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천 고광순의사님의 제각입니다.정부에서 30여억원이 나와서 다 지었다고 고재성이장님께서 그러시더라구요.
제가 볼때는 아직도 다 끝나지 않는 공사인것으로 보여집니다.
제봉고경명,월봉,학봉할아버지께서 인진왜란때 삼대가 한 전투에서 전사하셨습니다.
세계적으로 이런 전투사는 없습니다.저는 이것을 세계에 알리고 싶습니다.
이렇게 초라하게 계셔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연재1]창평상회를 아시나요?
우근 김 정 희
창평상회를 알고 계시는 지요.
창평상회를 어떻게 알고 계십니까?
저는 이글을 쓰면서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지금 내가 무얼해야 하는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말입니다.
그러다보니 고향을 떠올렸고 그리고 2008년 3월11일과 12일에 창평을 다녀왔습니다.
창평면 유천리는 제가 태어난곳으로 제 고향입니다.
저는 언제나 제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었습니다.
고향만큼 마음이 편하고 좋은곳은 없었습니다.
블로그를 시작하면서도 창평에 대해서 유천리에 대해서 많은 글을 이미 썼습니다.
저는 제 고향을 다시 생각해보았습니다.
내가 어느때 고향으로 내려가야하나.
그때는 언제가 될까?
내가 태어난 집에서 다시 옛날 그대로를 가지고 살아가고 싶습니다.
그렇게 생각을 하다보니 추석때 설때나 다녔던 창평은 이제 제가 살아가야할 마을로
다가 왔습니다.
이미 몇년전에 녹천 고광순의사님의 사당이 지어진다고 마을위쪽에서 공사를 하고 있는걸
몇년째 보고 있습니다.
길도 닦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공사현장에를 가보았습니다.
그리고 난뒤 이장님댁에가서 여쭈어 보았습니다.
완공이 되었다고 고재성이장님께서 말씀을 하시기에 아니? 어떻게 이게 완공된겁니까?
창평은 원래 현이 있었던 동네로서 담양보다는 창평이 더 컸던 곳입니다.
유천리는 원래 창평엿과 집장과 한과로 유명합니다.
고동시 곶감도 유명합니다.
대나무로도 유명합니다.
오늘은 제가 전체적인 창평을 이야기 할 수 없기에 오늘은 창평이라는 곳이 이런곳이구나.
이런일도 했구나.
이정도만 쓸려고 합니다.
명당중에 명당이라고 말하는 학봉할아버지의 묘소앞입니다. 다시 자세히 올립니다.
일제치하에서 창평에서는 광복을위해서 물심양면으로 싸우고 이겨나가기위해서
여러가지 일들을 벌렸던 곳입니다.
제가 알고있는 창평상회는 일제치하시절에 일본상인과 대적하기위해서 세워진걸로 알고 있습니다.
현재 창평 농협자리에 일제치하에서 일본을 대적하기위해 차린게 바로 창평상회입니다.
창평상회는 물건도 팔았지만 저리로 돈도 빌려주었습니다.
혹시 지금이 창평상회를 다시 복원해야 하지않을까?
그렇습니다. 저는 그때 창평상회처럼 다시 창평을 복원해 보고 싶습니다.
21세기에는 폭팔적인 세계인구의 증가로 다시 먹거리가 세계의 커다란 이슈로 등장될겁니다.
우리의 먹거리는 우리나라에서 자급자족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FTA를 반대한다고 말로만 떠들 시기가 아닙니다.
밀가루 가격이 얼마나 올랐으며 콩가격도 이제 커다란 문제입니다.
외국에서 들어오는 농산물이 우리 몸에 얼마나 좋을까요?
가격이 지금은 쌀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며칠이나 안먹고 살아갈 수 있을까요.
창평에 대해서는 쓸 이야기가 많이 있습니다.
제가 태어나고 자란곳이니까요.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고 잘 알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동피랑골목그림으로 연재를 했듯이 창평에 대해서도 연재를 할려고 합니다.
동피랑은 올해 정부에서 예산이 10억이상 나왔다고 김형진 21세기통영추진위원장님으로부터
전화와 메일로 와서 알고 있습니다.
통영의 동피랑골목그림으로 동피랑에 살아가시는 주민 50분들이 편안해졌으면 합니다.
개발도 좋지만 살아있는 개발이 되어야 합니다.
종가집이 보입니다.원래 종가집은 타버리고 없어서 지금은 학봉할아버지 묘소 아래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종가집부터 예전 종가집으로 다시 복원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광화문도 예전대로 복원이 되는데 왜 종가집은 복원이 안되는 걸까요.
다시 복원해야 합니다.
유천리도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예전 그대로 돌아가서 살고 싶어하는 동네 할머님들에게 제가 예전처럼
초가집에서 불때고 그렇게 살아가시면 어떻겠느냐고 여쭈어보았더니 서로 먼저 옛집에서 살고 싶다고
언제 고쳐주느냐고 다들 너무나 좋아 하셨습니다.
이미 마을회관은 정부에서 4억8천으로 올해 공사가 마무리 됩니다.
유천리 주민들도 초가집 그대로를 다시 재현해서 살아가셨으면 하고 돌담길도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저는 개발만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개발할곳은 개발을하고 전통으로 재현할곳은 예전 그대로 재현했으면 합니다.
마을회관 입구입니다.마을회관은 동네에서 보면 중심부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창평엿입니다.
창평엿은 유명하여 결혼식때 사돈댁에 보내는 석작에 자리를 차지합니다.
창평엿을 드셔보셨는지요.
우리쌀로 만들어져야 제 맛이 납니다.
창평엿도 유천리에서 만들어야 제대로 창평엿맛이 옛날 그맛이 납니다.
일어서고 계시는분이 묘석이 엄마이시고 오른쪽이 수현이 엄마이시고
이제는 다 할머니들이 되셨습니다.
왼쪽은 고재성이장님 어머님이신 택촌 할머니 이시군요.
그 옆으로 점심 준비가 한창이시길래 "배고파요?"했더니
그럼 빨리 밥을 먹어야지 하시며 준비를 할테니 일을 보고 얼른 오라고 하십니다.
마을회관에 들어서자마자 제가 사진부터 찍었습니다.
제가 어릴때는 아줌마였는데 이젠 할머니들이 되셔서
저를 잘 알아보지 못하셨습니다.
저라고 이야기 했더니 어제와서 집을 찍어간다고 했는데 오지않았냐고 해서 어제 다녀갔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 마을회관은 올해 4억8천으로 지어진다면서 도면을 보고와서 점심을 같이 먹었습니다.
마을주민이 원하시는건 예전대로 복원을 원하십니다.
그리고 문화를 관광지화 시켜야 한다는 생각들이 십니다.
일직선으로 나있는도로 끝이 유천리입니다. 황사로 보이지 않는 산이 아쉬웠습니다.
창평현 (옛지명 [전남 담양군 일부]) [昌平縣]
전라남도 담양군 창평면·고서면·대덕면·남면·수북면 일대에 있던 행정구역.
삼국시대에 백제의 굴지현(屈支縣)이었다. 신라의 삼국통일 후 757년 기양현(祈陽縣)으로 개칭하고 무주(武州:광주)의 영현이 되었다가 후에 현으로 승격했다. 1391년(공양왕 3) 장평갑향권농사(長平甲鄕勸農使)를 겸했다. 조선시대에도 창평현이 유지되었으나 1474~79년에는 이 고을 사람이 현령을 능욕한 죄로 읍이 혁파되어 광주에 합속되기도 했다. 1793년에는 읍의 치소를 지금의 고서면에서 창평면 반룡산 밑으로 이전했다. 별호는 명양(鳴陽)·용주(龍州)였다. 1895년 지방제도 개편으로 군이 되어 남원부 관할이 되었다가 1896년 전라남도에 소속되었다. 1914년 군면폐합에 의하여 창평군이 폐지되고 가면·군내면이 창평면으로, 서면·고현내면·북면이 고서면으로, 내남면·외남면이 남면으로, 대면·덕면이 대덕면으로, 장북면·장남면·동서면이 수북면으로 통합되어 담양군의 일부가 되었다.→ 담양군
출처: 브리태니커
창평의 들녘입니다. 지금은 적어보이실지 모르겠지만 예전에는 넓은 논들입니다.그래서 부자들이 많습니다.
창평면 (남한 전남 면) [昌平面]
전라남도 담양군 중남부에 있는 면.
면소재지는 창평리이다. 동남쪽은 월봉산(454m)을 비롯한 산지가 발달되어 있고, 그밖의 지역은 대체로 100m 이하의 낮은 산지와 평야를 이루고 있다. 쌀·보리 외에 시설채소재배가 활발하며 죽제품보다는 싸리제품을 많이 생산하고 있다. 또한 쌀로 만든 창평엿이 널리 알려져 있으며, 정철·송순과 같은 인재들의 자취가 서려 있는 곳이기도 하다. 남해고속도로가 면 중앙을 가로지른다. 창평(昌平)·삼천(三川)·용수(龍水)·유천(柳川)·오강(梧江)·의항(義項)·일산(一山)·장화(長華)·유곡(維谷)·해곡(海谷)·광덕(廣德) 등 11개 동리가 있다. 면적 33.91㎢, 인구 4,317(2004).
출처: 브리태니커
학봉길이라는 팻말이 보이는군요. 유천리인데 버스 종점이라서 유촌이라는 버스 간판과 문화관광의 고장이라고
이미 씌여져 있습니다. 문화는 있지만 관광을 올만큼 갖추어져 있는지 참 유천리 산에서는 주말마다 행글라이더를
타러 사람들이 몰려옵니다.
가게가 없는 마을답게 유천리는 옛날로 복원을 시켜서 문화 관광의 고장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현장사무실에는 컴퓨터도 아직 갖추어지지 않았습니다. 농림부에서 나온 전체 예산이 70억이라고 하는데
현장사무실은 형편이 없었습니다.
창평면사무소입니다. 앞에는 당산나무가 있는곳 학교에 갈때면 항상 거쳐서 가야했던 길입니다.
많이 변해져 있습니다.세월이 유수하다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당산나무는 그대로인것 같은데 사람은 많이도 변해버렸습니다.
창평상회를 다시 떠올리게 했던 이번 방문입니다.
저는 이번 방문으로 많은것을 알게되었습니다.
유천리는 올해부터 무농약마을로 친환경으로 농사를 짖는 마을로 변신합니다.
그리고 몇년전부터 이야기가 나왔던것을 이제는 하나씩 해결해 나갈겁니다.
지금이 바로 창평상회가 필요한때 입니다.
이제서야 때가 다가오고 있는것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외국으로 이민을 가시겠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에게 저는 말하고 싶습니다.
특히 노후를 외국에서 쓸쓸히 보내시는것보다는 고향에서 아니 우리나라에서 보낼 수 있었으면
그런 나라가 환경이 되어진다면 구지 외국을 선호할 필요가 있을까요.
실버타운은 이런곳에서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도시에도 가깝고 병원도 가까이 있는곳이 적격이라는 의사선생님들 말씀이 생각납니다.
노후에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모릅니다.
이글을 쓰고있는 제가 지금 겪고있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글도 두서가 없는지 모르겠습니다.
병이라는게 사람을 덮치는걸 보면 사람을 다르게 합니다.
영원히 살아가는 사람은 없지만 급할때 정신을 차려야 하는데 환자본인에게 알리지 못하는 병명이 닥치니
저도 의사선생님께서도 본인에게는 알려주시지 못하시는군요.
입원만이 최선일까요.호스피스를 그나마 공부를 했다고하나 부모님께 그 문제가 닥치니 어안이 벙벙하는군요.
저는 실버타운에 중요성을 다시한번 더 몸과 마음으로 느낍니다.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3년을 시묘살이를 했던 시절 우리도 곧 노인이 될겁니다.
이런 일이 일어난다면 나는 어떻게 행동을 할것인지 다시한번 생각해 봅니다.
우리가 우리나라를 사랑하지않고 아끼지 않는다면 누가 이나라를 지키겠습니까?
바로 우리가 대한민국을 지켜야하고 우리 자손들이 지켜야 합니다.
원래 이길은 양쪽이 대나무밭이였습니다. 저녁때 이 길을 걸을때마다 무서워했던 기억이 납니다.왼쪽은 대나무를
없애버리고 밭으로 만들었습니다.막네 작은 엄마 친정입니다. 서창아제가 사셨던 집 입니다.
논보다 더 비싼 대나무 밭입니다. 지금은 죽순이나 먹는지 모르겠습니다. 죽순도 먹는지 아시는분들이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대나무가 제대로 다시 대접을 받는 날이 왔으면 합니다.
유천리의 학독들 입니다. 없어질까봐서 하나씩 가져다가 놓으신 지금은 사돈댁이 되었습니다.
고광순 할아버지 사당에 나온 쑥입니다. 사돈댁에서 쑥떡과 감잎차를 먹었습니다.
누구집것인지는 모르겠지만 학독이라고 유천리에서는 말합니다.제법 큰 학독을보니 집안 식구가 많았을것 같습니다.
우리의 옛것이 아직 그대로 남아서 복원되기만 바라고있는 주민들이 살아가는 전통이 살아있는 고장 뿌리를 알고
아직까지 인물을 끊임없이 배출시키는 유천리를 저는 사랑하고 복원이 되는 그날까지 미력하나마 최선을 다하고자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