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한마당

문묘 대성전 공자님과 은행나무

만년지기 우근 2009. 6. 28. 16:50

 

 

 

서울 문묘 대성전은 성균관을 비롯해 각 고을에 향교가 있다. 

 

 

명륜당은 성균관 유생들의 교육을 했던 곳이다.

 

명륜당 앞에 있는 은행나무 두그루가 있다.

왼쪽 은행나무가 천연기념물 53호로 수령은 500년 이다.

윤탁선생님께서 심었다고 한다.

 

 

 

대성전에서 바라본 은행나무 신삼문 옆에 두그루가 서있다.

 

 

묘정비각이 보인다

 

 

소나무와 잣나무에 가려서 보이지 않지만 뒤를 자세히 보시면 은행나무가 서있다. 

송백 나는 이녀석들에게서 느끼는 걸 단편소설로 쓸 것이다.

 

 

대성전에서 보자면 우백호자락 이여서 그런지 이 은행나무에는 동굴이 파여져 있다.

 

 

 

안을 들여다보니 개가 새끼를 낳아 여기에서 기르고 있었다.

강아지들 지금은 다른곳에 옮겨져 있다.

 

문묘 대성전 공자님과 은행나무

                                                    허주 김  정  희  

 

문묘는 보물141호 사적143호로 태조7년 1398년 건립되었다.

조선 건립의 승유억불정책으로 문묘의 면적은 12,261평으로 대성전에는 공자님외 38인의 위패를 모신 유교 사당이다.

 

중요한건 우리나라 18현을 같이 모셨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18현은 누구일까.

나는 그게 가장 궁금했다.

아국 18현은  다음과 같다.

 

아국 18현 我國 18賢은 최치원 崔致遠 설총 薛總 정몽주 鄭夢周 안유 安裕 정여창 鄭汝昌 김굉필 金宏弼

                               이언적 李彦迪 조광조 趙光祖 김인후 金麟厚 이황 李滉 성혼 成渾 이이 李珥

                               조헌 趙憲 김장생 金長生 송시열 宋時熱 김집 金集 박세채 朴世采 송준길 宋浚吉 

 

6월1일 서울문묘를 가서 깜짝 놀란 건 바로 은행나무였다.

문묘에는 은행나무가 많이 있는데 명륜당앞 두그루와 대성전 앞 두그루는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만큼

그 위용이 대단하다고 말하고 싶다.

시간이 이렇게 빠르게 흐르고 있다.

내가 문묘에 와서 디카로 사진을 찍으면서 느낀 걸 글로 써야 하는데 벌써 한달이 흐르고

나는 명륜당과 대성전에 은행나무에 대해 가장 궁금했었다.

 

물론 은행나무만 있는 건 아니다.

오늘은 은행나무가 신삼문을 지키고 있는듯이 보인다.

대성전에서 보면 우측으로 보이는 은행나무는  조금 더 작다.

묘정비각 아래에 있는 은행나무가 문묘에서 가장 크게 보인다.

그러나 천연기념물은 명륜당 왼쪽에 있는 나무이다.

수령이 500년을 먹었으니 나는 은행나무를 보면서 문묘의 솟대라는 생각을 했다.

그러면 왜 이렇게 은행나무가 심어져 있을까?

공자님께서 은행나무를 좋아하셨다고 한다.

은행나무 아래에서 제자들을 가르치셨기에 공자님께서 좋아하셨던 은행나무를 사당에 심어 놓으셨다고 말씀하신다.

그 말을 들은 나는 이해가 간다.

어쩌면 은행나무에는 여름철에도 벌레가 생기지 않아서 그런건 아닐까?

여름 철에 가장 시원한 바람을 주는 나무로 당산 나무와 은행나무를 꼽는다고 한다.

바람이 불어오면 다른 나무보다 더 바람을 많이 일으킨다고 하시는데

나도 그 말에 수긍을 한다.

아국  18현을 적다보니 대성전 39위가 궁금하실 것이다.

 

오성,공문십철,송조육현은 다음과 같다.  

 

오성 五聖은 공자 孔子 안자 顔子 증자 曾子 자사자 子思子 맹자 孟子 를 말한다.

공문십철 孔門十哲은 민손 염경 염옹 재여 단목사 염구 중유 언언 복상 전손사

송조육현 宋朝六賢은 주돈이 정호 정이 소옹 장재 주희 

 

공자님은 인仁의 사상으로 유명하시기에 브리테니커에서 찾아 올려보았다.

 

공자 (중국 노 [魯] 사상가)  [孔子, K'ungtzu, 공구, 공부자, 중니]

병)Kongzi(웨)K'ungtzu(영)Confucius.

BC 551 노(魯)나라~BC 479 노나라.
중국 춘추시대의 교육자·철학자·정치사상가, 유교의 개조(開祖).
공자 /공자 동상, 제주향교 내

 

 

공부자(孔夫子)라고도 한다.
본명은 공구(孔丘). 자는 중니(仲尼). 그의 철학은 동아시아 전 문명권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
유교의 역사는 공자에서 시작된 것은 아니다.
부처는 불교의 창시자이고 예수는 그리스도교의 창시자이지만 공자는 엄밀히 말해 유교의 창시자가 아니다.
공자는 자기 자신을 '옛 것을 살려 새로운 것을 알게 하는'(溫故而知新) 전수자로 여겼다.
공자는 제사·천제(天祭)·장례 등의 의식들이 수세기 동안 존속해온 이유를 알아내고자 하다가
옛 것에 대한 애착을 느끼게 되었다.
그의 과거로의 여행은 근원에 대한 탐구로 공자는 그 근원은 소속감과 일체감에 대한
인간의 절실한 필요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느꼈다.
그는 문화의 축적된 힘을 믿었고, 전통적 방식이 활력을 잃었다고 해서 장래에 다시 되살아날 수 있는
잠재력마저 없어졌다고는 보지 않았다.
실제로 그의 역사관은 너무나 투철해서 자기 자신을 주(周)나라 때 꽃피웠던 문화적 가치와
사회적 규범이 존속되도록 전수시켜야 할 의무가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공자의 생애는 그가 끼친 엄청난 영향력에 비해 너무나 보잘것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한 중국인은 그의 생애가 '평범하고 현실적인 것'이었다고 표현했다.
그러나 공자 생애의 평범성과 현실성은 그의 인간성이 영감이나 계시에 의해 주어진 것이 아니라
자기수양과 자기 운명을 장악하려는 노력의 결과임을 드러내주는 것이다(→ 자기).
평범한 사람도 노력하면 위대한 성현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은 유교적 전통에 뿌리 깊은 것이다.
또 인간은 교화(敎化)와 발전이 가능하고 개인적·사회적 노력을 통해 완벽하게 될 수 있다는
주장은 유교의 핵심사상이다.
공자의 생애에 대해 알려진 사실은 많지 않지만 정확한 연대와 역사적 배경이 뒷받침되어 있다.
공자는 BC 551년(襄公 22) 주의 제후국인 나라에서 태어났다.
노나라는 주의 건국공신인 주공 단(旦)의 아들이 개국한 유서깊은 나라였다.
공자가 음력 8월 27일에 태어났다는 통설은 많은 역사가들이 의문을 제기하고 있으나,
양력 9월 28일은 여전히 동아시아에서 공자탄신일로 널리 봉축되고 있다.
타이완에서는 이날을 '스승의 날'로 지정하여 국정공휴일로 지키고 있다.
공자의 고향 취푸[曲阜]는 지금의 산둥 성[山東省]에 있는 마을로,
주대 문화의 전통의례와 전통음악의 보존지로 유명한 곳이었다.
공자의 조상은 귀족계급이었을 것으로 여겨지나,
공자가 태어났을 때 그의 가문은 영락한 평민에 지나지 않았다.
공자는 3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처음에는 어머니 안징재(顔徵在)에게 가르침을 받았고,
10대에 벌써 지칠 줄 모르는 향학열로 이름이 높았다.
그는 말년에 "나이 15세에 학문에 뜻을 두었다"(十有五而志于學)고 회상했다.
공자는 창고를 관장하는 위리(委吏), 나라의 가축을 기르는 승전리(乘田吏) 등의 말단관리로 근무하다가
19세에 가정환경이 비슷한 여인과 결혼했다.
공자의 스승이 누구였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공자는 특히 의례와 음악을 가르쳐줄 훌륭한 스승을 찾기 위해 고심했다.
공자는 6예(六藝)―예(禮)·악(樂)·사(射:활쏘기)·어(御:마차술)·서(書:서예)·수(數:수학)─에 능통하고
고전(古典), 특히 역사와 시(詩)에 밝았기 때문에 30대에 훌륭한 스승으로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다
 
공자는 모든 사람에게 교육을 개방하기를 원했고 교직을 직업으로,
즉 하나의 생활수단으로 확립시킨 첫번째 교사로 알려져 있다(→ 교수).
공자 이전의 시대에 귀족가문에서는 가정교사를 고용하여 특정분야에서 자식들의 교육을 담당시켰고,
정부관리들은 하급관리들에게 필요한 기술을 가르쳐주었다.
그러나 사회를 개조시키고 향상시킬 목적으로 일평생 배우고 가르치는 일에 전념한 사람은 공자가 처음이었다. 그는 모든 인간이 자기수양으로부터 덕을 볼 수 있다고 믿었다.
장래의 지도자들을 위한 인문과목 교육과정을 처음 실시했고,
모든 사람에게 교육의 문호를 개방했으며, 배움이란 지식을 얻기 위한 것일 뿐만 아니라
인격의 도야까지도 포함한다고 정의했다.
공자에게 있어서 교육의 일차적 기능은 군자(君子)를 훈련시키는 적절한 방법을 제공하는 것으로 끊임없는
자기향상과 지속적인 사회적 상호작용을 포함하는 하나의 과정이었다.
그는 배움이 '자기 자신을 위한 것' 즉, 배움의 목적은 자기발전과 자기실현이라고 역설하는 한편,
공직(公職)이 참교육의 자연스런 귀결이라고 생각했다.
공자는 속세에서 벼슬하고 싶어하는 자신의 야망을 비웃는,
학식있는 은자(隱者)들과는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었다.
속세에서 벗어나 '금수(禽獸)와 벗하며 살자'는 유혹을 뿌리쳤고,
세상에 속해 살면서 세상을 변모시키려고 노력했다.
수십 년 동안 정치에 적극적으로 가담하면서 정치라는 통로를 통해
인본주의 이상을 실현시키려고 애썼다(→ 정치철학).
공자는 40대말과 50대초에 이르러 중도(中都)의 장관으로 발탁되었고,
이어 노나라의 재판관이며 최고위직인 대사구(大司寇)가 되었다.
노나라의 군주 정공(定公)을 수행하여 참가한 노나라와 제나라 사이에 벌어진
평화회의에서 외교적 수완을 발휘하기도 했다.
그러나 공자의 정치적 생명은 그리 길지 못했다.
그가 왕에게 충성을 바치자, 당시의 노나라 세도가인 계손자(季孫子) 가(家)에서 견제해왔고,
또 그의 도덕적 엄정성 때문에 왕에게 환락의 즐거움만을 제공하던 왕의 측근들과도 잘 어울리지 못했다.
56세에 공자는 주위의 사람들이 자신의 정책을 지지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자신의 이상을 펼 수 있는 다른 나라를 찾아보기 위해 노나라를 떠났다.
 
공자의 정치적 좌절에도 불구하고 많은 제자들이 거의 12년에 이르는
천하철환(天下轍環)의 망명기간에 공자를 수행했다.
고결한 이상과 소명의식을 가진 사람이라는 공자의 명성은 널리 퍼져 나갔다.
국경을 관리하는 관원 하나는 "하늘은 선생님을 목탁(木鐸)으로 삼을 것이오"라고
공자에게 말했다(〈논어〉 八佾篇 24장).
실제로 공자는 자기 자신이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정의의 신념에 불타 꾸준히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모두 실행하려고 하는 행동적인 양심으로 널리 알려졌다.
67세에 고향으로 돌아와 제자들을 가르치며 저술과 편집에 몰두하면서 고전의 전통을 보존하는 일에 열중했다.
 
BC 479년 73세의 나이로 생을 마쳤다.
{사기}에 따르면 그의 제자 중 72명이 '6예'를 통달했고 제자로 자처하는 사람의 수가 3,000명을 넘었다고 한다.

 

은행나무 (식물)  [銀杏 ──, ginkgo] 

maidenhair tree라고도 함.
은행나무목(銀杏―目 Ginkgoales)에서 유일하게 살아 있는 대표적인 교목.
은행나무 /은행나무 열매
은행나무목은 은행나무과(銀杏―科 Ginkgoaceae)로만 이루어져 있는데
이 과는 고생대 이첩기(2억 8,600만~2억 4,500만 년 전)에 나타난 15속(屬) 정도로 이루어져 있다.
긴크고이테스속(Ginkgoites)과 바이에라속(Baiera)은 모두 멸종했는데,
현생하는 은행나무 잎과 비슷한 잎이 화석으로 남아 있다.
중국이 원산지인 은행나무를 종종 살아 있는 화석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사람이 심지 않고 야생으로 자라는 은행나무가 있는지 확실하지 않기 때문이다.
중국과 일본에서는 옛날부터 절의 뜰에 심어왔으나 지금은 곰팡이와 벌레에 강하고 아름다운 관상수로서
세계 여러 곳에서 귀중하게 쓰고 있다.
대부분의 겉씨식물과는 달리 도심의 탁한 대기 속에서도 살 수 있다.
은행나무는 생김새가 피라미드형으로 둥그런 기둥처럼 생긴 줄기에 가지가 많이 달리지 않으며,
키 30m, 지름 2.5m까지 자란다. 수피(樹皮)는 오래된 나무의 경우 회색빛이 돌고 골이 깊게 패어 있으며,
결이 코르크 같다.
목재는 엷은 색깔이며 가볍고 약하여 경제적 가치는 거의 없다.
잎은 부채 모양으로 공작고사리의 잎을 닮았으며 짧고 두꺼운 어린 가지에 달린다.
가죽질의 잎은 길이가 8㎝에 이르고 너비는 그 2배가 되기도 한다.
2개의 나란히맥이 긴 잎자루의 부착점에서 각 잎사귀 쪽으로 뻗어 잎가장자리로 가면서 반복되어 갈라져 있다.
대부분 잎은 가운데 있는 V자형의 새김을 중심으로 둘로 나누어져 있다.
잎은 여름에는 흐린 회녹색에서 황록색을 띠나 가을에는 황금색으로 바뀌며 늦가을까지
나무에 붙어 있다가 떨어진다.
수그루의 꽃가루를 만드는 소포자낭과 암그루의 밑씨는 서로 떨어져 달린다.
바람에 의해 수그루의 꽃가루가 암그루로 전해진다.
암그루의 쌍을 이루고 있는 밑씨가 수정되면 노란 빛을 띤 살구 모양의 씨로 되는데,
씨는 길이가 약 2.5㎝이며 악취가 나는 노란색의 껍질로 둘러싸여 있다.
은빛을 띠며('ginkgo'라는 영어 이름은 중국과 일본의 은색 견과, 은살구라는 말에서 유래) 구우면 맛이 있지만,
다 익은 다육질의 껍질은 매우 불쾌한 냄새를 풍겨 암그루는 정원에 심기에 적당하지 않다.
원기둥 모양의 것이나 성장이 잘 되는 것, 아름다운 낙엽을 가진 것 등 원하는
특성대로 여러 가지 변종들을 조경에 이용할 수 있다.
한국에서는 언제부터 심어왔는지 확실하지 않은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진
경기도 용문사에 있는 은행나무의 나이가 1,100년이 넘는 것으로 보아 고려시대 이전에
승려들이 중국에서 씨를 가져와 절 근처에 심은 것이 전국으로 퍼진 것으로 추정된다.
용문사의 은행나무가 천연기념물 제30호로 지정된 것을 비롯하여
19그루의 은행나무가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다.
은행나무는 불에 잘 타지 않고, 병충해에 강해 오래 살며, 흔히 정자나무로 많이 심고 있다.
싹이 튼 지 20년 이상이 지나야 열매를 맺기 시작하는데,
씨를 심어 손자를 볼 나이에 열매를 얻을 수 있다고 하여 공손수(公孫樹)라고도 부른다.
가을에 껍질 안에 들어 있는 씨를 까서 구워먹거나 여러 요리의 재료로 쓰이기도 한다.
껍질을 벗겨 말린 씨를 백과(百果)라고 하는데, 폐와 위를 깨끗하게 해주며, 진해·거담에 효과가 있다.
씨를 둘러싸고 있는 물렁물렁한 겉껍질은 불쾌한 냄새가 나며 피부 염증을 일으키기도 하므로 주의해야 한다.
잎에는 여러 가지 화합물이 들어 있는데, 특히 방충작용을 하는 것으로 알려진 부틸산이 있어
잎을 책 속에 넣어두면 책에 좀이 먹지 않으며, 몇몇 플라보노이드계(系) 물질은
사람의 혈액순환을 도와주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은행나무목에 속하는 화석식물이 여러 곳에서 20여 종류가 발견되고 있다.
출처: 브리테니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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