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 한마당

2007년 노벨 생리 의학상

만년지기 우근 2007. 10. 12. 20:16

 

 

노벨 생리·의학상 마리오 카페치 화제의 ‘인생유전’

 

전쟁통에 엄마를 잃고 거리를 헤매던 굶주린 아이가 노벨상 수상자가 됐다. 올해 노벨 생리·의학상 공동수상자인 마리오 카페치 미 유타대학 교수(70)의 인생유전이 미국 사회에서 화제가 되고 있다.

카페치에게 평탄치 않은 시련이 닥친 것은 그가 세살배기였던 1941년. 이탈리아 도시 베로나에서 태어난 그는 어머니가 나치독일의 비밀경찰인 게슈타포에게 잡혀가는 것을 바라보기만 해야 했다. 미혼모이자 시인이었던 어머니는 파시즘에 저항했다는 죄목으로 독일 다차우 수용소에 끌려갔다. 미국인이었던 어머니 루시 램버그는 이탈리아 공군 장교와의 열애 끝에 그를 낳았다. 체포될 것을 예감한 어머니는 소지품을 팔아 은신중이었던 알프스 기슭의 한 시골농가에 아들의 양육을 부탁했다. 하지만 그 돈은 1년도 안돼 동이 났다.

전시에 궁핍한 농가에선 자기자식 부양하기도 힘에 겨웠던터라 카페치는 결국 거리로 내몰렸다. 이후 굶주림 속에 이 마을 저 마을을 전전했다. 고아원에 잠시 몸을 맡기기도 했다. 하지만 많은 시간 제 또래의 집없는 아이들과 함께 무리를 지어다니며 노점상의 음식을 훔쳤다. 영락없는 ‘꽃제비’가 된 셈이다.

거리를 떠돌던 카페치는 영양실조에 걸려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했다. 이탈리아 볼로냐의 한 병원에서 고열에 시달리면서도 하루 한 사발의 치커리차와 빵 부스러기로 연명해야 했다. 종전과 함께 다차우 수용소에서 풀려난 어머니는 백방으로 수소문했지만 아들을 찾아내는 데 1년이 더 걸렸다. 공교롭게 어머니가 그를 찾은 날은 카페치의 9세 생일날이었다. 어머니는 그를 로마로 데려가 6년 만에 처음으로 목욕을 시켰다. 어머니가 병원으로 찾아오던 날 가져온 작은 모자를 그는 아직도 간직하고 있다.

카페치의 인생에 전기가 된 것은 펜실베이니아에 살고 있던 외삼촌이 돈을 보내 미국으로 건너오면서부터다. 거리의 아이는 우등생으로 변모했다. 오하이오주 앤티옥 대학을 졸업한 뒤 하버드에서 생물리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하버드에서 그가 연구했던 실험실은 DNA의 공동발견자인 분자생물학제임스 왓슨 실험실이었다. 73년부터 유타대학 연구실에 청춘을 묻었다.

카페치는 올리버 스미시스 교수(82·노스캐롤라이나대), 마틴 에번스 교수(66·영국 카디프대)와 함께 인간의 질병 연구를 위해 유전자를 변형시킨 실험용 생주를 만들어낸 공로로 노벨상의 영광을 안았다. 연구과정이 순탄했던 건 아니다. 미 국립건강연구소(NIH)의 연구비지원을 받았지만 80년대엔 성공가능성이 없다는 이유로 한때 지원이 중단되기도 했다. 하지만 어린 시절의 길거리 생활 체험은 용수철 같은 탄력을 주었다. 그는 “어떠한 희망도 없었던 시절, 살아남겠다는 의지로 버텼던 어린시절의 쾌활함에 스스로 경탄하게 됐다”고 현지 언론 인터뷰에서 말했다. 카페치의 역정이 새삼 미국인을 감동시키는 것은 ‘2차대전’과 ‘나치독일의 수용소’ ‘미국은 기회의 땅’이라는 익숙한 키워드에 부합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는 수상 소감으로 “우선 좋은 아이디어가 있어야 하고, 그것을 구현시킬 수 있어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칠순 노학자의 마음엔 여전히 어린아이가 살고 있는 듯하다.

〈워싱턴|김진호특파원〉

- 대한민국 희망언론! 경향신문, 구독신청(http://smile.khan.co.kr) -

ⓒ 경향신문 & 경향닷컴(www.khan.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경향닷컴은 한국온라인신문협회(www.kona.or.kr)의 디지털뉴스이용규칙에 따른 저작권을 행사합니다.〉
[ 기사제공 ]  경향신문   |   경향신문 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