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한마당

[스크랩] 광개토태왕은 과연 어디에 잠들었는가?

만년지기 우근 2007. 9. 2. 17:25

또 하나의 광개토대왕릉이라고 하는 고성 화진포 앞의 거북섬

 

광개토대왕은 고구려 제19대왕으로 재위기간은 391년∼413년이다. 광개토대왕은 재위기간 동안 영락(永樂)이라는 연호를 사용했으므로 재위시에는 영락대왕이라 일컬어졌다. 사후의 시호는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다. 광개토대왕의 본명은 담덕(談德)인데, 중국의 사록에는 안(安)으로 전한다. 고국양왕의 아들로 어려서부터 체격이 크고 뜻이 컸는데, 386년에 태자로 책봉되었다가 부왕의 사후 즉위하였다.


광개토대왕은 고구려의 국세를 키워 재위기간 중 64성과 1,400촌락을 공파하였으며, 고구려의 영역을 크게 팽창시켜 서로는 요하, 북으로는 개원(開原)∼영안(寧安?), 동으로는 혼춘(琿春), 남으로는 임진강유역에 이르게 했다. 대왕은 고구려의 영역을 크게 확장시켰을 뿐만 아니라 내정의 정비에도 노력하여 장사(長史)·사마(司馬)·참군(參軍) 등의 중앙 관직을 신설했는가 하면, 역대 왕릉의 보호를 위해 수묘인 제도를 재정비하였으며, 393년에는 평양에 아홉 군데의 절을 창건하여 불교를 장려하기도 했다. 〈광개토왕릉비〉에 광개토왕 때에는 「나라가 부강하고 백성이 편안하였으며 오곡이 풍성하게 익었다.」라고 표현한 것도 이러한 내정정비의 결과라고 하겠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412년 39세라는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자, 414년 능에 옮겨 묻고 생전의 훈적을 기록한 능비를 건립하였다. 능과 능비는 지금도 중국 길림성 집안현에 남아 있는데, 능에 대해서는 장군총(將軍塚)설과 태왕릉(太王陵)설이 갈라져 있다. 태왕릉은 극내성에서 동쪽으로 4km 떨어져 있고, 태왕릉에서 남쪽으로 2km 정도를 가면 압록강에 다다르게 된다. 네모난 계단식 석실무덤인 태왕릉은 가로 세로 66m의 네모난 모습으로, 장군총의 4배가 된다. 장군총의 정식 명칭은 우산하1호분(禹山下一號墳)이다. 무덤 앞으로는 퉁거우 평야가 펼쳐져 있고, 그 너머에 압록강이 흐른다. 무덤은 화강암 장대석을 이용하여 방대형 단을 7층으로 쌓고 제4층 단의 한가운데에 널길과 석실을 설치했다. 묘실의 방향은 서남향이며 무덤의 네 모서리는 정확히 동서남북에 맞추어졌다. 장군총은 무덤의 거대한 규모로 5기에 이르는 배총과 무덤이 돌무지무덤의 최종단계형인 기단식돌방무덤인 점 등과, 무덤 주변에 태왕릉과 광개토왕비(廣開土王碑) 등이 있는 점 등을 근거로 무덤의 피장자를 412년에 죽은 광개토왕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태왕릉을 광개토대왕릉으로 보고, 장군총은 장수왕릉이라고 보는 견해도 적지 않다.

 

최근에는 고성군 화진포에 또 하나의 광개토대왕릉이 있다는 기록이 발견이 되었다고 한다. 화진포 앞바다에 보면 금구도라는 작은 섬이 있는데, 이 거북이 모양을 한 작은 섬이 광개토대왕릉이라는 자료가 발견이 되었다는 것이다. 고구려 연대기에 따르면 광개토대왕 3년인 서기 394년 8월에 화진포의 거북섬에 왕릉축조를 시작하였으며, 광개토대왕 18년 8월에 광개토대왕이 직접 이곳을 방문했던 것으로 기록이 되어있다. 또한 광개토대왕이 서거한 이듬해인 장수왕 2년(414년) 9월 29일 화진포 거북섬에 광개토대왕의 시신을 안장했다고 한다. 이곳에는 광개토대왕릉의 수비대가 지키고 있었으며, 문자명왕 2년에는 이곳에서 광개토대왕의 망제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다는 것이다.


한국과 중국, 그리고 일본의 사가들까지 서로 다른 견해를 보이고 있는 광개토대왕의 능은 과연 어디에 존재하는 것일까? 태왕릉과 장군총, 그리고 화진포의 거북섬까지 곁들여진 광개토대왕의 능에 대한 학설은 앞으로도 적지 않은 논란을 일으킬 것 같다.

 

자료출처를 밝히라는 분들이 많아 화진포에 고성군에서 세운 안내판을 올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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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누리의 취재노트
글쓴이 : 온누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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