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8~926년의 220여 년 간 만주와 한반도 북부지역을 무대로 번영했던 나라.
개요
발해라는 이름은 713년 당(唐)이 건국자인 대조영(大祚榮)을 발해군왕(渤海郡王)으로 봉해 그 국가적 실체를 공인한 데서 비롯했다(→ 대조영). 건국 초기에는 스스로 진국(震國)이라 칭했으며 일본과의 사절교환시에는 고구려의 계승을 강조하며 '고려'(高麗)로 칭하기도 했다.
■ 역사
668년 고구려 멸망 후 당은 고구려의 옛 땅을 지배하기 위해 평양에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설치했으나, 유민의 저항이 심하자 치소(治所)를 요동의 신성(新城)으로 옮겼다가 30년 만인 698년에 결국 폐지했다. 이후 요동지방에는 고구려유민 중심으로 자치국인 소고구려국을 세워 9세기 초반까지 유지했다. 안동도호부가 사실상 유명무실해진 696년 무렵 전통적으로 중국 동북방의 이민족을 제어하기 위한 전진기지로 중시되던 요서지방의 요충지 영주(營州)에서는 당의 압제에 시달리던 거란족이 이진충(李盡忠)과 손만영(孫萬榮)의 지도 아래 반란을 일으켜 이 일대를 혼란에 빠뜨렸다. 1년 여에 걸친 반란의 와중에서 고구려 멸망 후 강제로 이 지역에 옮겨져 살던 고구려유민과 말갈족들이 대조영과 걸사비우(乞四比羽)의 지도 아래 영주를 빠져나와 만주방향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이를 저지하던 당군과의 전투에서 걸사비우가 죽자, 대조영은 말갈족들을 거느리고 당군의 추격을 물리치면서 동만주지역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698년 당시 계루부(桂婁部)의 옛 땅으로 일컬어지던 지린 성[吉林省] 둔화 현[敦化縣] 육정산(六頂山) 근처에 성을 쌓고 나라를 세워 진국이라 했다. 현재의 아오둥산청[敖東山城]과 청산쯔산청[城山子山城]이 그 유지이다.
당은 발해의 건국이 기정사실화되고, 요서지역에 대한 돌궐(突厥)·거란(契丹)·해(奚) 등의 압력이 가중되면서 랴오허 강[遼河] 유역과 만주 일대에 대한 영향력 행사가 사실상 어렵게 되자 705년 시어사(侍御史) 장행급(張行岌)을 보내 발해의 건국을 인정했다. 이어 713년에는 고왕(高王) 대조영을 정식으로 발해군왕에 봉해 공식적인 외교관계를 맺었다. 대조영은 요서까지 세력을 뻗치고 있던 돌궐과 긴밀한 관계를 맺는 한편 당과 평화적인 교류도 계속 유지함으로써 안정과 번영의 기틀을 마련하는 데 힘썼다. 719년 대조영의 뒤를 이어 즉위한 무왕(武王) 대무예(大武藝)는 연호를 인안(仁安)이라 하고 영토의 확장에 주력해 큰 성과를 거두었다. 동북 만주 일대와 연해주 남부지역이 판도에 포함되는 것은 이때였다.
발해가 적극적으로 영토확장사업을 벌이자 신라는 이를 염려해 721년 강릉 이북지역에 장성을 쌓아 대비했다. 또한 발해와 우호관계를 유지하던 헤이룽 강[黑龍江] 하류지역의 흑수말갈(黑水靺鞨)은 당과의 연계를 통해 발해의 침공에 대비하고자 했다. 역시 발해의 세력확장을 경계하고 있던 당은 흑수말갈이 내속의 의사를 보이자 이를 계기로 726년 이곳에 흑수주를 설치하고 장사(長史)를 파견했다. 이같은 사태의 전개로 인해 위기감을 가지게 된 무왕은 아우 대문예(大門藝)로 하여금 흑수말갈의 정벌을 명령했다. 그러나 당과 직접 충돌이 야기될 것을 우려한 대문예는 정벌을 반대하다가 여의치 않자 당으로 망명했다. 당은 대문예를 우대하여 좌효기장군(左驍騎將軍)에 임명하고 발해의 송환요구를 거절했다. 양자의 대립은 결국 발해 수군의 산둥[山東] 등주(登州) 공격, 당·신라 연합군의 발해공격이라는 무력대결로 발전했다. 732~733년에 걸친 발해와 당·신라의 대립은 뚜렷한 결말을 보지 못하고 긴장관계가 계속되다가 737년 제3대 문왕 대흠무(大欽茂)가 즉위해 평화외교정책을 펼침으로써 해소되었다.
문왕은 즉위 후 연호를 대흥(大興)으로 바꾸고 750년대 전반에는 도읍을 상경으로 옮긴 뒤 대내적으로는 체제정비에 힘쓰고 대외적으로는 평화적 교역의 증대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리고 당에서 〈당례 唐禮〉·〈십육국춘추 十六國春秋〉 등의 서적을 비롯한 각종 문물을 들여와 사회적·문화적 발전을 도모하는 한편, 안녹산(安綠山)·이정기(李正己) 등 당의 지방 군웅들을 매개로 한 교역을 통해 경제적 향상을 기했다. 뿐만 아니라 일본·신라·거란 등과도 빈번한 접촉을 가졌다. 793년 문왕이 사망하자 성왕(成王:大華璵)·강왕(康王:大嵩璘)·정왕(定王:大元瑜)·희왕(僖王:大言義)·간왕(簡王:大明忠) 등이 뒤를 이었으나 짧은 재위기간으로 별다른 치적을 남기지 못했다. 818년 대조영의 아우 대야발(大野勃)의 4세손인 대인수(大仁秀)가 선왕(宣王)으로 즉위해 연호를 건흥(建興)으로 고치고 나라의 분위기를 새롭게 했다. 이때 싱카이 호[興凱湖] 북쪽의 말갈세력을 완전히 복속시키고 흑수말갈에 대한 통제력도 장악했으며, 당의 지배력이 약화된 랴오허 강 일대로 진출해 소고구려를 영역에 포함시키면서 대국으로 성장했다. 기존의 3경에 서경과 남경이 추가되고 헤이룽 강 하류지역과 요동지방에 새로운 주가 설치되어 5경(京) 15부(府) 62주(州)의 지방제도가 완비된 것도 이때였다. 당은 당시의 발해를 '해동성국'(海東盛國)으로 불렀다. 830년 선왕이 사망한 후 대이진(大彛震)·대건황(大虔晃)·대현석(大玄錫)·대위해(大瑋瑎)가 그 뒤를 이었고 대인선(大諲譔)이 발해의 마지막 왕인 15대왕으로 즉위했으나 기록이 단편적으로 전하여 11대왕 이후의 즉위년·사망년·왕계(王系)는 분명하지 않다.
발해가 제10대 선왕 이후 점차 쇠퇴의 기미를 보이는 동안, 랴오허 강 상류지대와 동몽골 지역을 발판으로 성장하던 거란은 9세기 후반부터 발해의 요동지배를 위협하기 시작했다. 916년 거란의 여러 부족을 통일한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는 중원으로의 진출에 앞서 배후를 위협할 수 있는 발해에 대한 공격에 나섰다. 발해는 925년 12월말부터 다음해 1월초에 걸친 거란의 대대적인 공격을 맞아 별다른 저항도 해보지 못하고 1월 14일 수도가 함락됨으로써 멸망했다. 발해가 멸망한 원인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밝혀지지 않았으나 당시 내부 분열이 심해 효과적인 대응이 어려웠던 것 같다. 거란은 발해의 옛 땅에 동단국(東丹國)을 세워 거란 태조의 맏아들로 하여금 다스리게 했다. 그러나 발해유민의 부흥운동이 전개되기 시작하자 928년 유민들을 요동으로 강제 이주시키고, 동단국도 동평(東平:지금의 遼陽)으로 옮겼다. 발해유민들은 12세기초까지 200여 년 간 곳곳에서 활동했으며, 상당수는 1117년까지 30여 차례에 걸쳐 고려에 망명했다.
■ 강역
현재의 지린 성 둔화 현 일대를 중심으로 동으로는 두만강 하류 일대, 서로는 후이파 강[輝發河] 유역에 이르는 지역을 근거로 해 나라를 일으켰던 발해는 제2대 무왕, 제3대 문왕대에 걸쳐 사방으로 영토를 크게 확장해 서로는 압록강 하류지대, 동으로는 연해주 남부 일대, 남으로는 원산만 이북에 이르는 지역을 영토로 했다. 제10대 선왕 때는 '방오천리'(方五千里)의 대국으로 성장했다. 전성기의 강역을 전하는 〈신당서 新唐書〉의 기록을 바탕으로 영역을 추정해보면 다음과 같다. ① 남계(南界):801년에 찬술된 가탐(賈耽)의 〈도리기 道里記〉에는 압록강 하구에서 130리 상류에 있는 박삭성(泊汋城)을 발해의 서남쪽 경계로 기술했다. 그러나 이미 8세기초부터 랴오허 강 이동에 대한 당의 지배력이 유명무실해졌고, 736년에는 당과 신라 사이에 신라의 북변이 대동강-원산만을 잇는 선으로 확정된 점 등을 고려하면, 그 남계는 신라의 북쪽 경계와 맞닿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② 서계(西界):〈도리기〉에는 요서의 영주에서 안동도호부의 치소인 랴오양[遼陽]을 거쳐 발해의 장령부(長嶺府)에 이르는 길이 예시되어 있어, 9세기초까지는 남으로 압록강 하류에서 북으로 눙안[農安]에 이르는 선이 발해의 서변인 것 같은 인상을 준다. 그러나 이미 8세기초에 랴오허 강 동쪽에 고구려유민의 자치국인 소고구려국이 세워져 9세기초까지 존속했고, 10세기초까지는 랴오허 강 유역의 지배권을 노린 거란의 남하 시도가 계속되었으나 발해에 의해 저지되고 있었으므로, 적어도 9세기 전반인 10대 선왕의 영토확장 때는 요동 지역이 발해의 영역에 편입되었던 것이 확실하다. ③ 동계(東界):〈신당서〉 발해전의 발해15부 가운데에는 연해주 니콜리스크 일대의 솔빈(率濱)과 올가 강 유역의 안변(安邊)이 모두 부(府)의 하나로 명시되고 있어 발해의 동변은 오늘날의 연해주 남부를 경계로 바다와 접했음을 알 수 있다. ④ 북계(北界):〈신당서〉에는 수대(隋代)의 말갈제부(靺鞨諸部) 가운데 싱카이 호 일대에 있었다는 불열부(拂涅府)와 우수리 강 이동의 월희부(越喜府), 삼성(三姓) 일대의 철리부(鐵利府)가 모두 발해15부의 하나로 표기되어 있다. 더욱이 10대 선왕 때는 헤이룽 강 하류지역의 흑수부(黑水府)도 그 영향력하에 들어왔다는 것으로 보아, 늦어도 9세기 전반에는 북계가 동류 쑹화 강[松花江]을 따라 헤이룽 강 하류에 이르는 선에 이르렀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헤이룽 강 하류 이북의 흑수말갈이 그 영역으로 편입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 사회구성
발해는 고구려인·말갈족이 주체가 되어 만주일대의 여러 종족을 합쳐 세운 다민족국가였다. 일본의 역사서인 〈유취국사 類聚國史〉에 의하면, 발해는 토인(土人)으로 불리는 소수의 고구려계가 지배계층의 주류를 이루었고 말갈계의 주민이 피지배층의 다수를 점한 나라였다. 실제로 일본에 내왕한 사신과 그 수행원 가운데 말갈계로 보이는 만주식 이름을 사용한 인물은 수행원 6명뿐이었으며 정사(正使)·부사(副使)는 모두 고구려계가 사용하던 한족(漢族) 성명을 썼음이 확인된다. 남송(南宋)의 홍호(洪皓)가 엮은 〈송막기문 松漠紀聞〉에서는 발해의 유력한 성(姓)으로 고(高)·장(張)·양(楊)·두(竇)·오(烏)·이(李) 등을 들고, "부곡(部曲)과 노비 및 성이 없는 자는 모두 주인을 따른다"고 하여, 고구려계 및 소수의 말갈족을 지배층으로 하고 다수의 말갈족 및 기타 종족을 피지배층으로 하는 복합민족 국가였음을 알려주고 있다. 성립기의 이러한 종족적·계층적 구별은 점차 극복되어나갔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멸망과 함께 다수의 말갈계는 다시금 고유의 부락별·부족별 생활방식으로 되돌아갔다. 이들은 후에 여진인(女眞人)의 주체가 되었다. 발해인은 거란·고려·송 등으로 흩어져 그들의 일부로 동화됨으로써 소멸되었다.
■ 행정제도
건국 당시의 대립기를 지나 당과의 평화관계를 수립한 후 고왕대부터 왕족·귀족의 자제들을 유학생으로 당에 보내 문물의 수용에 힘을 기울였다. 그결과 행정제도·도성건축·문화활동의 여러 측면에서 당의 영향을 받았다. 중앙관제인 3성6부(三省六部)·1대7시(一臺七寺)·1원1감(一院一監) 제도는 당의 제도를 나름의 필요에 따라 구성한 것이며, 지방제도인 5경15부62주 제도, 부-주-현의 지방장관에 도독(都督)·자사(刺史)·현승(縣丞)을 둔 것도 역시 당의 제도에 기초한 변형이다. 당의 6부에 해당하는 충·인·의·예·지·신(忠仁義禮智信)의 6부의 명칭에서도 알 수 있듯이, 관부의 주요기능과 구성 등에서는 기본적으로 당의 것을 따르되, 세부 운용에서는 필요에 따른 독자적인 방식을 썼다.
도표
3성 6부
도표
5경 15부
■ 산업경제
건국 초기부터 만주 동부지역 천연자원의 개발과 이용, 고구려 이래의 농업과 수공업의 발전, 주변국과의 대외교역 확대를 통한 국력증대에 힘썼다. 발해에서 산출되는 명품 가운데에는 위성(位城)의 철(鐵), 현주(顯州)의 포(布), 노주(盧州)의 벼, 용주(龍州)의 주(紬), 옥주(玉州)의 면(綿) 등이 있었다. 위성은 중경현덕부내 철주(鐵州)의 수현(首縣)으로 제철산업의 중심지 가운데 하나였다. 고구려의 발달된 기술을 이어받아 제철기술이 매우 높은 수준이었으므로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은 발해의 유민들을 요주(饒州)를 비롯한 거란의 주요 철 생산지에 집단 이주시켜 제철업에 종사시켰다. 현주는 중경현덕부에 속한 6주 가운데 수주(首州)로 두만강 하류지역에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발해가 후당(後唐)에 수출했다는 세포(細布)는 현주의 포였을 것으로 보이며, 발해 성립 이전 함경도지역에 있던 옥저(沃沮)의 특산인 맥포(貊布)도 이 현주의 포와 관련이 있는 듯하다. 벼로 유명한 노주도 중경현덕부 산하의 6주 가운데 하나로 하이란 강[海蘭河] 유역 평야지대에 있었던 것으로 믿어지고 있다. 이로 보아 중경현덕부에 속한 두만강 하류 일대는 벼·포·철 등이 모두 생산되는 경제의 중심지대였던 것 같다. 용주는 상경용천부에 소속된 주의 하나로 현재의 헤이룽장 성[黑龍江省] 닝안 현[寧安縣] 일대로 비정된다. 주(紬)는 면포(綿布)를 가리킨다. 옥주는 남경남해부의 소속주 가운데 하나이다. 옥주의 면은 동예(東濊)시대 이래의 양잠기술이 발해시대까지 계승되었음을 알려준다. 발해는 이와 같은 특산품들을 당·일본 등과의 교역물로 삼아 국부의 증대를 꾀했다. 대당 교역이 매우 활발해 공식적인 외교사절을 통한 교역이 총 132회에 달했으며, 산둥의 등주와 청주에는 발해 사신을 위한 발해관(渤海館)이 설치되어 교역 중계지로서의 기능을 겸하기도 했다. 관사무역(官私貿易)을 겸한 발해 사신의 빈번한 왕래는 대상국인 일본에 경제적 부담을 주어, 한때 일본은 대발해 교역의 제한을 시도하기도 했다. 신라도(新羅道)와 거란도(契丹道)를 이용한 대신라·거란 교역도 있었을 것이나 구체적인 내용은 전하지 않는다.
■ 문화
통일신라와 함께 높은 문화 수준을 자랑했던 발해의 문화는 나라의 영토를 상실하면서 대부분의 문화유산을 후세에 전할 수 없었다. 전하고 있는 것은 한문으로 씌어진 외교문서, 약간의 산문, 몇 편의 한시, 문왕의 딸 정효공주묘(貞孝公主墓)에서 발견된 정효공주와 정혜공주비문(貞惠公主碑文) 정도밖에는 별다른 문헌자료를 남기지 않아 역사뿐 아니라 문화 등을 이해하기 어렵다. 그것도 한국 문헌이 아닌 중국과 일본의 문헌에 주로 전해질 뿐, 한국측 문헌에는 관련 기록조차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발해의 시인 가운데 이름과 자품이 남아 있는 사람으로는 양태사(楊泰師)·왕효렴(王孝濂)·석인정(釋仁貞)·정소(貞素)·배정(裵頲) 등이 있다. 이들의 작품은 주로 일본에 사신으로 가서 지은 것들이다. 따라서 고향을 그리는 시와 연회석에서의 의례적인 화답사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그 가운데 보이는 참신하고 창의적인 시상의 전개는 발해 시인들의 높은 경지를 잘 보여준다. 이 작품들은 김육불(金毓黻)의 〈발해국지장편 渤海國志長編〉에 실려 있다. 한편 기록에는 나타나지 않으나 발해 역시 한문학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한자를 빌려 자국어를 기록하는 방식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강건하고 활달한 기풍의 고구려 문화를 계승한 위에 수준 높은 당 문화를 접합시킨 특유의 힘있고 세련된 문화를 유적과 유물들에서 찾아볼 수 있다. 상경이 있던 동경성(東京城) 유적의 발굴시 출토된 대형 석등과 치미(鴟尾), 귀면와(鬼面瓦), 순금제 허리띠 등은 발해 문화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 발해는 또한 당시 동아시아의 지배적 종교였던 불교를 국가적으로 받아들여 불교문화를 꽃피웠던 것으로 추측된다. 상경·동경 등 주요도시의 유적에서 여러 개의 절터가 발견되었고, 고구려 양식을 계승한 다수의 불상이 수습되었다. 또한 제3대 문왕의 존호는 불교적인 '대흥보력효감금륜경법대왕'(大興寶曆孝感金輪經法大王)이었으며, 대당 사절과 대일본 사절 가운데에는 승려들이 동행해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한편 상경유지(上京遺址)에서는 해독이 되지 않는 문자류가 새겨진 기와편이 다수 수습되었는데, 이것이 발해 문자였는지는 아직 확인되지 않고 있다.
발해사 연구는 문헌자료의 절대적 부족으로 인해 건국자·영역·사회구성과 같은 기초적인 분야부터 한계가 있다. 이승휴(李承休)가 〈제왕운기 帝王韻紀〉에서 대조영을 고구려의 유장(遺將)으로 단정하고 발해사를 고구려사의 연장으로 본 이래, 유득공(柳得恭)·정약용(丁若鏞)·한진서(韓鎭書) 등 역대 사가(史家)들이 한국사의 일부로 서술했다. 조선시대의 일부 성리학자와 실학자 중에는 발해사를 한국사에 포함시키는 것에 회의를 표명한 경우도 있으나, 이후의 대체적인 흐름은 고구려의 계승국으로 보려는 경향이 강했다. 근래에 이르러서는 유득공이 〈발해고 渤海考〉에서 제시했던 '남북국시대론'이 일반화되고 있다. 발해를 북국으로, 통일신라를 남국으로 설정하는 남북국시대론은 북한의 역사서에서는 수용되고 있으며, 남한의 주요역사서에서도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러나 일본 학계에서는 대조영을 말갈계의 인물로 보고, 주민의 다수가 말갈족임을 들어 발해를 만주인의 왕조로 본다. 이는 발해사를 한국사의 체계에서 분리시켜 남만주와 한반도 북부의 역사를 만주사로 정리하려 했던 만선사관(滿鮮史觀)의 영향 때문인데, 최근 일본의 일부 학자들은 이러한 시각에 대해 회의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발해 영토의 일부였던 연해주 남부를 차지한 소련에서는 발해가 문화면에서는 고구려·신라와 가까우나 지배세력은 속말말갈(粟末靺鞨)이었다고 하여 발해사를 자국의 지방사·소수민족사의 일부로 취급하려 하고 있다. 한편 옛 발해 영토의 대부분을 차지한 중국은 발해는 속말말갈이 주체가 되고 여타의 말갈족들과 읍루(邑婁)·부여(夫餘)·예맥(濊貊)·옥저 계통의 여러 종족, 고구려유민 등이 이에 합류해 세워진 나라로 보고 있다. 그리고 발해 멸망 후 주민의 대부분이 중국 각지로 옮겨가 한족(漢族)에 동화되었으므로 당나라 때의 지방정권이라는 것이 주된 시각이다. 이와 같이 발해사에 대한 인식은 남북한을 비롯한 관련 국가들 사이에 역사적·현실적 이해관계에 따라 큰 차이가 있다. 따라서 한국사로의 편입 여부를 비롯한 발해사와 관련되어 있는 문제들은 앞으로도 사료 및 유적·유물의 발굴성과에 따라 논란의 여지가 많다.→ 남북국시대
출처 : 영원이라는 이름의 무한공간
글쓴이 : 사랑고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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