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펌]☞진시황릉 피라미드,무지개의 꿈
진시황 역시, 고대 동이족이었다는 증거인 무덤 유적 사진입니다.
고대 한민족 전통의 피라미드임이 입증되는 진시황릉 전경 사진.
진시황 피라밋, 전시장 사진
[펌]☞진시황릉 피라미드,무지개의 꿈
===
진[秦]나라는 주신(朝鮮)의 나라
진[秦]나라
1.진(秦)나라는 어떠한 나라인가
우선 진나라의 유래부터 간단히 정리해보겠습니다.
진나라는 하나라-은나라(은조선)-주나라에서 이어지는 중원 통일 국가 입니다. (물론 주나라는 최초 통일이 아니라 당시 으뜸가는 나라,봉건사회)
주(周)나라가 약화되어 제후국으로 분열되자 당시 주변의 초나라,월나라,제나라 등의 6국 을 모두 정복한 후에서야 통일 진나라가 세워집니다. 그 이전까지는 그저 그런 나라였지만 국력이 강해지자 통일을 하게 됩니다.^^
시황제 [始皇帝, 진시황, BC 259 ~ BC 210]이라는 인물이 중원을 통일 합니다.
읍제국가 형식으로 통치를 하였으며 기원전221년 에 건국되었고 기원전207년에 멸망하게 됩니다.
2.진(秦)나라가 우리민족인 근거
(1) 주신(朝鮮)의 풍습인 상투
우리민족 전통의 풍습인 상투입니다.(아래 사진 참조,병마용갱) 우선 최소한 반드시 거치게 되는 현재의 국사책에서도 보실수 있듯이 상투는 우리민족의 전통 풍습입니다. 위만이 준왕을 몰아내기전에 우리민족으로 변장한 후에 (상투를 틀게 됩니다.) 상투를 틀고 찾아온 위만을 준왕은 굉장히 기쁘게 맞고 수비 대장으로 임명합니다. 그러나 후에 반역으로 인해 물러나게 됩니다.
위의 이야기를 보듯이 화하인과 주신의 차이는 상투입니다. 위만은 본래 연나라 사람으로서 확실한 화하인입니다. 그러할진데 스스로 상투를 틀고 우리민족으로 귀화 당시 조선에 찾아오니 준왕이 기쁘지 않을수가 없었던 것이죠..(^^) 화하가 스스로 고개를 숙이고 찾아오는데 어찌 기쁘지 않겠습니까.(^^) 이와 같이 상투는 본래 우리민족을 나타내는 전통 풍습임을 알게 해줍니다.
상투를 했다는 뜻은 성인이라는 뜻입니다. 조선(이조)시대에서 청소년까지는 댕기머리를 하다가 성인이 되면 상투를 틀게 되지요.. 물론 가끔 산발하고 다니는 산적들도 있습니다.(^^)
상투문제로 말이 많은데 그중 에서도 화하인들은 상투를 않했냐 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렇게 욕하고 싫어하는 반민족 역사 왜곡자들의 수장이었던 이병도 마저 "동아시아에서 상투민족은 고대로부터 우리민족과 묘족뿐" 라고 말하였습니다.
(2) 신라[新羅]와 가야[伽倻] 진[秦] 나라는 조상이 같다.
『좌전(左傳)』에 따르면 "진(秦)은 소호(少昊)씨의 후예다."라고 합니다. 소호씨에 대해서는 밑의 산해경에서 나오게 됩니다.
"진(秦)나라의 선조는 황제 전욱 고양씨이며, 묘족의 후예다. 진나라와 조(趙)나라는 모두가 모계혈통이나 그 모계이 아버지는 전욱이다. ~ 소호씨는 영씨 성을 가진 족(族)으로 곧 조(趙)나라, 진(秦)나라 조상의 할아버지가 소호(少昊)씨이다. - 사기 진본기(史記 秦本記)"
"신라 사람들은 스스로 '소호금천씨(少昊金天氏)'의 후손이어서 성(姓)을 김씨로 하였다(新羅人自以少昊金天氏之後 故姓金氏 : 『삼국사기』百濟本紀 義慈王)"
김유신 열전을 보면 김유신의 12대조는 수로왕합니다. 신라 사람들이 자칭 "소호 금천씨의 후손"이라 하여 "김(金)"으로 성을 삼았고 김유신의 비문에도 "황제 헌원의 후예"요, 소호의 직계라고 하였으니 남가야 시조 수로는 신라와 동일한 성씨라고 볼수 있습니다.
당시 신라사람들은 중 김(金)씨들은 자신들을 진시황(秦始皇)과 연결 시켰습니다. 다른 기록을 볼까요?
『삼국사기』에는 김유신의 12대조는 수로왕인데 황제(黃帝) 헌원의 후예요, 소호의 직계다.(羅人自謂少昊金天氏之後 故姓金 庾信碑亦云 軒轅之裔 少昊之胤 則南加耶始祖首露 與新羅同姓也 :『三國史記』金庾信列傳). 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몰랐습니다.워낙 진나라 자체가 관심이 적었기 때문입니다. 위의 삼국사기의 내용을 보듯이 김수로왕꼐서 소호의 직계라고 합니다. 또한 헌원의 후예라고도 합니다.
1977년 7월 14일자 중공 신문인 광명일보를 보겠습니다. "산동 반도 지역에서 남한 넓이 만한 광대한 지역에 이르는 대문구 문명권 (大汶口文明圈) 을 발견했는데, 이곳을 발굴하니 문자가 나오고 그 곳을 통치한 소호씨 (少昊氏) 란 통치자이름이 나왔다.이것을 방사선 탄소 측정을 해보니 당시 1977년으로부터 5785 년전 것이다. 이라 하였습니다.
고사변(古史辯)만 보더라도 백화문으로 되어 있는데 이것을 보면 "소호씨는 동이계야 (東夷系也), 동이지인 (東夷之人) 이라" 고 나옵니다.
또한 태호 복희씨와 여와씨 또한 소호씨가 동이계열이라 말하였습니다.
이제 산해경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산해경(山海經)』에 따르면 동해 밖의 먼 곳에 소호의 나라가 있고 그의 왕국은 온갖 새들이 나라를 다스렸다고 합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새들의 나라 입니다. 역사에 관심이 조금이라도 있던가 혹은 최근에 인기리에 종영된 '주몽'을 보신분이라면 우리민족은 새를 숭상하였고 삼족오를 모셨다는 것을 아실겁니다. 그리고 당시의 기록들은 직설적으로 표현하지 않고 간접적으로 묘사를 하던가 합니다. 예로 박혁거세님이나 김알지님 같은 분들의 경우도 출생부분은 거의 신화로 나타나 있죠..^^
보통 소호씨를 화하족과 연관시키는 분들이 가끔 계신데 화하족은 뱀을 숭배하는 민족입니다.(그래서 용을 숭상하죠.) 새와 관련된것은 전혀 없습니다.
위의 내용에 있듯이 신라-가야-진 나라는 뭔가 연관성이 있는듯 합니다. 위의 기록만 참고하자면,
진시황(秦始皇,진) - 김일제,김알지(신라) - 김수로(가야) 라는 공식이 성립합니다. 사실 이부분에 대해서는 김일제 이전의 것들은 고증이 어렵기에 좀더 연구가 필요하지만 당시 신라인들과 가야인들은 스스로를 소호씨의 후예라 했음을 알수 있습니다.
판단은 여러분께서 하시면 됩니다. 글 마지막 부분에 읍제국가 형식으로 공통된 정치형태를 말씀드리겠지만 민족을 나누는 가장 큰 기준은 혈통(血統)이라 생각합니다. 그 다음이 문화일것입니다. 그래서 원나라가 고려가 요(遼)처럼 화하에게 동화되지 않도록 그렇게 노력하였던 것입니다.
(3) 진[秦]나라 주민이 동이의 영토에 찾아온 까닭은?
진한(辰韓)은 진(秦)나라에서 망명(亡命)한 사람들이 한국(韓國)에 오자 한국(韓國)에서 동쪽 경계 땅을 떼어 주어 나라를 세우게 하고 진한(辰韓)이라 칭호하였는데, 처음에는 6국(國)을 통할하였다가 점차 나뉘어 12국(國)이 되었다. (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 외기(外起)
『삼국지』에는 "진한은 마한 동쪽에 있다. 이 나라 노인들의 말에 의하면, 옛날 진(秦)나라 때 사람들이 괴로운 노역을 피해 한(韓) 지역으로 도망쳐 들어갔는데 마한(馬韓)은 그 동쪽 땅의 일부를 그들에게 주었다고 한다. 그들은 성(城)과 울타리(柵)가 있었고 말하는 것이 마한과는 다르고 진나라 사람들이 말하는 것과 같다.『三國志』魏書 東夷傳 辰韓)"
『후한서(後漢書)』에도 "진한의 노인들 스스로 말하기를 진나라가 망해서 도망해 온 사람으로 피난 가는 것이 고역이라고 말했다. 한국(韓國)의 마한 땅이 적당할 것 같아서 마한의 동쪽을 나누어 같이 살았으며 말은 진(秦)나라와 비슷하여 그런 이유로 나라 이름을 '진한(秦韓)'이라고 하였다(『後漢書』東夷傳 辰韓)
『삼국사기』에는 " 중국 사람들이 진나라 때 난리가 나서 시달려서 동쪽으로 오는 자가 많아서 대개 마한의 동쪽 땅으로 몰려들어 진한과 어울려 살더니 점차 성하게 되었다. 그래서 마한이 이를 꺼리어 신라에 대해 책망하였다(『三國史記』新羅本紀 弟1 始祖 38年)."
위의 삼국사기와 후한서를 보면 차이가 있는것을 아실겁니다. 후한서에서는 마한이 진나라 사람들에게 땅을 주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삼국사기에서는 신라를 책망했다고 합니다.
어쨋든 중요한것은 진나라 사람들이 노역이든 무엇이든간에 왜 굳이 이 동이의 영토로 왔느냐 그것입니다. 본래 우리가 아는 데로라면 분명히 같은 화하민족들과 어울려 있는것이 좋을텐데 말이죠. (우리민족과 화하의 관계를 생각하자면 아마 우리 영토에 오자마자 생매장 당할 겁니다.) 더욱이 중요한것은 당시 우리민족이 그들을 받아드리고 일반 화하와는 다르게 친근하게 어울렸다는 것입니다. 이는 같은 민족이 아닌 이상은 절대 우리민족과 화하의 관계에서는 찾아볼수 없는 일입니다.
(4) 진[秦]나라는 당시 오랑캐라 불리었다. 현재 우리가 배우는 역사책 혹은 인터넷 검색을 해보다보면 공통적으로 보이는 것이 진[秦]나라가 화하 최초의 통일국가라는 것 입니다.
그러나 이는 사실과 다릅니다. 당시 화하족의 나라들이 진나라를 서융(西戎)이라 불렀습니다. 서융은 흉노족이 점차 서쪽으로 이동하면서(물론 오랜시간이 걸렸습니다.) 갈라져나온 민족으로 생각되어집니다.
당시 화하족들이 진나라를 세운 사람들은 유목민족인 서융 이라고 한것으로 보아도 알수있습니다. 서융은 당시 우리민족과 같은 유목민족이었습니다. (조상이 같은데 화하족과 같이 농경민족이 될리가 없죠.) 그러다가 어느 순간엔가 화하인들이 그렇게 오랑캐라 욕하였던 진[秦]나라는 어느 틈에 화하인들의 나라로 편입됩니다.
(5) 진[秦]나라는 통일 후에는 현을 실시하지만 당시까지만 해도 현=읍 이다.
진나라는 BC 10세기 목축으로 이름이 나 있던 대구(大丘)의 비자(非子)가, 주나라 효왕(孝王)으로부터 진읍(秦邑:甘肅省 淸水縣)에 봉해져 서융(西戎) 의 방위를 맡음으로써 진을 일으키게 됩니다. (여기서 목축은 유목을 말합니다.농사짓는 농경이 아니었음을 뜻합니다.)
진나라 역시 초기에는 읍제국가(邑制國家)의 형식이었습니다. 그러나 후에 진나라는 BC 7세기의 무공(武公) 때부터 정복지를 현(縣)으로 만들기 시작했는데, 현이라고 해도 그것은 명목일 뿐 실상은 읍과 다름이 없었습니다.
진나라는 서융의 유목민족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유목민족은 읍제국가를 지향합니다. 정처없이 떠돌아 다니며 생활하는 부족(유목)민들에게는 중앙집권은 그다지 지향해야 할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군,현제를 실시함으로서 중앙집권의 기초를 마련한 진시황이지만 실제 현이 읍과 다름이 없고 군은 현의 상위개념으로 큰 읍이 주변 읍을 관리하는 읍제국가 개념에서 바라보자면 진나라 당시까지는 주변 읍을 관리하는 큰 읍에 해당할수 있다고 봅니다. 본격적인 중앙집권은 한[漢] 나라 때부터 시작합니다. 이때부터가 본격적인 군,현제 실시로 보입니다. 7국 당시에 화하인들의 나라인 위(魏)나라가 중앙집권을 가장 먼저 시도해 화하인들의 특성을 그대로 나타낸것도 진나라와는 차이를 보입니다.
이에 겉으로는 중앙집권이라 하지만 실상 읍제국가의 티를 대부분 벗지 못했던 진나라는 서융이라는 유목민족의 특성을 그대로 나타냄으로서 농경 사회로서 중앙집권을 지향하는 화하인들의 나라와는 다르다고 생각됩니다.
참고 : 네이버(Naver) 백과사전,후한서(後漢書) 삼국사기(三國史記),삼국지(三國志) 산해경(山海經),고사변(古史辯),좌전(左傳) 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 외기(外紀) 그외 기타 블로그,카페 게시물 정용석 "고구려, 백제, 신라는 한반도에 없었다"-동신출판사-
===
[펌]☞演史(연사) ,한민족참역사
演史(연사)
현대까지 한민족에 대한 기록은 다 없어져버리고 단,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고려사, 이조실록등만 있습니다. 그러나 이 내용은 실사 결과 이조시대(이방원)때 필사과정에서 상당부분 조작된채 재발행 되었기때문에 내용이 왜곡되고 비상식적이어 신뢰성이 적습니다.
그러던 중, 한단고기(桓檀古記)와 演史가 출현했습니다.
우리카페의 역사기준은 이중에 한민족 역사기록인 연사입니다.
우리카페 운영진은 연사의 주내용에 대한 연구결과 실사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이를 널리 알리고저 이 카페를 개설하게 되었습니다.
연사는, 고려후손인 려진족(만주족)이 명국(중국)을 정복했을 당시 청조 태종의 아들 순치제가 난징(명나라 서울)을 접수하면서 사관에 명하기를 " 태조께서 말씀하시길 우리 한(칸)민족의 역사가 유구한데 기록이 부실하다 하신바 명황실 서고에 있던 사료중 한민족역사를 따로 정리하라!" 는 명 을 내림으로써 만들어진 한민족 전문 역사서인데 청조의 멸망이후 사가에 따로 보관되어오던 필사본을 삼우선생이 아주 우연히 당시 관계자후손을 만나 입수하게 된 매우 귀한 한민족 역사자료 입니다.
여기, 간단히 그 내용을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한민족은 신나쪽(지금의 경상도 지역:고지명 신나)에서 비 롯된 금사람들로써 최초의 제국인 주신나라(제국)을 만들었 는데, 지도자를 단 이라 하였고 주신 당시에는 한민족외 다 른종족은 그 수가 상당히 적었으며 주변의 다른 종족들 스스 로 백성이 되기를 자청하여 지금의 반도와 일본, 중국과 러 시아지역까지 다물하였다. 단의 명에의해 이외의 각지를 배 달간자들중에 돌아오지않는 이들이 있었다.(배달=정복, 다 물=통치,신나=신라) 주신사람들은 가죽옷을 입고 말과 수례 를 타고다녔으며 멀리가는사람은 활, 쇠검,솥,개를 가지고 다 녔으며 사각뿔의 무덤과 제사 풍습이 있다.지도자를 한(단)이 라고 하였는데 다물안팍이 모두 존경하여 복종할뿐 2천년이 되도록 달리하지 않았다. (원본 초기 번역)
조선(고조선)의 원래이름이 주신이며 백성을 금이라 했고,한민족 최초의 발원지가 지금의 경상도지방이라는 점, 최고 지도자 이름이 단이며,제국 을 건설한 당시에 다른 민족들에 비해 한민족이 크게많았으며 군사조직이 있었고 기마군,활,칼,솥등의 도구들이 있었고, 주변에 살고있던 작은수의 종족들 모두가 단과 주신제국을 존중하여 스스로 영역에 들었고,단은 주변 으로 계속 원정대를 보냈는데 멀리간사람들은 돌아오지 않았고 주신의 문 화는 피라미드 무덤풍습이 있으며 역사는 약 2쳔년이다... (상세해설)
이상은 연사 번역 내용입니다.
우리 한민족참역사, 1khankorea1는 이러한 내용의 연사를 근거로하는 한민족 전문 실증역사 사이트임을 밝혀드립니다.
즉, 한민족역사는 약 5~6천년전으로써 신라지방에서 번성하여 점차 북진하여 최초 의 제국인 주신제국을 건설한 후, 세계각지로 이동했다고 정의 합니다. 이점이 한단 고기하고 다른 부분입니다. 우리는 한단고기의 내용보다 연사의 내용이 더 실사적이 라고 판단하기때문에 한민족역사의 모든 정의를 이에 근거하여 내립니다. 그러하지 만 한단고기를 위서라고 판단하는 것은 아닙니다. 공통부분도 있기 때문입니다. 단지 전체적으로 연구가 연사보다 덜 진행되어 있으므로, 실사구시적으로 연사를 기준으 로 정한 것입니다.
우리 카페의 역사내용은 현존하는 사료중에 가장 객관적이어 신 뢰성 있는 연사를 기준하여 정의되고 공지된다는 점을 밝혀드립 니다.
(추가) 최근들어 우리 한사(한민족참역사)가 보유하고 있는 연사와 청연사를 공개하라는 분들이 있습니다만, 우리 한민족참역사 교수진은 소장자의 뜻을 받아들여 비공개 하기로 하였다는 점을 다시 밝혀드립니다.
그 이유는
첫째: 원 소장자가 현재 중국인으로서 생존해 있고,
둘째: 내용에 대한 번역작업이 현재 신중하게 진행중이며
셋째: 현재 국사와 너무나 다르기때문에 시간이 필요하다. 입니다.
이 게시물은 저작권은 한민족참역사 카페지기에게 있습니다. cafe. khankorea
[펌]☞演史(연사) ,한민족참역사
===
'문화 한마당'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발해 (0) | 2007.09.07 |
---|---|
[스크랩] 광개토태왕은 과연 어디에 잠들었는가? (0) | 2007.09.02 |
역사적으로 위대한 위인 사진모음 1 (0) | 2007.08.28 |
[스크랩] 보물 제80호 홍천 희망리 당간지주 (0) | 2007.08.25 |
[스크랩] 궁합과 속궁합 혼자서 볼수 있는 방법 (0) | 2007.08.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