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한마당

서울 문묘

만년지기 우근 2009. 6. 10. 17:57

 

 

 

 

 

 

서울 문묘

                        허주 김  정  희

 

종로구청에서 핸드폰으로 메세지가 왔다.

문화체육과로 배치되었다고 한다.

6월1일 가서보니 문묘라고 말씀하셨다.

그래? 성균관에 있는 문묘라고 하면 가보자.

우리나라가 다시 일어서려면 성균관이 중요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성균관대를 지나치면서도 단 한번도 문묘는 가보지 못했어도 많은 궁금증이 났다.

 

구청선생님앞에 놓여진 서울문묘 실측보고서를 디카에 담으면서 여기에 많은 소중한 이야기들이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상,중,하로 되어진 책은 나를 문묘로 보내고 있었다.

유림회관을 지나치면서도 나는 항상 외할아버지 묘비를 써주신 관장님과도 인사를 나누워야 한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그래 인생이란 건 어떻게 변할지 아무도 모른다.

그리고 시간이 나에게 주어졌다면 어느곳에서든지 최선을 다해보자.

나는 아직도 문묘를 다 파악 하지 못했다.

 

내가 지금까지 느낀 문묘는 적어도 중요한 문화재이며 우리 국민들이 대성전을 보면서

21세기를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고 본다.

우리나라가 언제 어떻게 되어 가는지 알아야 한다면 나는 문묘에서 한번 더 나라란 무엇인지 느껴야 한다.

역사를 알아야 미래도 잘 살아가는 것 아닐까?

 

나는 문묘에서 천부경,삼일신고,참전계경을 소리내어 정독하며 읽고 있다.

소도경전이라고도 한다.

수산나수녀님께서 주신 책을 하루도 빠지지 않고 천천히 읽어본다.

그리고 나를 반성하고 있다.

다시 다시 일어나야 한다면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무엇으로 살아가야 잘 살았다고 할 수 있는가.

가만 가만 내 자신부터 점검해보고 있다.

이 시간이 정말 소중한 시간이였다고 말할 시간이 오리라 생각하면서 사랑 하나 하늘로 보낸다.

 

 

 

 

 

문묘 (유교 사당)  [文廟]

공자(孔子)를 받드는 묘우(廟宇).

문묘 대성전 /대성전 전경(1601 중건), 보물 ...

안자(顔子)·증자(曾子)·자사(子思)·맹자(孟子)를 배향하고 공문10철(孔門十哲) 및

송조6현(宋朝六賢)과 신라·고려·조선 시대의 명현(名賢) 18현을 종사(從祀)했다.

중앙의 성균관과 지방의 향교에 설치되어 있다.

 

우리나라 문묘의 시작은 신라시대인 714년(성덕왕 13)에 김수충(金守忠)이

당(唐)에서 공자와 10철, 72제자의 화상(畵像)을 가지고 돌아와 왕명에 의해

국학(國學)에 두면서 비롯되었다.

조선 말기에 이르러 공자 이하 133위를 모시게 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우리나라 명현 18위를 동무(東廡)·서무(西廡)에 두었으나,

대한민국이 건국된 이후 1949년에 동무와 서무에 종사한 중국 명현의 위판을

매안(埋安:神主를 땅에 묻는 일)하고 우리나라 명현 18위를 대성전으로 승당(陞堂)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문묘는 대성전(大成殿)을 정전(正殿)으로 하고 아래에 동무·서무·제기고(祭器庫)·묘정비각(廟庭碑閣)·

신삼문(神三門)·동삼문(東三門)·동서협문(東西夾門)·소문(小門)·수복청(守僕廳)·전사청(典祀廳)·

포주(泡廚)·악기고(樂器庫)·차장고(遮帳庫)·악생청(樂生廳)·향관청(享官廳)·

동서월랑(東西月廊)·수자간(水刺間) 등으로 되어 있다.

이는 중앙문묘인 대설위(大設位)의 제도로, 각 지방 향교의 문묘는 고을의 대소에 따라

중설위(中設位)와 소설위(小設位)로 구분되어 조금씩 다르다.

현재의 성균관 문묘는 1398년(태조 7)에 완성되었다.

그후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1601년(선조 34)에 중건하고 몇 차례의 개수를 거쳤다. 

출처: 브리테니커 

 

 

문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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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묘(文廟)는 공자(孔子)의 위패(位牌)를 모신 사당(祀堂)을 부르는 말이다. 다른 말로 선사묘(先師廟)·성묘(聖廟)·공자묘(孔子廟) 등으로 부른다.

[편집] 문묘의 한국 전래

이것이 설립되기까지의 과정과 설립 이후 보존의 경과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신라 성덕왕 16년에 당나라 조정에 들어갔던 왕자 김수충(金守忠)이 귀국하여 바친 공자·10철·72제자의 화상을 국학에 안치시켰다.
  2. 고려 성종 2년(983)에 박사 임모성(壬老成)이 송(宋)에서 돌아와 바친 <태묘당도(太廟堂圖)>·<사직당도(社稷堂圖)>와 그 기록, <문성왕묘도(文聖王廟圖)>·<제기도(祭器圖)>·<72현찬기(七二賢贊記)> 등 도서를 국자감에 안치시켰다.
  3. 현종 4년(1013)에는 최치원(崔致遠)을, 13년에는 설총(薛聰)을 각각 추봉하여 종사(從祀)케 하였다.
  4. 안향(安珦)이 문묘의 황폐를 개탄하여 국학 대성전(大成殿)을 신축하고 박사 김문정(金文鼎)을 원나라에 보내어 공자와 70제자의 화상 및 제기·악기·경서 등을 가져와 비치시켰다.
  5. 조선 태조 7년(1398)에 한양(漢陽)에 문묘를 낙성시켰고, 연산군 때 수난을 겪었다가 중종(中宗) 때 복구 개수되었다. 이때부터는 고려의 최충(崔沖)·안향(安珦)·정몽주 등 많은 선유(先儒)가 종사되어 현재는 공자·4성·10철·송조(宋朝) 6현·공자의 70제자, 한·중(韓·中) 양국의 111위가 배향되기에 이르렀다.
  6. 이 문묘종사(文廟從祀)는 학통(學統)·당파·정치정세 등의 혼란으로 유학자들간에 때때로 큰 분쟁을 일으켜 중종 12년에는 정몽주 종사문제, 광해군·인조년간의 5현(五賢) 종사문제, 숙종 때의 이이·성혼(成渾) 출학(黜學)문제, 영조 때의 송시열·송준길(宋俊吉)·박세채(朴世采) 등의 종사문제 등이 그 예이고, 정세에 따라 위차(位次) 무가 바뀌는 수도 있었다.

[편집] 조선의 문묘

조선에서는 문묘를 성균관에서 관장하였다. 성균관의 이런 건물들을 묘우(廟宇)라고 한다.

묘우의 주요 건물은 대성전(大成殿)으로서 좌우에 동무·서무라는 부속 행랑을 두어 예배 대상자를 봉안한다. 그리고 향사때의 헌관과 집사(執事)들의 재계소(齋戒所)이자 향축(香祝)을 봉안하기 위한 곳으로

향관청(享官廳)이 있다.

 

문묘의 예배 대상자와 배향 순위는 먼저 <대성지성문선왕(大成至聖文宣王)[1]>을 정위(正位)로

남쪽을 바라보게 하고, 그 앞에 안자(顔子)·증자(曾子)·자사(子思) 및 맹자(孟子)의 4성위를 동서로

둘씩 나누어 두고 공문 10철(孔門十哲)과 송조 6현(宋朝 六賢)을 문선왕의 좌우로 나누어 종향(從享)한다.

그리고 동·서무 양쪽 행랑에는 공문 72제자를 비롯한 중국의 명현 90여 위와

우리나라의 명현들을 종사(從祀)한다.

 

우리나라의 명현으로서 봉안된 순위는 고종 때까지 합하여 최치원(崔致遠)·설총(薛聰)·안유(安裕:安珦)·

정몽주(鄭夢周)·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조광조(趙光祖)·이언적(李彦迪)·이황(李滉)·이이(李珥)·

성혼(成渾)·김장생(金長生)·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박세채(朴世采)·김인후(金麟厚)·조헌(趙憲)·

김집(金集) 등 19명이 종사되었다

(이들 종사된 명현들은 시류에 따라서 點享되거나 復享이 되기도 하였는데

반드시 중국의 예와 일치하지는 않았다).

 

향사의 일자는 중춘(仲春)[2]과 중추(仲秋)[3]로 나누어 중정일(中丁日)[4]을 잡아 석전일(釋奠日)로

정하였으며,[5]. 그 밖에 서원에서 춘추 계월(季月)[6]의 상정일(上丁日)[7]이나 중정일로 정하기로 하였다.

다만 서원의 향사일은 성균관·향교의 석전일과 겹치지 않도록 조절하였다.

그리고 향사일이 국기(國忌)와 상치되면 그 다음의 정일로 잡았고 국상(國喪)이 나서

인산(因山)이 마쳐지지 않으면 신위(神位)에 고유(告由)하고 향사를 행하지 않았다.

또한 삭망분향일(朔望焚香日)이라 하여 매월 초하룻날과 보름날에 성균관의 대사성(大司成)·관관(館官)·

유생들이 문묘에 나아가 분향의식을 올리는 행사일이 있었다.

이 밖에 공자탄강일(孔子誕降日)[8]에 올리는 향사는 가장 컸으며,

왕이나 세자가 직접 향사에 참례하는 친림석전(親臨釋奠)·친림작헌·왕세자석전 등이 있고

고유제(告由祭)·위안제(慰安祭)가 있다.

 

문묘는 성균관 대사성을 헌관으로 초헌관·아헌관·종헌관과 축·찬자(贊者)·알자(謁者)·찬인(贊引)·사존(司尊)·

봉향(奉香)·봉작(奉爵)·전작(奠爵) 등의 여러 집사들이 선임되어 향사 3일 전에 재계(齋戒)에 들어간다.

제복을 착용하고 제물을 차린 뒤 전폐례(奠幣禮)·초헌례·아헌례·종헌례·음복례(飮福禮) 및

망예례의 단계로 진행한다.

서원으로 내려오면 더욱 간략하지만 대동소이하다.

의식이 끝나면 음희례(飮禧禮)를 하고 강론함이 보통이다.

 

 

 

 

 

 

 

내가 희망근로사업으로 6개월 동안 서울문묘를 나름대로 알려보려고 한다.

명륜당에서 열리는 전통혼례도 나에게는 많은 감동을 주었다.

우리가 세계에 무엇을 알릴것인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우리것을 알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세계로 세계로 하지만 나는 문묘에서 세계를 보았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우리문화를 보려고 세계사람들이 온다는 걸 나는 잘 알고 있기에

오늘은 문묘중에서 대성전만 썼다.

나도 잘 알고 나서 쓰려고 한다.

하지만 다른 생각들도 있다.

하루 하루 달라져가는 자연에게 감동 받으면서 또 우리문화를 알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알았다.

그분들이 나에게는 삶의 철학과 인생을 살아가는 가치를 남겨주고 있다.

잔잔하게 흐르는 항상 흐르는 물처럼 삶을 살아야 한다는 걸 자연에서 배운다.

 

어제는 없다.

늘 그리고 항상 오늘만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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