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한마당

[스크랩] 용인 지곡리 음애 이자 고택을 둘러보다.

만년지기 우근 2007. 10. 1. 13:16

 

용인 지곡리에 있는 이자 고택은 조선 종종 때의 명현인 이자(1480 ~ 1533)선생이 살던 곳이라 전해지는 고택이다. 이자선생의 생몰연대를 보면 500년 가까이 된 고택이다. 원래 사랑채와 안채가 연결된 ㄷ자형 본채 앞쪽으로 ㅡ자형의 행랑채가 있어 튼 ㅁ자 형식의 배치를 이루었던 것으로 보이나, 행랑채는 소실되었고 현재 본채만 남아 있다. 큰 사대부가에서는 별도로 사당이 있지만 그다지 규모가 크지 않은 이집에는 사당이 따로 지어지지 않고, 본채 북서쪽에 청방이 있어 제사공간으로 사용되었다. 다른 곳에는 아무 칠이 없는데 비해 이곳에만 단색으로 간단히 채색된 가칠단청이 베풀어져 있다.


본채는 서까래를 받치는 부재의 단면이 사가형으로 되어 있는 민도리집인데, 사랑채는 팔작지붕이고 맞은 편 나뭇간은 맞배지붕으로 좌우 날개채의 지붕형태가 다르다. 이 집은 사랑채와 안채가 하나의 건물로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내외가 사용하는 공간이 구분 되어 있는 전형적인 조선시대 경기지역의 중류주택이다.

 

 

음애 이자선생은 16세기 전반, 성리학의 이상을 조선사회에 실현하려는 사림파의 전형적인 인물로서 조광조와 함께 개혁정치를 주도한 기묘사림의 핵심 그룹 가운데 한 사람이다. 이자선생이 남긴 『음애집(陰崖集)』은 조선 연산군 때 부제학을 지낸 이자선생의 시문집으로 4권 2책의 목판본이다. 후손 도흥 및 족손(族孫) 이장이 수집·편찬하여, 1954년(영조 30)에 간행했다. 권두에는 김재로의 서문이 있으며, 권1과 2는 시 178수, 부(賦) 2편, 책(策) 1편, 소(疏) 5편, 서계(書契) 1편, 서(書) 4편, 기(記) 3편, 발(跋) 2편, 잠(箴) 1편, 상량문 2편, 비문 1편으로 되어있다. 권3은 잡저 6편, 권4는 부록으로 행장·묘갈음기·기·상량문·소·제문 각 1편, 축문 2편, 언행척록(言行摭錄) 1편, 시 9수, 연보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음애집의 대표적인 작품을 살펴보면 일록(日錄)은 1509~15년에 홍문관·사간원 등의 관리로 일하면서 당시 천재지변, 시정의 득실, 인물의 현부 등 그때에 있었던 일이나 체험, 느꼈던 일들을 기록한 일기다. 예조답대마도주(禮曹答對馬島主)는 1510년 왜구들이 자주 침입하여 변방을 지키던 장수를 죽이고, 해안을 침략하여 백성을 괴롭힌 일 등의 만행을 지적하여 그 책임을 묻는 내용으로, 대마도주가 예조에 서계를 보내온 데 대한 답서이다. 또 보상책(輔相策)은 현명한 재상이 있어야 그 나라가 편안하고 백성이 안정된다는 뜻을 밝히고, 나라에 어진 보상이 없어 나라의 형편이 점차 어지러워짐을 개탄한 내용으로 이자의 우국충정을 알 수 있는 대표적인 글이다.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용인 신갈 한국민속촌 입구에서 용인으로 넘어가는 새로 난 길이 있다. 이 길로 가면 우측에 지곡리라는 이정표가 보인다. 안으로 길을 잡으면 잘 지어진 전원주택들이 늘어서 있다. 이자고택은 용인시 기흥읍 지곡리 297-2 번지이며 경기도 민속자료 제10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음애 고택을 들어서면 제일 먼저 눈에 띠는 것은 문학비이다. 자연석을 세워 그곳에 음애선생의 글을 적어 놓았다. 집 안으로 들어가니 그 동안 몇 번의 중수를 거쳤겠으나, 단아한 모습을 보아 조선조 학자가 묵던 곳임을 알 수 있다. 집의 단조로움을 보아도 음애 이자선생의 면면을 알 수 있다.

 

 

안마당으로 들어가니 우물이 있다. 우물은 근자에 들어서 만든 것인지, 아니면 오래전부터 전해진 것인지 구별이 가질 않는다. 우물에 이물질이 들어가지 않게 덮어놓은 것으로 보아, 우물을 사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마당 가득 심겨진 콩은 또 다른 정취를 느끼게 해준다. 잡풀만이 우거진 마당보다는 한결 보기가 좋다. 다만 눈에 거슬리는 것이 있다면 마당 한편에 세워진 임시화장실이다. 집안을 살펴보니 기념물로 지정이 되었다고 하는데, 영 관리가 하나도 되어있지 않은 것 같다. 그리고 최근까지 우가 이곳에서 생활을 했던 것 같은데, 손을 보지 않은지 오래된 듯 하다. 뒤편으로 돌아가 보니 보일러를 사용했었는지 기름탱크와 물탱크가 있다. 왜 이런것 하나 정리가 되어있지 않을까? 대청에서 뒤편으로 난 문도 떨어져 있고, 문창호지는 여기저기 찢어져 보기가 싫다.

 

 

글을 쓰다가 용인시청 담당부서에 연락을 해보았다. 명색이 도지정 민속자료인데 이렇게 관리를 하느냐는 것과, 보일러 시설은 왜 철거를 하지 않느냐 등을 물었더니, 보일러시설은 문중에서 문중회의실로 사용을 하기 때문에, 가끔 보일러를 사용한다고 해서 철거를 하지 못했단다. 문짝이 떨어지고 창호지가 다 찢어져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문중에 관리를 부탁했는데 보수가 안되었다는 대답이다. 문화재를 문중, 도, 시가 나누어서 관리를 하다 보니 이런 경우가 허다하다. 시 담당자는 곧 조치를 취하겠다고 하면서 문화유산에 깊은 관심을 가져주어 고맙다는 인사를 잊지 않는다. 용인시는 문화유적에 대한 관리가 비교적 잘 되어있는 곳이라 더 이상은 문제를 삼지 않았다. 다만 얼마 후에 확인을 해보겠다는 말로 대신했다.


아무리 사소한 문화유산이라고 해도 그것이 우리 것이라는 생각은 금물이다. 그 모든 것은 자연환경과 함께 우리 후손들에게 물려주어야 할 자산이다. 전국에 있는 수많은 문화유산. 그것이 올바로 보존이 되는 그날까지 난 문화답사를 계속하리라 다짐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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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누리의 취재노트
글쓴이 : 온누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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