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해방의 기쁨같은 절절함을 느끼지 못한 세대이지만 , 길거리마다 나부끼는 하얀 태극기를 보노라니 그래도 가슴에 뭔가 뭉클함이 느껴지는 날이다
일제에 맞서 싸웠던 자랑스런 우리선조들이 있었기에 오늘의 우리가 있지 않나 하는 생각과 함께 오늘같은 날 꼭 기억해야할 또다른 분들이 있어 자료를
정리해 본다..그들은 다름아닌 제주의 해녀들이다..
전국 최대규모의 최초 여성집단의 항일운동 이자 어민 운동을 벌였던 자랑스런 사람들...'좀녀'라 불리는
제주해녀들이 바로 그 주인공들이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의 수탈에 대항해서 제주 해녀 수천명이 비창(전복을 채취할 때에 사용하는 쇠갈고리)을 들고 일어서서
싸웠다. 서기1932년의 투쟁으로 약 3개월에 걸쳐 연인원 17,000여명이 궐기한, 여성 어민 항쟁으로는, 아니 여성의
권리 쟁취투쟁으로는 전국 최대 규모였다.
좀녀들은,1932년 일제의 해산물 착취와 상권 독점 등 수탈이 극심해지자 우도를 비롯한 세화·구좌·성산 등의 해녀들이 떨쳐 일어나 주재소(현 파출소)를
습격하는 등 거세게 항거했다. 이 해녀항쟁은 전국 최대규모의 유례 없는 최초의 여성 집단의 항일 운동이자 어민 운동으로 기록되고 있다.
***대일 항쟁 발발원인. ***
계속되는 일제의 수탈에 맞서 농민들은 농민회를, 잠녀들은 해녀회를 조직하였다. 해녀회는 성산면과 구좌면 일대에서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는데,
특히 구좌읍의 하도리·종달리·연평리·세화리 지역에서 가장 적극적인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런 와중에 1931년 하도리에서 해산물 판매과정 중에, 해산물을 헐값에
사들이려는 왜인(倭人)이 지정한 지정상인, 고평호의 횡포가 극심하였다. 이에 분개한 해녀들은 강력히 항의하고 조합에 시정을 요구하지만 조합에서는 변명만
늘어놓으며 약속을 이행하지 않았다.
잠녀들의 권익옹호를 위해 생긴 제주도 해녀어업조합에서도 왜인(倭人)들과 결탁해 수탈행위를 공공연히 자행하였다. 해녀어업조합에서는 바다에 다니는
노약자를 포함한 모든 여성들에게 조합에 가입하게 하고, 가입비와 조합비를 강제로 내게 했으며 이들 모두에게 입어수수료, 판매수수료, 기타 주재원수당 등을
징수했다. 또 육지출가 해녀에게는 노약자들도 출가수수료를 납부해야 육지 출가를 허용하였다. 해산물의 판매도 왜인(倭人) 독점상인에 한해서 판매가 허용되었으며,
해녀조합에 구전(口錢)을 많이 낼수록 해산물 대금은 낮게 결정해버리는 불합리한 처사가 자행되었다.
해를 거듭해 계속되는 이런 수탈행위로 인해, 도민들의 궁핍한 생활은 계속되었고, 인간으로서의 존엄성과 생존권이 무참히 밟히면서,
이에 대한 저항운동이 일어났는데, 1931∼1932년에 일어난 제주잠녀항쟁이 그것이다.
*** 세물(稅物)에 시달리는 잠녀들. ***
제주 잠녀들에 대한 수탈과 월권행위의 자행은 어제오늘에 비롯된 것이 아니다. 고려 시대부터 조선에 이르기까지 잠녀들은 전복, 소라, 진주, 귤 등을
세물(稅物)이라는 이름으로 수탈 당해왔다. 외부로부터 시달림을 겪으며 살아오던 제주 잠녀들은 또 일제로부터의 수탈이 이어졌다. 19세기말
병자수호조약(강화도조약)이 맺어지면서 왜국(倭國)의 잠수기선의 횡포가 극렬해졌다.
이 조약은 조선과 왜국의 어선이 서로 상대국 연안에서 조업 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조선은 왜국이 약정한 어장에서 조업한다는 게 사실상 불가능했다.
왜국에서는 잠수기선을 이용해 우리나라에서 조업했는데, 왜국 어선이 무려 137 척이나 몰려올 때도 있었다. 또 해산물 채취 금지기간에도 어로활동을 벌이면서
갖은 행패를 일삼았다.
그로 인해 제주 잠녀들의 생계는 위협받게 되었다. 일제의 횡포는 바다에서 그치지 않고 제주본토와 가파도 등지에서 가축 약탈, 살인 등을 일삼기도 했다.
1930년에 들어서면서 일제는 대륙침략의 병참기지로서의 후방안전을 위하여 제주도를 완전히 '군사기지화'하고 그 시설을 확장하면서, 또 제주도 마을을
대상으로 한 경제수탈이 이어지게 되었다.
***제주 잠녀항쟁****
사건의 발단을 살펴보면, 우리 해녀가 어렵게 따낸 해산물을 강탈하다시피 헐값에 사 가는 데 대하여 해녀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서기1920년 김태호 등이 중심이
사건의 발단을 살펴보면, 우리 해녀가 어렵게 따낸 해산물을 강탈하다시피 헐값에 사 가는 데 대하여 해녀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서기1920년 김태호 등이 중심이
되어 도사(島司, 近藤晋二郞)를 설득하여 '해녀조합'을 만들었다. 그리고 전라남도 해각(亥角, 일본인 이름)도지사에게 지원을 요청하여 우여곡절 끝에
경상남도지사와 출가 해녀들의 권익에 대하여 각서를 교환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처음에는 해녀들의 권익을 위한 일을 좀 했으나 나중에는 일제의 앞잡이가
되었다. 해녀조합의 조합장을 일본인 도사(島司)가 겸임했기 때문이었다.
수탈 상황을 보면 입어료(入漁料), 지정판매제, 해조회사에 수수료, 조합에 수수료, 조합비, 뱃사람 임금, 소개인 사례비 등등으로 다 떼이고 나면 생산자인 잠녀의 몫은
2할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서기1930년에는 성산포에서 우뭇가사리를 조합서기가 입찰가격보다 헐값으로 가로채려다 발각되었으며, 서기1931년에는 소라와 전복
수매 과정에서 저울눈을 속이다 적발되었는데, 그 후에도 해녀조합이 지정한 상인은 지정 가격보다 낮은 가격으로 팔라고 강요하였다. 이에 대하여 매수 가격을
재평가하고 지정가격을 엄수할 것을 요구하면서 들고 일어서자 조합은 그렇게 하기로 약속해 놓고 수매 시일만 늦추어 버리는 바람에 감태 전복 등이 썩어 버리고 말았다
.이에 해녀들은 서기1932년 1월 시정을 요구하는 진정서를 도사에게 전달했는데 , 도사에게서 아무런 반응이 없자 서기1932년 1월 7일 세화장터에 모인
세화·하도·종달·우도·시흥·오조 마을 해녀 300여 명이 호미와 빗창을 들고 모여 제주읍에 있는 조합사무실로 진군했다
이에 당황한 경관들과 면장이 5일 후 시찰차 이 곳을 지나가는 도사(島司)를 만나게 해 주겠다고 약속하므로 제주시로 가던 길을 중단했다. 그러나 조합은
해녀들이 가장 불만으로 여기는 패류에 대해 지정판매를 1월12일에 강행하는 공고를 내었다. 1월 12일 신임 도사(전구정희 - 田口楨憙, 일본인 이름)가 초도순시차
도 일주를 한다는 소식을 듣고 구좌면과 성산면에서 온 해녀복을 입은 천여 명의 해녀들이 세화리와 하도리 사이에 모여 있었다. 마침내 도사가 세화리로 들어서자
잠녀들은 눈깜짝할 사이에 그를 에워쌌다. 경관들이 칼과 발길질로 해산을 시도했지만 꿈쩍하지 않았다.
"우리들의 진정서에 아무런 회답이 없는 것은 무슨 까닭이냐?" "우리를 착취하는 일본 상인들을 몰아내라." "해녀조합은 해녀의 권익을 옹호하라."등의 구호를
외치고, "우리들의 진정한 요구에 칼로 대응한다면 우리는 죽음으로 대응하겠다."고 하면서 빗창을 휘두르자 도사는 사색이 되어 해산해 달라고 하면서 요구조건을
최대한 들어 주겠다고 약속을 하고 세화주재소로 피신하였다. 일제의 수탈을 더 이상 참지 못한 해녀들은 자신들의 생존권과 권익을 되찾기 위해 봉기하기로 결정한다.
제주잠녀항쟁은 부춘화(당시 25세), 김옥련(당시 23세), 부덕량(당시 22세)을 해녀 대표로 하여, 민혁동맹소속 오문규, 김순종, 김시곤, 문도배, 김성오, 강관순, 신재홍,
한영택, 한원택, 한향택, 고사만, 채재오 등의 도움으로 준비되었다.
우선 그들은 1931년 6월부터 일제의 수탈성 사건의 진상, 일제의 침략성과 불법적인 탄압을 규탄하는 격문을 전도에 살포하여 도민들의 반일 역량을 결집하였다.
리(里)·면(面)·도(島)에 '해녀투쟁'의 통일적 지도 기관을 창설하고, 가장 정당한 요구 조건과 가장 알맞은 투쟁 방침을 수립하는 등 투쟁체제(鬪爭體制)를 정비하였다.
이렇듯 철저히 준비한 하도리 해녀들은 1931년 12월 20일 투쟁을 개시한다. 이날 하도리 해녀들은 경찰의 방해를 염려해 바닷길로 제주읍 조합사무실로 향하지만 거센
파도에 막혀 되돌아왔다. 다음해인 1932년 1월 7일 세화장날이었다. 이날 해녀들은 투쟁을 위해 다시 일어서게 되는데, 손에는 빗창-전복 따는 쇠갈고리을 들고,
머리에는수경-물안경을 끼고 육로로 당당히 제주읍으로 향했다. 해녀 대표들을 선두로 300 여명의 해녀들이 세화리에 들어서자, 시장에 모여있던 사람들이 여기에
합세하였고 그 수효는 수천에 달하게 되었다.
이 거대한 인원들은 면사무소로 향하였는데, 당시 해녀조합장직은 면장이 겸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면사무소에 도착한 부춘화, 김옥련, 부덕량 등의 해녀 대표들은
그들의 요구조건을 면장에게 제시하나 자신의 권한 밖의 일이라며 12일날 도사가 오면 해결해 주겠다는 약속을 받고 해산하였다.
약속한 1월 12일. 이날 세화장터에는 종달리·오조리 해녀 300여명과 하도리 해녀 300여명, 세화리 해녀 40여명 등 700여명에 달했다. 그런데다 오일장에 모인 주민들까지
합세하여 엄청난 군중이 도사가 있는 제주읍으로 향하게 되었다.그때 마침 해녀들은 차를 타고 순시를 하던 도사를 발견하고, 도사의 차를 포위하자 도사가 도망치려
하였다. 그러나 해녀들에게 완전히 포위되어 꼼짝할 수 없게 되자 도사는 해녀대표와의 면담을 제안하였다.
해녀대표와 도사의 면담이 진행되는 동안 밖에서는 일본경찰들이 해녀들을 무력 해산시키려고 하였다. 해녀들이 강경하게 맞서자 일경들도 어찌할 수 없었다.
면담 결과 도사는 그들의 요구를 수용하겠다고 확답을 하였으나 당국에서는 해녀들의 요구사항에 관심도 없었고, 위협을 느낀 도사는 광주에 지원 경찰을 요청하고,.
그 후 문제의 핵심이 다른 방향으로 돌리면서, 좌경분자들의 대대적인 검거를 시행하였다. 이유는 잠녀항쟁의 배우가 좌경분자들로 조직된 이른바 민중운동협의회로,
이들이 해녀들을 부추겼다는 것이었다.
1932년 1월 23일 경찰은 세화리의 문도배, 문도후, 종달리의 한향택, 한원택, 연평리의 신재홍 등 수십 명의 사람들을 검거한다. 1932년 1월 24일 경찰의 연행을
저지하기 위해 400 - 500 여명에 이르는 해녀와 주민들이 나서 경찰들과 몸싸움을 벌였다. 그 과정에서 50여명이 다시 검거되는데, 여기에 해녀가 34명이나
포함되었다. 해녀 대표인 부춘화(25세), 김옥련(23세), 부덕량(22세)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런 충돌은 우도, 종달리 등지에서 다발적으로 일어나게 되는데,1932년
1월 27일이 지나며 잠녀항쟁은 진정국면으로 들어섰다. 검거 후 일반 해녀들은 금방 풀려나지만, 부춘화, 김옥련, 부덕량은 배후 세력을 밝히려는 경찰에 의해 모진
고문을 받았다. 고문 후 이들에게서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한 당국은 해녀들의 요구조건을 적어내라고 하고는 이들을 풀어주었다. 이 때 검거되었던 사람들 중 형량이
확정된 사람들은, 하도리의 오문규과 김순종, 세화리의 김시곤과 문도배, 연평리의 김성오, 강관순, 신재홍, 종달리의 한원택, 한향택, 고사만, 채재오 등이다.
***뭍에는 유관순, 우도엔 강관순 ****
우도 포구에는 "우도해녀항일운동기념비(牛島海女抗日運動記念碑)"가 서 있다. 비몸의 아래 바침돌에는 당시 우도 해녀들이 불렀던 강관순(康寬順)이 지은
우도 포구에는 "우도해녀항일운동기념비(牛島海女抗日運動記念碑)"가 서 있다. 비몸의 아래 바침돌에는 당시 우도 해녀들이 불렀던 강관순(康寬順)이 지은
눈물겨운 내용의 <海女의 노래>가 새겨져 있다. 강관순은 우도 출신으로 이름 글자와는 달리 남자였다.
제주농업학교를 졸업하고 제주시에서 언론활동을 하다가, 다시 우도에 들어와 서당 훈장노릇을 하였다. 우도에 야학이 설치되자 야학에서 해녀들을 가르치면서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 해녀항쟁당시에 주역들을 이끌다가 체포되어, 2년 6개월 형을 받고, 목포 감옥에서 대구 감옥으로 이감되어 형을 치르면서, 이 노래를
작사하였다. 감옥에서 이 노래가사를 작사한후 밖으로 내 보내야 할 기회를 찾다가, 마침 친구의 처가 면회 온 틈을 타서, 종이에 잔글씨로 써, 담배꽁초처럼 돌돌
말아, 간수의 눈을 피해 전달 할수 있었다.
이렇게 하여 감옥 밖으로 이 눈물겨운 내용의 가사가 전달되어 나오게 된 것이다. 당시에는 해녀들뿐만 아니라 누구든지 이 노래를 부를 줄 알았다고 한다.
지금도 노인들은 이 노래를 부를 줄 안다고 한다. 강관순은 출옥하여 왜경의 감시를 피할수 없어 북간도로 이주하는 도중 함경남도 청진에서 아까운 35세의
나이에 생을 마감 하였다. 후손으로는 무남독녀 외딸 강길녀(현 65세, 우도면 오봉리거주) 여사가 현재 우도에 생존하고 있다. 강관순의 철저한 민족혼 고취
활동은 아래 에 적혀있는 비문의 후단에 적혀있다. 가사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사진 2005년 8월 15일 구좌읍 세화리에 세워진 노래비.)
◆ 해녀의 노래
고 강관순 지음
1. 우리들은 제주도의 가엾은 해녀들
비참한 살림살이 세상이 안다
추은날 무더운날 비가오는 날에도
저바다 물결위에 시달리는 몸
비참한 살림살이 세상이 안다
추은날 무더운날 비가오는 날에도
저바다 물결위에 시달리는 몸
2. 아침일찍 집을 떠나 황혼되면 돌아와
어린아이 젖먹이며 저녁밥 짓는다
하루종일 해봤으나 버는 것은 기 막혀
살자하니 한숨으로 잠못이룬다
어린아이 젖먹이며 저녁밥 짓는다
하루종일 해봤으나 버는 것은 기 막혀
살자하니 한숨으로 잠못이룬다
3. 이른봄 고향산천 부모형제 이별하고
온가족 생명줄을 등에다 지어
파도세고 무서운 저 바다를 건너서
기울산 대마도로 돈벌이 간다
온가족 생명줄을 등에다 지어
파도세고 무서운 저 바다를 건너서
기울산 대마도로 돈벌이 간다
4. 배움 없는 우리 해녀 가는곳마다
저놈들의 착취기관 설치해 놓고
우리들의 피와 땀을 착취하도다
가엾은 우리해녀 어디로 갈가
저놈들의 착취기관 설치해 놓고
우리들의 피와 땀을 착취하도다
가엾은 우리해녀 어디로 갈가
*** 우도해녀항일운동기념비.***
우도 해녀 항쟁비는 우도 포구에 도착하여 가까운 천진리 광장에 서있다. 앞면의 비석 제목은 <우도해녀 항일운동기념비>라 한문으로 새겨져 있고, 비 바침돌에
해녀의 노래가 새겨져 있다 우도 길목에 세워진 해녀상과 항일투쟁 기념비는 우도면민은 물론 우도를 찾는 많은 사람들에게 거친 파도와 싸우며 강인하게 살아온 우도
잠녀들의 항일투쟁 정신을 일깨워 주는 역사적인 산물이다.해녀항일투쟁기념비에는 우도 해녀들의 정신적 지주였던 이 마을 출신 강관순이 지었다는 '해녀의 노래'가
기록돼 당시 해녀들의 삶을 반추하게 해준다.
*** 본섬에도 기념탑 건립.***
이 투쟁은 일시적인 생존권 투쟁이 아니라 민족교육을 실시했던 야학교사인 강관순, 오문규·김순종 선생 밑에서 지도를 받은 해녀들이 중심이 되어 확고한 신념을
갖고 지속적으로 주도해 갔던 것이라고 당시 하도리소녀회 회장으로서 항쟁을 직접 지도했던 김옥련 할머니(2005년 현재 85세, 부산 거주)는 증언하였다.
또한 김 할머니는 '당시 이사건으로 체포된 후 만취한 일본 경찰로부터 물고문·무릎누르기 등 숱한 고문 조사를 받았다'며, '전복을 따기 위해 숨을 멈추고 물질하는
것과 같이 조금만 참으면 모든 것을 극복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어려움을 이겨냈다'고 말했다. 2005년 8월 15일에는 이와 같은 항쟁의 내용을 간략히 적은 기념비와
강관순의 <해녀의노래> 노래비가 제주도 본섬인 구좌읍 세화리와 상도리 하도리 경계지점에 세워졌으며,해녀들의 삶을 한눈에 볼수 있는 박물관이 세워졌고,
우도포구에도 기념비를 세웠다.
**** 뒤늦은 독립 유공자 포상.****
잠녀항쟁의 결과, 해녀들은 공동판매제도와 특정상인 지정을 폐지, 육지 출가문제 등 일부 문제만이 해결되었다. 항쟁의 결과가 크지는 않았지만 제주잠녀항쟁은 반일(反日) 반제(反帝)의 항일운동이었고, 제주 해녀들의 저력을 보여준 생존권 투쟁을 보여줬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 받아야할 사건이다. 정부에서는 늦게나마 강관순 김옥련 등 11명에 대하여 2005년부터 국가 보훈처에서 독립유공자 포상을 마치고 생존한 후손에게 다소 얼마나마, 지급되었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의 수탈에 대항해서 제주 해녀 수천명이 비창(전복을 채취할 때에 사용하는 쇠갈고리)을들고 일어서서 싸웠다. 서기1932년의 투쟁으로 약 3개월에 걸쳐 연인원 17,000여명이 궐기한, 여성 어민 항쟁으로는, 아니 여성의 권리 쟁취 투쟁으로는 전국 최대 규모였다.
해녀들이 항일투쟁에 앞장섰던 사실이 제주출생인 나로선 특별히 남다르게 다가온다.해녀란 물질해서 삶을 연명하던 척박한 삶의 느낌때문에 안좋은 선입견만 있었는데 이번에 새로이 알게된 사실로 새롭게 다가온다. 그런 해녀들의 후손임이 왠지 자랑스럽다..
(사진/ 제주 해녀박물관에서...)
출처 : 비바리의 숨비소리
글쓴이 : 비바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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