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호(國號) 대한민국 발안자를 아십니까?
- 역사학자들 거의 몰라… 임정(臨政)서 신석우 선생이 제안
우리 국민 중에 '대한민국(大韓民國)'이라는 국호가 언제 누구에 의해 만들어졌는지 아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10여명의 근현대사 전공자들에게 질문했으나 뜻밖에 '모른다'는 대답이 거의 대부분이었다.
서울대 사회학과 신용하 교수가 정확히 알고 있었다. 대한민국은 3·1운동으로 탄생한 상해임시정부의 국호였으며 1948년 8월 15일 건국과 함께 계승한 우리의 국호이다.
1919년 4월 10일 오후 10시...중국 상해 프랑스 조계(組界)의 김신부로(金神父路)에 있는 허름한 셋집. 밤을 새워 열린 임시정부 첫 의정원(오늘날의 국회)의 가장 중요한 안건은 국호의 결정이었다.
1919년 임시정부 첫 청사
처음 '대한민국'이란 명칭을 제안한 사람이 신석우(申錫雨. 1894-1953). 그러나 논란이 만만치 않았다.
ㅇㅇㅇ 의원이 반대했다.
"대한(大韓)이란 말은 조선 왕조 말엽 잠깐 쓰다가 망한 이름이니 부활시킬 필요가 없다"는 이유였다.
그러자 신석우가 되받았다.
"대한으로 망했으니 대한으로 흥하자."
결국 표결에 부치기로 했고, 다수결로 '대한민국' 국호가 채택됐다.
어떻게 많은 역사전공자들조차 대한민국 국호의 발안자를 모르고 있는 것일까?
한 소장역사학자는 우리 역사학계가 거시적 흐름을 중시하다 보니 개개의 사안과 관련된 인물들에 대한 연구가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풀이했다.
자연히 '신석우'란 인물에 대한 연구나 일반의 인식도 낮을 수밖에 없었다. 신석우는 1920-30년대 민족운동 과정에서 화려하게 드러나진 않았지만 중요한 고비마다 결정적 역할을 했던 거목이었다.
임시 의정원 기사록에 따르면 신석우는 국호 제정 말고도 임정 관제에 군무부(軍務部)증설, 임정 초대 총리에 이승만 추천, 임시헌장에 병역(兵役) 포함 등을 관철시키는 등 초기 임정에서 영향력을 행사했다.
한국의 언론사에서 굵직한 흔적을 남긴 것은 1924년 30세의 나이에 만석꾼 부친을 설득해 8만5천원을 주고 조선일보를 인수한 것이었다. 만성적인 경영난을 겪고 있던 조선일보는 신석우의 인수로 재도약 계기를 마련했으며 사장으로 민족의 스승 월남(月南) 이상재(李商在) 선생을 추대하는 등 대대적인 개편을 단행했다.
신석우의 활약은 일제하 최대의 민족운동인 신간회 활동에서 결정에 이른다.
1927년 2월 15일 오후 7시 서울 종로 기독교 청년회 대강당에서 열린 신간회 창립총회에서 신석우는 사회를 맡았고 벽초(벽초) 홍명희가 개회를 선언했으며 이어 이상재가 회장으로 추대됐다.
1931년 5월 신간회가 해산되자 신변에 위험을 느낀 신석우는 민세(民世) 안재홍 에게 사장직을 물려주고 상해로 탈출했다.
신용하 교수는
아마도 전 재산을 쏟아 부으면서 펼쳤던 독립운동이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하는데 대한 실망도 적지 않았을 것으로 분석하면서 그러나 대한민국이라는 국호 제정이야말로 신석우라는 이름을 반드시 기억해야 할 이유라고 밝혔다.
독립운동가 신석우(申錫雨) 1895. 9. 2∼1953. 3. 5
서울사람이다.
1915년 3월 경성고보(京城高普) 교원양성소(敎員養成所) 출신 이용우(李用雨) 등이 민족정신 고취와 일본인들에게 침탈당한 사업을 한국인 스스로 부흥시킬 것을 목적으로 조선산직장려계(朝鮮産織奬勵 )를 조직하자, 계원으로 가입하여 민족자본의 육성을 위한 주식 모집활동을 전개하다가 일경에 발각되어 1917년 3월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송치되었다.
그 후 일본 조도전대학(早稻田大學)을 졸업한 뒤, 중국으로 건너가 1919년 3월 상해에서 고려교민친목회(高麗僑民親睦會)를 조직하고 회장으로 선임되어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기초를 다졌다. 1919년 4월 상해에서 개최된 임시의정원 제1차 회의에 참석하여 임시정부 교통총장(交通總長)으로 선임된 그는 국호(國號)를 대한민국으로 결정하고, 입법기관의 이름을 대한민국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으로 결정하는 등 국무원(國務員) 구성과 임시헌장을 제정하여 임시정부 기본법의 기초를 닦았다.
또한 같은 달 개최된 임시의정원 3차 회의에서 경기도 의원, 의원자격심사위원(議員資格審査委員)등으로 선임되어 민족운동을 위해 진력하였다. 그 뒤 귀국하여 1924년 1월 서울에서 최린(崔麟)·김성수(金性洙)·송진우(宋鎭禹)·안재홍(安在鴻)·조만식(曺晩植) 등과 함께 연정회(硏政會)를 조직할 것을 계획하였으며, 같은 해 9월에는 조선일보(朝鮮日報)를 인수하여 상무이사와 사장 등을 역임하면서 민족 언론의 창달을 위해 헌신하였다.
1927년 2월 안재홍(安在鴻)·김준연(金俊淵) 등 30여 명의 민족주의장들과 함께 통일전선의 일환으로 결성된 신간회(新幹會)에 참여하여 총무간사, 신간회 경성지회(京城支會) 대표로 선임되어 지회 조직 건설에 앞장서는 등 주도적인 활동을 펼쳤다. 광복 뒤 1949년 초대 주중대사(駐中大使)로 임명되기도 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出典:『大韓民國 獨立有功者 功勳錄』 第 12卷, 國家報勳處, 1996年, pp.774~775.
- 역사학자들 거의 몰라… 임정(臨政)서 신석우 선생이 제안
우리 국민 중에 '대한민국(大韓民國)'이라는 국호가 언제 누구에 의해 만들어졌는지 아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10여명의 근현대사 전공자들에게 질문했으나 뜻밖에 '모른다'는 대답이 거의 대부분이었다.
서울대 사회학과 신용하 교수가 정확히 알고 있었다. 대한민국은 3·1운동으로 탄생한 상해임시정부의 국호였으며 1948년 8월 15일 건국과 함께 계승한 우리의 국호이다.
1919년 4월 10일 오후 10시...중국 상해 프랑스 조계(組界)의 김신부로(金神父路)에 있는 허름한 셋집. 밤을 새워 열린 임시정부 첫 의정원(오늘날의 국회)의 가장 중요한 안건은 국호의 결정이었다.
1919년 임시정부 첫 청사
처음 '대한민국'이란 명칭을 제안한 사람이 신석우(申錫雨. 1894-1953). 그러나 논란이 만만치 않았다.
ㅇㅇㅇ 의원이 반대했다.
"대한(大韓)이란 말은 조선 왕조 말엽 잠깐 쓰다가 망한 이름이니 부활시킬 필요가 없다"는 이유였다.
그러자 신석우가 되받았다.
"대한으로 망했으니 대한으로 흥하자."
결국 표결에 부치기로 했고, 다수결로 '대한민국' 국호가 채택됐다.
어떻게 많은 역사전공자들조차 대한민국 국호의 발안자를 모르고 있는 것일까?
한 소장역사학자는 우리 역사학계가 거시적 흐름을 중시하다 보니 개개의 사안과 관련된 인물들에 대한 연구가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풀이했다.
자연히 '신석우'란 인물에 대한 연구나 일반의 인식도 낮을 수밖에 없었다. 신석우는 1920-30년대 민족운동 과정에서 화려하게 드러나진 않았지만 중요한 고비마다 결정적 역할을 했던 거목이었다.
임시 의정원 기사록에 따르면 신석우는 국호 제정 말고도 임정 관제에 군무부(軍務部)증설, 임정 초대 총리에 이승만 추천, 임시헌장에 병역(兵役) 포함 등을 관철시키는 등 초기 임정에서 영향력을 행사했다.
한국의 언론사에서 굵직한 흔적을 남긴 것은 1924년 30세의 나이에 만석꾼 부친을 설득해 8만5천원을 주고 조선일보를 인수한 것이었다. 만성적인 경영난을 겪고 있던 조선일보는 신석우의 인수로 재도약 계기를 마련했으며 사장으로 민족의 스승 월남(月南) 이상재(李商在) 선생을 추대하는 등 대대적인 개편을 단행했다.
신석우의 활약은 일제하 최대의 민족운동인 신간회 활동에서 결정에 이른다.
1927년 2월 15일 오후 7시 서울 종로 기독교 청년회 대강당에서 열린 신간회 창립총회에서 신석우는 사회를 맡았고 벽초(벽초) 홍명희가 개회를 선언했으며 이어 이상재가 회장으로 추대됐다.
1931년 5월 신간회가 해산되자 신변에 위험을 느낀 신석우는 민세(民世) 안재홍 에게 사장직을 물려주고 상해로 탈출했다.
신용하 교수는
아마도 전 재산을 쏟아 부으면서 펼쳤던 독립운동이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하는데 대한 실망도 적지 않았을 것으로 분석하면서 그러나 대한민국이라는 국호 제정이야말로 신석우라는 이름을 반드시 기억해야 할 이유라고 밝혔다.
독립운동가 신석우(申錫雨) 1895. 9. 2∼1953. 3. 5
서울사람이다.
1915년 3월 경성고보(京城高普) 교원양성소(敎員養成所) 출신 이용우(李用雨) 등이 민족정신 고취와 일본인들에게 침탈당한 사업을 한국인 스스로 부흥시킬 것을 목적으로 조선산직장려계(朝鮮産織奬勵 )를 조직하자, 계원으로 가입하여 민족자본의 육성을 위한 주식 모집활동을 전개하다가 일경에 발각되어 1917년 3월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송치되었다.
그 후 일본 조도전대학(早稻田大學)을 졸업한 뒤, 중국으로 건너가 1919년 3월 상해에서 고려교민친목회(高麗僑民親睦會)를 조직하고 회장으로 선임되어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기초를 다졌다. 1919년 4월 상해에서 개최된 임시의정원 제1차 회의에 참석하여 임시정부 교통총장(交通總長)으로 선임된 그는 국호(國號)를 대한민국으로 결정하고, 입법기관의 이름을 대한민국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으로 결정하는 등 국무원(國務員) 구성과 임시헌장을 제정하여 임시정부 기본법의 기초를 닦았다.
또한 같은 달 개최된 임시의정원 3차 회의에서 경기도 의원, 의원자격심사위원(議員資格審査委員)등으로 선임되어 민족운동을 위해 진력하였다. 그 뒤 귀국하여 1924년 1월 서울에서 최린(崔麟)·김성수(金性洙)·송진우(宋鎭禹)·안재홍(安在鴻)·조만식(曺晩植) 등과 함께 연정회(硏政會)를 조직할 것을 계획하였으며, 같은 해 9월에는 조선일보(朝鮮日報)를 인수하여 상무이사와 사장 등을 역임하면서 민족 언론의 창달을 위해 헌신하였다.
1927년 2월 안재홍(安在鴻)·김준연(金俊淵) 등 30여 명의 민족주의장들과 함께 통일전선의 일환으로 결성된 신간회(新幹會)에 참여하여 총무간사, 신간회 경성지회(京城支會) 대표로 선임되어 지회 조직 건설에 앞장서는 등 주도적인 활동을 펼쳤다. 광복 뒤 1949년 초대 주중대사(駐中大使)로 임명되기도 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出典:『大韓民國 獨立有功者 功勳錄』 第 12卷, 國家報勳處, 1996年, pp.774~775.
출처 : 돈이되는 정보카페
글쓴이 : 코비캡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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