항 장기로 첫 유배를 떠나면서 백성들의 배고픔을 외면하는 썩은 관리들을 질타했다. 이로부터 시작되는 유배 생활과 고향에 돌아와서의 유유자적한 세월이 없었다면 그의 508권 저서와 만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남의 고통이 후학들의 사표로 남는 역사의 아이러니를 누가 한탄치 않으랴.

생가 뒤의 동산에 오르니 바로 다산의 묘다. 부인 풍산홍씨와 170년 세월을 함께 누워 있다. 여우도 죽을 때는 태어난 굴 쪽에 머리를 두고 죽는다 했는데 어릴 때 뛰놀던 뒷동산에 묻혔으니 영혼이라도 편안할 듯싶다. 바로 앞의 유장(悠長)한 한강수와 건너편의 안산이 참으로 따뜻하게 반긴다.

“생가와 함께 자좌오향입니다. 인갑용(寅甲龍·동쪽에서 북쪽으로 30도 기운 방향) 입수에 子(북쪽)입수(入首) 자좌로 정중히 모셔졌습니다. 재혈(裁穴·하관할 때 정확한 혈처를 찾는 작업)을 제대로 했어요.”

주위 산세를 상세히 살피니 동산 자체가 커다란 왕릉 같은 형태를 이루고 있다. 결인(結咽·사람의 목처럼 잘록하게 내려온 용맥)이 확실하고 당판이 봉긋하여 그야말로 산소 자리 하나를 신기하게 조성해 놓았다. 마치 농익은 석류를 거꾸로 놓은 듯하다. 자연조화의 오묘함과 그 자리를 택한 다산의 혜안이 그저 놀라울 뿐이다.

다산의 가계(家系)는 당시 서학으로 간주되던 천주교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운명적 관계를 이룬다. 그의 집안에서 오늘날 한국 천주교회의 뿌리가 태동되었기 때문이다.

다산의 아버지 정재원은 경주이씨와 초혼하여 약현을 낳고 둘째부인 해남윤씨와 사이에서 약전, 약종, 약용 3형제를 낳는다. 한국천주교의 창설자며 최초 영세자인 이승훈(1756∼1801·세례명 베드로)이 다산의 매형이다. 이 밖에 한국천주교 초기사를 장식하는 황사영, 홍재영, 이벽, 정철상 등이 사위, 조카 등의 촌수로 연결된다.

아침부터 비가 올 듯하던 날씨가 오후되어 맑아진다. 일행들이 반기니 “내가 오늘은 흐리기만 하고 비는 안 온다고 했잖아요” 한다. 천기(天氣·날씨) 보는 비법을 공개하라고 일행들이 조르자 윤 교수가 설명한다.





◇생가 중심지였던 여유당 자리. 후손인 정일권 전 국무총리의 친필이다(왼쪽), 다산 동상. 바로 뒤에 사당이 있다.


오행(五行) 가운데 목은 바람, 화는 열기, 토는 습기, 금은 건조, 수는 추위(비)에 속한다. 일진(日辰·날짜마다 배당된 육십갑자)의 천간(天干·갑을병정무기경신임계) 가운데 갑과 기가 들어간 날은 습기가 있어 눅눅하고, 을과 경일은 건조하며, 병과 신이 끼어 있으면 흐리거나 비 오고, 정과 임일은 바람이 불고, 무와 계일은 더워진다는 것이다. 구태여 적중률을 따질 필요는 없지만 결혼일이나 이사 가는 날의 택일법으로 은밀히 사용된단다. 천기 본다는 게 뭔가 했더니 바로 이거로구나 싶다.

갑(목)과 기(토)가 만나면 토가 되고, 을(목)과 경(금)이 합하면 금이 되며, 병(화)과 신(금)이 더해져 수로 변하고, 정(화)과 임(수)이 하나 되니 목이 되고, 무(토)와 계(수)가 포개져 화가 되는 음향오행의 조화에서 근거한 것이다. 극(剋)과 극끼리 만나 합을 이루는 천지이치의 신묘함이다.

다산 묘를 내려오며 우측 방향으로 잘록한 위치에 고총(오래된 무덤)이 하나 눈에 띈다. 이른바 장풍득수지(藏風得水地)다. 사람의 양쪽 허벅지처럼 생긴 지형에 움푹 파인 곳을 말한다. 지금까지 대다수가 장풍득수(바람을 품고 물을 얻는 것)하는 곳을 명당길지로 알아 왔는데 옥룡자통맥법에서는 양택(집터)지로만 판단하고 있다고 윤 교수가 덧붙인다.

원래 큰 자리는 양택과 음택이 동시에 형성되며 그런 곳이 최상의 길지라 했다.

조선시대 선비들에게 풍수와 역학 등은 기본적으로 알고 있어야 하는 덕목이었다. 일부에서는 다산이 풍수를 기피했다는 주장도 있다. 정치 경제 문학 철학 의학 조선학 자연과학 등에 통달했던 대학자가 풍수만 몰랐을 리 없다는 학계의 주장도 설득력 있게 받아 들여지고 있다.

다산의 형인 약전과 약종도 이곳에서 태어나 성장한 후 천주교와 연루되어 옥사하고 귀양을 갔다. 그들도 함께 나물 캐고 뛰어놀던 잊지 못할 뒷동산인데 지금은 다산만이 묻혀 있다. 죽은 뒤에도 고향 곁에 묻히려는 애틋한 마음은 아마도 인간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 아닐는지….

1표 2서(경세유표 목민심서 흠흠신서)로 대표되는 저서와 2만500여수의 시를 남긴 다산. 백성을 돌보지 않는 무능한 관리들을 꾸짖던 그가 한강 상류에서 서울을 지켜보고 있다.

시인·온세종교신문 발행인

출처 : 가평군향토문화연구회
글쓴이 : 화악산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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