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 한마당

훈민정음 한글

만년지기 우근 2007. 9. 29. 01:11

 

 

 

 

 

 

 

한글 (문자) 사전적 의미
한국어를 적는 데 쓰이는 한국 고유의 문자.
개요
 
 
훈민정음 /〈훈민정음〉 언해본의 한글 모양, ...
 
 
1443년(세종 25) 음력 12월에 28자가 창제되어 1446년(세종 28) 음력 9월에 훈민정음(訓民正音)이라는 이름으로
반포되었다.
 
현재의 한글은 그중 4글자가 소멸되어 24자가 쓰이고 있다.
한글창제의 동기
 
세종의 주도하에 집현전 학자들이 중심이 되어 만든 한글의 창제동기는 〈훈민정음〉의 서문에 잘 나타나 있다.
첫째, 우리말이 중국말과 다른 데도 중국글자를 쓰므로 불편한 점이 많아 우리말에 맞는 새 글자를 만든다는 것인데, 여기에는 세종의 강한 민족자주정신의 나타나 있다.
둘째, 어리석은 백성이 쉽게 글자를 배워 문자생활을 편하게 하기 위해 만든다고 했으니
세종의 민족자주정신과 민본주의를 읽을 수 있다.
한글의 원리
 
한글의 제정을 위해 15세기 조선의 언어학자들은 우리말의 닿소리를 그 나는 자리에 따라
어금닛소리·혓소리·입술소리·잇소리·목소리의 5가지로 나누었다.
그들은 이 5가지 소리에서 각각 대표될 만한 소리를 하나씩 가려냈다.
어금닛소리에서는 /k/, 혓소리에서는 /n/, 입술소리에서는 /m/, 잇소리에서는 /s/,
목소리에서는 /(소리없음)/(그들은 소리없는 첫소리·끝소리 자리에도 소리의 바탕이 있음을 인정하고 있었음)을
가려내고, 그 소리들을 낼 때의 소리(내는) 기관의 모양을 본떠서 그에 해당하는 글자를 만들었다.
어금닛소리의 /k/는 혓바닥의 뒤쪽을 여린입천장에 올려붙여 내는 소리이므로 이 경우의 혀의 모양을
직선으로 그려 'ㄱ' 자를 만들었다.
혓소리의 /n/는 혀끝을 윗잇몸에 붙여 내는 소리이므로 그 혀의 모양을 직선으로 그려 'ㄴ'자를 만들었다.
입술소리의 /m/는 입술을 닫고 내므로 입술의 모양을 그려 'ㅁ'자를 만들었다.
잇소리의 /s/는 혀끝을 갈아서 나오는 공기의 흐름이 윗니 끝을 스쳐서 나는 소리이므로 이의
줄을 본떠서 'ㅅ'자를 만들었다.
 
목소리의 하나로 본 /(소리없음)/은 목구멍의 둥근 모양을 그려서 'ㅇ'자를 만들었다.
그리고 나머지 글자들은 그 소리나는 힘에 따라 이 다섯 글자에 각각 획을 하나씩 더해서 만들었다.
이 원리에서 벗어난 것은 //, △/z/, ㄹ/l/인데, ''이 ㄱ의 제자원리를 따르지 않고
ㅇ을 따른 것은 //에 목소리 바탕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고, '△, ㄹ'은 각각 'ㅅ, ㄴ'을 따르되,
내는 힘에 따라 획을 더하는 원리는 따르지 않았다.
 
그러고 'ㅂ, ㅍ'은 ㅁ에 획을 하나씩 더하는 원칙에 따르지 않았는데,
그것은 ㅁ자의 안에 획을 더하면 '曰, 目'과 같이 한자와 같아지고,
글자의 밖에 획을 더하면 ', '처럼 되어 한 글자로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닿소리를 낼 때는 소리(내는) 기관 가운데 능동적으로 잘 움직이는 혀나 아랫입술이
그와 맞보고 있는 자리에 가 붙거나, 아니면 아주 가까이 다가가기 때문에
소리기관의 움직임을 비교적 잘 알 수 있다.
그래서 닿소리글자는 소리기관의 모습을 본떠서 만들었다.
그러나 홀소리는 그렇지 않다.
 
홀소리를 낼 때 혀는 입 안의 가운데에서 움직이고 그 곡선의 모습에 따라 여러 홀소리가 나누어지기 때문에,
그 혀의 움직이는 모습을 정확하게 그려내기가 어렵다.
여기에 당시의 언어학자들은 홀소리글자를 만드는 어려움을 느꼈다.
그래서 홀소리글자의 제자원리를 닿소리글자와는 전혀 다른 데에서 구했다.
 
홀소리를 그 소리의 인상에 따라 혀를 오그리고 깊은 인상을 주는 소리인 /^, o, a/(양성),
혀를 조금 오그리고 깊지도 얕지도 않은 인상을 주는 소리인 /?, u, ?/(음성),
혀를 펴고 얕은 인상을 주는 소리인 /i/(중성)으로 나누었다.
 
이 3가지 소리 가운데 양에서는 /^/, 음에서는 /?/, 중성에서는 /i/를 대표로 뽑고,
이 세 소리를 적는 글자를 각각 하늘·땅·사람의 모양을 본떠서 만들었다.
 
/^/는 하늘의 둥근 모양을 본떠서 '·'로, /i/는 땅의 평평한 모양을 본떠서 'ㅡ'로, /i/는
사람이 서 있는 모양을 본떠 'ㅣ'로 적었다.
혀의 모습이나 소리의 인상에 따라 '·, ㅡ, ㅣ'를 조합하되, 양성과 음성의 대립을 고려하여
양성은 위·오른쪽에, 음성은 아래·왼쪽에 점을 더했으며, 이 소리 앞에 'ㅣ'가 앞서서 나오는 때는
각각 점을 하나씩 더하도록 했다.
한글의 여러 이름
 
한글의 이름은 경우에 따라 다르게 불려져왔다.
① 훈민정음 : 한글이 만들어졌을 때의 공식적인 이름은 '훈민정음'으로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라는 뜻이다.
② 정음(正音) : '훈민정음'을 줄여 '정음'이라고 일컫기도 했다.
③ 언문(諺文) : 한문에 대해서 우리 토박이 말을 적는 글자란 뜻으로 쓰였다.
④ 언서(諺書) : 언문을 '언서'라고 하기도 했으니, 이것은 한자를 '진서'(眞書)라고 한 것에 대립한 말이다.
⑤ 반절(半切) : 중국 음운학의 반절법에서 한 글자의 소리를 나타내기 위해서는 그 소리를
    성모(초성)와 운모(중성+종성)로 양분하는 방법을 쓰므로, 한글이 그와 비슷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⑥ 암클 : 부녀자들이나 쓰는 글이란 뜻으로 낮추어 부른 이름이다.
⑦ 국문 : 19세기말에 민족주의 정신의 대두와 더불어 쓰이던 말이다.
⑧ 한글 : 1907년부터 주시경(周時經)은 '하기국어강습소'를 운영하기 시작해서
    1908년에는 '국어연구학회'(한글학회의 전신)를 창립했다.
    1911년에는 '국어'란 말을 쓰지 못하게 되자 학회의 이름을 '배달말글 ?음'이라고 했다가
    1913년에는 다시 '한글모'로 바꾸었으며, 1927년에 기관지인 〈한글〉을 펴내기 시작하면서
    이 말이 널리 쓰이게 되었다. '한'은 '하나' 또는 '큰'의 뜻이니, 한국의 글자에 대해 권위를 붙여준 이름으로,
    '정음'이란 이름과 그 정신이 서로 통한다.
한글의 소리
 
지금 쓰이고 있는 한글의 기본글자의 수는 24자이며, 이것으로써 적을 수 없는 소리는 2개 이상의
기본글자를 어울러서 쓰는데, 그 이름과 소리는 다음과 같다.
도표
 
한글의 이름과 소리

한글과 민족문화
 
한글이 만들어지기 이전에 한국사람은 제 말을 중국글자를 빌려 쓸 수밖에 없었는데,
이 방법은 매우 어색하고 복잡해서 〈훈민정음〉 끝에 붙인 정인지의 글처럼 '막혀 잘 통하지 않고,
말을 적는 데 있어서는 만에 하나도 제대로 통달하지를 못'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한국말을 바르게, 반듯이, 옳게 적을 수 있는 한글이 만들어지고 난 뒤로는
한국사람은 제 말을 자유로이 적을 수 있게 되었을 뿐 아니라,
한문에 억눌렸던 한국의 민족문화가 활발하게 발전할 밑거름을 얻게 되었던 것이다.
■ 참된 한국문학의 출발
 
한글 창제 이전에도 한국에는 문학활동이 있었다.
그러나 이것들은 한문으로 되었거나, 한자를 빌어 한국말을 적어서
그때의 소리로 돌이키기 어려운 작품들이므로, '참된 한국문학작품'으로 보기는 어렵다.
한글이 만들어지고 난 뒤에 〈용비어천가〉(1445)·〈석보상절〉(1447)·〈월인천강지곡〉(1449)과 같은
작품이 쏟아져나오기 시작했으니, 이것들은 참된 한국문학활동의 시작으로 볼 수 있다.
■ 한글맞춤법의 효시
 
〈석보상절〉의 맞춤법은 원칙적으로 여덟 받침(ㄱ, ㄴ, ㄷ, ㄹ, ㅁ, ㅂ, ㅅ, )을 쓴 '소리대로 적기'이다.
그러나 〈용비어천가〉에서는 여덟 받침 이외의 'ㅈ, ㅊ, ㅍ'과 같은 받침이 쓰여서,
형태소의 원형을 지키는 지금 맞춤법의 싹이 보인다. 그러나 형태소를 나누어적는 데에는 이르지 못했는데,
〈월인천강지곡〉에 있어서는 원형 지키기와 형태소 나누어적기가 다 지켜져 지금 맞춤법에 한걸음 더 가깝다.
완성되지는 못했으나 지금의 맞춤법은 〈월인천강지곡〉에서 그 싹이 텄던 것이다.
■ 한문책의 번역
 
15세기 후반에는 문학작품이 나타나기도 했으나 한문책을 옮기는 일에 더 큰 힘을 기울였다.
1460년대에는 많은 불교 경전이 번역되어 나오고, 15세기말에는 민중교화를 위한 수신서가 옮겨졌다.
또 1481년에는 중국의 시인 두보의 작품이 한글로 옮겨졌다.
16세기에는 유교의 경서와 수신서, 농업·양잠에 관한 한문책들이 한글로 옮겨졌다.
■ 옛 노래의 정착
 
1493년에 찬정된 〈악학궤범〉에는 〈동동〉·〈정읍사〉·〈정과정〉·〈처용가〉 등 이전의
노래가 한글로 정착되었다.
■ 한자 소리 적기
 
한자의 소리는 뜻글자인 한자로써 풀이해야 했기 때문에 정확하게 설명하기는 힘들었다.
그러나 한글은 간단하게 그 소리를 적어낼 수 있다.
〈동국정운 東國正韻〉(1447)은 조선 한자음을 한글로 적은 것이고,
〈홍무정운 역훈 洪武正韻譯訓〉(1455)은 중국 소리를 한글로 적은 것이다.
1527년 최세진은 〈훈몽자회 訓蒙字會〉를 지어 한자의 뜻과 새김을 한글로 적었고,
〈사성통해 四聲通解〉(1517)에서는 당시의 중국소리의 체계를 세웠다.
■ 한글문학의 발전
 
그 이전에도 가사문학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한글의 창제는 가사문학의 발달을 부추겨
16세기에 이르러 송강 정철의 가사문학은 그 절정에 달했고, 시조문학도 뒤이어 발달되었다.
 
17세기 이후에는 한글소설이 발달하여 소설이 한글문화의 중심을 차지하게 되었다.
〈홍길동전〉·〈춘향전〉·〈심청전〉 따위는 당시에 나온 한글소설의 걸작들이다.
이밖에도 〈계축일기〉·〈한중록〉·〈의유당일기〉 등 한글수필·일기문학이 발달하게 되었다.
許雄 글
 
 
한글의 근·현대사
 
한글이 본격적으로 우리의 어문생활에 등장한 것은 1894년(고종 31)의 갑오개혁을 기점으로 한다.
즉 1894년 11월 칙령 제1호 공문식(公文式)이 공포되어 기존의 한문 대신 국문을 공문으로 했는데,
제14조에는 이런 조치가 지나치게 혁신적이고, 이상적임을 인식했던지 국문을 본으로 하고 한문 번역
또는 국한문을 덧붙인다고 규정했다.
 
물론 이 조치는 우려했던 대로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고 결국 국한문이 주종이 되는 타협이 이루어졌지만
이전까지 공문서에 쓰이지 못했던 한글이 한자와 함께 사용됨으로써 일시에 한글의 지위를 격상시켰고
국민들에게 한글에 대한 인식을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1895년의 소학교 국어교과서 〈소학독본〉이 국한문으로 표기되었고 갑오개혁과 함께 순한문으로 창간되었던
〈관보〉는 이듬해에 국한문으로 바뀌었다.
1895년 유길준은 〈서유견문 西遊見聞〉을 역시 국한문으로 펴냈고,
다음해 4월 7일에 독립협회에서 창간한 〈독립신문〉은 순한글에 한글 띄어쓰기를 시행했다.
한편 당시의 문자생활은 양반층의 한문, 평민 상층의 이두, 평민 하층의 국한문, 서민층의 국문 등으로 혼란스러웠고, 근대의 사상에 눈뜬 일부 식자들은 국어의 근대화를 위한 언문일치(言文一致)를 주장하고 있었다.
 
거기에 우선 국어 규범을 통일하기 위해 1905년 7월에 지석영(池錫永)의 6개항으로 된 맞춤법 통일안인
〈신정국문 新訂國文〉이 공식으로 공포되었으나 사회적으로 반대의견이 많아 시행되지 못하자,
이를 심의하기 위해 1907년 7월에는 최초의 국어연구기관인 국문연구소가 창설되었다.
1909년 이 연구소는 10제(題)에 걸친 당면 정책방안을 의결하여 보고했으나
당시의 정치적 상황으로 흐지부지되고 한글은 일제강점기의 수난기로 들어갔다.
대한제국을 합병한 일본은 1911년 8월 '조선교육령'을 공포하고 이어 우리 민족문화에 대한 조사에 나서,
1911년 〈조선어 사전〉을 편찬하기 시작했으며(1920 출판),
1912년에는 '보통학교용 언문철자법'을 제정했다.
한편 주시경에 의해 창립된 '국어연구학회'는 일제의 탄압으로 해체되었다가
1921년 '조선어연구회'로 재건되어 뒤에 '조선어학회'(1931)·'한글학회'(1949) 등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조선어학회는 1933년 '한글맞춤법통일안', 1936년 '사정한 조선어 표준말 모음', 1940년 '외래어 표기법',
1942년 〈조선말큰사전〉의 출판 착수 등의 사업을 통해 우리 국어 교육의 기초를 마련했으며,
잡지 〈한글〉(1932)·〈정음〉(1934) 등으로 국어 계몽에 이바지했다.
 
그러나 1937년 7월 중일전쟁을 도발한 일본은 한민족 말살정책을 노골적으로 드러내,
1938년 4월에는 조선어과 폐지와 조선어 금지 및 일본어 상용을 강요했다.
1945년 8·15해방으로 한글은 다시 소생했지만 국어 교원의 부족, 일본어의 범람,
국어 규범의 부재 등으로 혼란스러웠다.
이에 조선어학회에서는 1946년 '맞춤법통일안'과 〈표준말 모음〉을,
문교부에서는 '외래어 표기법'을 내놓았으나 이렇다할 성과를 보지 못하고 6·25전쟁이 터졌다.
 
1954년에는 대통령의 유시에 따라 한글간소화와 국문 전용을 정책으로 결정했으나
이의 시행이 강력한 반대에 밀려 국한문 혼용이 지속되었다(→한글파동).
그후 문교부에서 한자어 추방정책을 폈으나 일반에서 수용되지 못했고,
1963년 문교부의 '학교문법통일안'도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1970년 시행된 교과서의 한글전용은 2년 만인 1972년 원상 복귀되어
기초한자 1,800자가 중·고등학교에서 다시 학습되었다.
1980년대는 1959년 개정된 '한글의 로마자 표기법'을 외국인 위주의 표음주의로 전환해
'국어의 로마자 표기법'으로 개정했고(1983), 1958년의 '로마자의 한글화 표기법'을
현실음에 접근하는 방향으로 나아가 '외래어 표기법'으로 개정했으며(1985) 이로써
어문생활에서 나타나는 괴리를 좁히게 되었다.
 
1933년 공표 이후 몇 번의 수정을 거쳤으나 사문화되거나 재사정이 필요하게 된
'한글맞춤법'은 1979년 문교부, 1981년 학술원, 1985년 국어연구소 등으로 이관되면서 심의가 진행되어,
1988년 1월 '표준어 규정'과 함께 '한글맞춤법'이 고시되었고,
1989년 3월 1일부터 시행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한글의 특성
 
표음문자로서 한글은 여러 특성을 갖고 있다.
① 우선 한글은 한국어의 음소를 적는 데 가장 합리적인 체제를 갖고 있다.
    한글은 음절을 닿소리와 홀소리로 나누고, 받침은 닿소리가 다시 쓰이게 함으로써
    가장 경제적인 문자로 구성되어 있다.
② 알타이어계 언어의 공통 특질인 모음조화를 잘 반영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③ 보편적인 음성기호로 사용해도 충분할 만큼 조직적이며 거의 무한대에 가까운 표음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
④ 음절구성의 원리가 간단하여 배우기가 쉬우며, 영어나 프랑스어처럼 자리에 따라
    문자와 소리가 다른 경우가 거의 없다.
이렇게 다양한 특성을 가진 한글은 음성학적인 변별요소를 가장 함축적으로 문자의 형태에 반영하고 있고,
문자의 구성요소 역시 체계적으로 이루어져 세계 언어학자들 사이에서 찬탄의 대상이 되고 있다.
더구나 어느 한 시기에 창제되어 일시에 반포·사용되고, 이후 약 600년 가까이 지속적으로 사용되는
문자는 세계에서 오직 한글밖에 없다.
한글의 현실과 과제
 
한글의 많은 장점에도 불구하고 서양식 문명과 도구의 발달에 따른 한글의 기계화에는 많은 장애가 노정되어 있다.
타자기와 컴퓨터의 발달은 필연적으로 한글의 입력에 음소별 구분을 요구하게 되었다.
또한 모아쓰기 형태인 한글은 인쇄매체에 사용되는 글꼴의 수가 많아야 하므로
한글 글꼴을 개발하는 데 장애가 되고 있다.
한글이 소리글자이면서도 모아쓰기의 형태를 갖고 있는 것은 이점에서 가장 큰 문제점으로 대두되었다.
한글의 기계화가 요청된 것은 타자기의 자판에서였다.
초창기 도입된 타자기의 자판에는 자음 1벌과 모음 1벌로 구성된 2벌식, 초성자음 1벌과 모음 1벌,
받침자음 1벌로 된 3벌식, 초성자음 1벌과 모음 2벌, 받침자음 1벌로 된 4벌식, 초성자음 2벌, 모음 2벌,
받침자음 1벌로 된 5벌식 등이 사용되었다.
 
1969년 정부에 의해 4벌식이 타자기의 표준판으로, 2벌식이 텔레타이프의 표준판으로 각각 확정되었다.
그뒤 1982년에는 컴퓨터의 표준글자판으로 2벌식을 고시했고,
1985년에는 타자기의 표준자판을 2벌식 입력에 4벌식 출력 방법으로 바꾸었다.
2벌식의 입력방식은 초성과 종성의 구별이 없는 풀어쓰기 방식을 택함으로써 자음 19자,
모음 10자만으로 구성된다.
이러한 한글 전산화에서 현실적으로 대두되고 있는 것은 한글 전산부호의 문제이다.
한글을 컴퓨터에 인식·저장하기 위해서는, 다른 문자와 같이 그에 해당되는 부호를 만들어 대응시키는
방식이 사용된다.
 
이에는 단위음소를 구분하여 대응시키고 순서대로 조합하여 출력하는 조합형,
조합된 음절 단위로 대응시키는 완성형의 2가지 방식이 이용되고 있다.
이중 조합형은 음소문자로서의 한글의 무한한 창조성을 가장 잘 발휘할 수 있는 방식이지만,
로마 문자를 기초로 만들어진 국제방식과 잘 맞지 않는 문제점이 있다.
 
완성형은 완성된 글자를 부호화한다는 문제점 때문에 표현할 수 있는 글자의 수가 2,000여 자에 불과하게 된다.
정보사회의 도래에 발맞추기 위한 한글의 전산화에 따르는 바로 이런 문제점을 한글 연구의 선구자였던
주시경은 일찍이 예견하고 풀어쓰기로 전환할 것을 주창했었다.
풀어쓰기는 음소문자로서 한글의 특성을 살리면서 정보화시대에 적응한다는 장점이 있으나,
가독성에서 모아쓰기보다 효율이 떨어지는 결정적인 문제점이 지적되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합리적·과학적인 글이라는 평가에도 불구하고, 현재 한글은 기계화에서의 한계, 한자 사용,
규범의 불완전성 등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다.
따라서 지금 우리에게는 한글에 대한 공허한 찬사나 대안 없는 개혁의 주장이 아닌,
구체적·실천적인 방향 제시가 필요하다. 한글의 과학화를 위한 지속적인 연구와 다양한
한글 글꼴의 개발 등은 그러한 여러 과제 중의 하나이다.→

 

 

 

                                                         양촌김반석선생님작품 제목: 흙

 

우토로마을을살리자 상단 우측

 
   
 

 

 

배너를 클릭하면 우토로 청원 사이트로 바로 이동할수 있습니다

 

 

 

 

Daum 블로거뉴스
블로거뉴스에서 이 포스트를 추천해주세요.
추천하기

 

 

 

 

'한글 한마당'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국어란 무엇인가  (0) 2007.09.30
고대 한글은 무엇인가  (0) 2007.09.29
철학은 무엇인가  (0) 2007.09.28
산에는 전설이 나무되고  (0) 2007.09.28
산 행  (0) 2007.09.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