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국어 (국어학) [中世國語] 사전적의미
고려 건국 때(936)부터 16세기말까지 7세기 동안의 국어.
개요
흔히 고려의 건국 때부터 훈민정음이 창제될 때까지의 국어를 전기 중세국어,
그이후부터 16세기말까지의 국어를 후기 중세국어라고 부른다.
전기 중세국어의 자료는 〈계림유사 鷄林類事〉(12세기초)·〈향약구급방 鄕藥救急方〉(13세기 중엽)밖에 없으나
이에 비해 후기 중세국어 자료는 아주 많다.
이들은 대부분 훈민정음을 이용하여 기록한 문헌들로서 언해라는 독특한 성격을 가지며 한문 원문을
한글로 번역했다.
〈훈민정음 訓民正音〉의 해례본(1446)과 언해본(1447경), 〈용비어천가 龍飛御天歌〉(1447),
〈석보상절 釋譜詳節〉(1447), 〈월인천강지곡 月印千江之曲〉(1447), 〈월인석보 月印釋譜〉(1459),
〈능엄경언해 楞嚴經諺解〉(1462), 〈법화경언해 法華經諺解〉(1463), 〈금강경언해 金剛經諺解〉(1464),
〈남명천계송언해 南明泉繼頌諺解〉(1482), 〈금강경삼가해 金剛經三家解〉(1482), 〈내훈 內訓〉(1475),
〈삼강행실도 三綱行實圖〉(1481), 〈두시언해 杜詩諺解〉(1481),
〈육조법보단경언해 六祖法寶檀經諺解〉(1496) 등은 15세기의 대표적 자료이다.
15세기 국어와 16세기 국어는 약간의 차이를 보인다.
〈속삼강행실도 續三綱行實圖〉(1481)·〈번역소학 飜譯小學〉(1518)·〈번역박통사 飜譯朴通事〉·
〈번역노걸대 飜譯老乞大〉(1510년대)·〈소학언해 小學諺解〉(1587)·〈효경언해 孝經諺解〉(1589)·
〈논어언해 論語諺解〉(1590) 등의 유교서 언해가 16세기의 주요자료이다.
중세국어는 7단모음체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전기와 후기의 모음체계는 달랐다.
모음체계는 15세기 이전에 모음추이를 겪으면서 달라졌다.
'ㅓ'가 중설(中舌)의 'ㅡ' 위치로 이동하면서 연쇄적으로 'ㅡ→ㅜ'로, 'ㅜ→ㅗ'로, 'ㅗ→ '로 이동하여
' '가 불안정한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그결과 15세기 말엽에는 ' '가 그 음가를 잃어버리는 ' 〉 ㅡ'로의 비음운화(非音韻化) 현상이 나타났다.
이중모음체계에는 많은 공백이 존재한다.
ㅚ, ㅐ, ㅟ, ㅔ는 이중모음이었다. 'ㅣ'는 [i]와 [ij] 모두를 표시했다.
[j?]와 [j ]는 방언에만 존재했다. [ij]와 [wi]는 음운적으로 존재했으나 표기할 문자가 따로 없었다.
모음조화는 잘 지켜지는 편이었으나 예외도 많았다.
전기 중세국어의 자음에는 어두에도 경음이 나타났으며 어두자음군은 형성되어가는 중이었다.
〈계림유사〉에는 후기 중세국어에 ' '[米]로 기록되는 어휘가 '菩薩'로 표기되어 있어
자음들 사이에 있던 어떤 모음이 탈락하여 어두자음군이 생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시기에는 ' '과 'ㅿ'이 존재했고 유성마찰음의 ' '([ ] 또는 [γ]이 생성되고 있었다.
이들은 다 어중에 나타나는 것들인데 'ㅿ'은 음절말(末) 위치에서도 나타났다.
자음은 음절말 위치에서 아직 다 내파화되지 않아서 'ㄱ·ㄴ·ㄷ·ㄹ·ㅁ·ㅂ·ㅅ·ㅿ· ·ㅈ·ㅎ'등이 제대로 발음되었다.
그러나 유기음은 평음에 중화되었다.
후기 중세국어에는 평음과 유기음 외에 경음 계열이 더 있었다.
어두의 경음은 ㅅ계 합용병서와 'ㆅ'으로, 어중의 경음은 ㅅ계 합용병서와 'ㄲ·ㄸ·ㅃ·ㅉ'으로 기록되었다.
ㅅ계 합용병서로 기록된 경음에 'ㅾ'은 존재하지 않았다.
유성마찰음 ' '과·'ㅿ'·' '도 한 계열을 이루고 있었다.
' '은 훈민정음 창제 직후에 소멸되었고, 'ㅿ'과 ' '도 16세기에는 소멸되었다.
이 시기에는 ㅂ과 'ㅄ'계의 합용병서('ㅳ'·'ㅴ' 등)로 표기되는 어두자음군이 있었다.
어두에서도 여러 자음이 다 발음되었음을 말한다. 모음 사이에서 자음을 셋 이상 발음할 수 없는
자음군단순화 현상도 있었다.
그러나 ㄹ·ㄴ·ㅁ 등의 유성자음 뒤에서는 세 자음을 다 발음할 수 있었다.
이런 경우 외의 자음은 음절말에서 완전히 내파적으로 발음되어 'ㄱ·ㄴ·ㄷ·ㄹ·ㅁ·ㅂ·ㅅ· '의 8자음이
발음할 수 있었다.
그런데 특수한 환경에서는 'ㅿ'도 제 음가대로 실현되었다.
적어도 16세기초에는 'ㅿ'이 소멸되어 음가가 변했고 'ㅅ'과 'ㄷ'이 중화되어
음절말에서는 'ㄱ·ㄴ·ㄷ·ㄹ·ㅁ·ㅂ· '의 7자음만이 발음될 수 있게 되었다.
순수자음과 비음이 연속될 때 자음동화 현상도 나타났다.
후기 중세국어 자음에는 성조가 존재했다. 평성은 글자 옆에 점을 찍지 않고, 상성은 두 점을,
거성은 한 점을 찍었으나 고유어의 입성은 일률적으로 정해지지 않았다.
입성은 종성이 'ㄱ·ㄷ·ㅂ·ㅅ' 등일 때 발음이 촉급하게 되는 것을 표시한 것으로서
고유어의 것은 성조상으로 평성·상성·거성 중의 하나에 속했으나 한자어 입성은 거성적인 것뿐이었다.
이 시기의 실제적인 성조체계는 저조인 평성과 고조인 거성의 두 성조소를 가지는 것이었다.
상성은 평성과 거성의 복합성조였다.
15세기에는 정연하게 나타나던 성조가 16세기말경에는 소멸되었다.
전기 중세국어는 고구려어의 흔적이 약간 있었다.
일종의 저층(底層) 현상으로서 '那勿·乃勿'과 '呑' 등의 어휘를 통해 확인되나 후기 중세국어에는 소멸되어버렸다.
몽골 차용어는 고려시대에 굉장히 많이 쓰였다.
특히 말이나 매의 명칭, 군사어휘들이 많았다.
함경도 지방의 지명에는 여진어로부터 차용된 어휘들이 아직도 존재한다.
전기 중세국어에도 한자어가 많이 나타나지만 후기 중세국어에서도 다량의 한자어가 보인다.
이들은 다 중국어의 문어에서 간접 차용된 어휘들이다.
이 시기에는 중국어의 구어에서 직접 차용되어온 어휘들도 눈에 띈다.
제2음절에 'ㄱ'을 가지고 있던 어휘들은 15세기 후반과 16세기에 걸쳐 'ㅅ'으로 변화되었다.
그외 'ㅂ'이 'ㄱ'으로, 'ㄱ'이 'ㄷ'으로 교체되는 어휘들이 많다. 전자는 알타이 제어에서도
실현되던 현상이었지만 후자는 고유어에서만 실현되는 현상이었다.
모음 교체에 의한 어사분화가 활발했고 '진지', '겨시-', '좌시-', '뫼시-' 등과 같이
어휘적으로 경어법을 표현하는 어사가 일부 발달되어 있었던 점은 특기할 만하다.
전기 중세국어 단계에는 용언의 어간과 어간이 직접 통합되어 복합어를 형성하는 비통사적인 복합동사가 있었다.
속격조사는 선행하는 명사구가 유정체언일 때에는 '矣', 무정체언일 때에는 '叱'이 쓰였는데
후기 중세국어에서도 그대로 이어진다. 부정법은 일종의 비통사적 복합어와 같은 구성을 보였다.
부정을 담당하는 어사는 -i계와 -l계의 두 종류가 있다. 전자는 명사문 부정에, 후자는 용언문 부정에 관여했다.
'-을셰라'와 같이 이후의 국어에서 확인되지 않는 어미도 있었다.
'-시-'는 존대의 것 외에 존재의 '(이)시-'도 있었다.
후기 중세국어에는 어간의 모습이 둘 이상 나타나는 쌍형어간이 특징적으로 존재했다.
또한 어휘요소가 문법요소로 바뀌는 문법화 현상이 광범위하게 나타났다.
형식명사류도 그러하지만, 후치사류와 어미류, 접미사류 중에는 문법화에 의해 생성된 것들이 많다.
의문사가 없을 때는 '-a' 계통의 의문법어미가, 의문사가 있을 때는 '-o' 계통의 어미가 호응되어 쓰였다.
현재의 사실과 반대되는 가정, 즉 반사실적 가정(反事實的假定)을 나타내는 어미가 발달해 있었다.
'-던댄', '-더든' 등은 반사실적 가정을 표시했으며 그에 호응하여 후행절의
서술어에 통합되어 나타나던 '-리러(니)라', '-리랏다' 등은 과거에 몰랐던
사실을 현재시점에서 알게 됨을 표시했다.
경어법은 존경법의 '-(으)시-' 외에, 화자가 문장 주어의 입장에서 문장에 나타나는
그외 인물을 대접하여 표현하는 '- -' 계열의 선어말어미가 쓰였으며,
화자가 청자를 대접하는 등급에 따라 ' 라체', ' 야?체', ' 쇼셔체',의 종결어미가 사용되었다.
특히 화자의 발화내용에 대한 믿음을 나타내는 '-거/어/나-' 등의 선어말어미와 화자가
어떤 상황이나 발화내용에 대해 감동을 나타내는 '-옷/돗/ㅅ-' 등의 선어말어미가 쓰였다.
문장 주어가 화자 자신임을 표시하는 '-오/우-'는 신분어미의 일종이었다.
조어법도 다양하게 발달해 있었다. 어간과 어간이 어떤 문법요소의 도움이 없이도 직접 통합하는
복합법과 여러 접사에 의하여 파생어가 만들어지는 파생법이 있었는데,
용언의 어간만으로 명사의 어간으로나 부사의 어간으로 파생되는 영파생(零派生) 현상이 두드러졌다.
양촌 김반석선생님 작품 새로운 기법으로 탄생한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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