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 한마당

[스크랩] 한글의 생일을 축하합니다

만년지기 우근 2007. 10. 9. 20:04

만약 우리에게 한글이 없다면, 우리는 우리의 마음과 감성과 주장을 어떤 형식으로 전달하고 있을까요. 우리에게 한글이 없었다면, ‘기미독립선언문’은 어떠한 문자로 만들어졌을까요. 또, 우리에게 한글이 없다면, 삼천리 화려강산을 그리고 있는 무수한 시와 노래의 가사는 또 어떻게 형상화되거나 묘사되고 있을까요.


우리나라 말이 중국과 달라 문자로써 서로 통하지 아니하여서


한글은 우리의 정신이요, 우리의 마음이 최후로 돌아갈 곳입니다. 고작 스물여덟 개의 모음과 자음만으로도 우리는 우리가 사랑하고 미워하며, 분노하고 슬퍼하며 행복하기도한 우리의 일상을 충분히 말하고 듣고 소통할 수 있습니다.


이른바 ‘외계어’와 ‘귀여니체’ 역시, 한글이 낳은 배 다른 자식입니다. 네티즌끼리의 의미 전달 과정에서 널리 쓰이는 ‘이모티콘’ 역시 대다수가 한글의 형상을 하고 있습니다. 한글은 그래서 우리 민족의 가장 소중한 자산입니다.


‘문맹률’은 그 나라의 문화적 빈곤함을 드러내는 가장 좋은 예입니다. 한때 우리 민족 역시 70%가 넘는 문맹률을 보유하기도 했습니다.


그것은 일제시기 식민지 지배당국에 의한 의도적인 ‘한글 죽이기’와 이른바 ‘신(新)사고’를 한다는 부일민족반역지식인 집단의 ‘한글 멸시’가 빚어낸 자기모멸적 근대화의 결과이기도 했습니다.


이런 까닭으로 어리석은 백성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있어도


그들은 우리의 한글을 가리켜 ‘표의문자를 흉내 내다 실패한 표음문자’라고 주장하기도 했고, 한글이 지니고 있는 다양한 표현력과 무한대에 가까운 의성어 표기력을 ‘욕설만 발달한 문자’라는 말로 애써 치부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일본제국주의자들과 그 부역자들이 줄기차게 주장했던 ‘국어(일본어)상용’은 결국 우리말을 오염시키고 황폐화시켰을 뿐, 우리말 고유의 미덕인 형용사의 무한성과 명사의 탁월한 조합성을 발전시키고 더 아름답게 하는 데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습니다.


지금도 우리 주위에는 식민지 시기의 잔재가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지난 2004년의 17대 총선 당시 저는 TV를 보다가 상당히 화가 난 적이 있습니다.


당시 열린우리당의 의장이었던 MBC 기자 출신의 정동영 현 대통합민주신당 대선 예비 후보는, 자신의 기자 초년병 시절을 회고하는 대목에서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사쓰마리”라는 일본어를 썼습니다. 그리고 나서의 그 표정은 지나치게 자연스러웠습니다.


한국어를 보호하고 아끼며 가꾸어나가야 할 방송사의 기자 출신임을 늘 자랑스럽게 말하고 다니는 그가 왜 그리도 우리말의 오염에 대해서는 무지한 것인지, 저는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더구나 그 자리는 방송뉴스로 보도되는 자리였습니다. 오히려 그런 자리일수록 용어의 사용에 ‘선택과 집중’을 해야 할 텐데요.


마침내 제 뜻을 펴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중고등학교 때 제가 곧잘 하던 것이 하나 있습니다. ‘연애편지 대필’이 그것입니다. 마음속에 담고 있는 누군가를 향한 애틋한 마음의 자락을 문자로 옮긴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더군다나 그것이 한 사람을 향한 ‘고백’일 경우, 낱말 하나 문장 한 줄도 신중하게 선택할 수밖에 없습니다.


▲훈민정음 서문


‘당신을 사랑합니다’라는 평범한 말과 ‘당신은 나의 종교입니다’라는 다소 문학적인 표현이 다르듯이, 우리네 민중들의 가슴에 담겨 있는 그 무수한 감정의 실오라기를 끄집어내고, 또 그것을 적절한 말로 풀어내는 것은 조금은 어려운 일일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학교를 다니면서 ‘국어’라는 과목을 그토록 오랫동안 배우는지도 모릅니다.


제 직업상, 참여정부를 지지하거나 비판하는 사람들을 많이 봅니다. 그들 역시 고유의 개인적인 언어습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인터넷 게시판을 빛내주시는 많은 ‘논객’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이는 격렬한 언어를 사용하고, 또 어떤 분은 차분하고 사려 깊은 말들을 씁니다. 그러나 그 모든 ‘말들의 풍경’이 가고자 하는 곳은 한 방향입니다. 바로 우리 민족 혹은 우리나라가 ‘잘 먹고 잘 살자’는 것입니다.


세종께서 어떠한 내면적인 이유로 한글을 만드시고 널리 익히게 했는지 우리는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 다만, 그것이 어떠한 이유였든지 간에 한글이 우리 민족의 심성을 더 깊고 더 넓게 했다는 것만은 부인할 수 없는 ‘진실’입니다. 민족 고유의 문자와 표현방식을 갖는다는 것은 그 자체로도 하나의 ‘거룩한 축복’입니다.


내가 이것을 가엾게 생각하여 새로 스물여덟 글자를 만드니


한글에 담겨 있는 가장 기본적인 세계관은 ‘사해평등주의’입니다. 조선시대 1%들만이 공유하던 지식의 지평을 다수의 민중에게 돌려주었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그 일은 우리 민족 스스로를 옭죄고 있던 사대(事大)의 못된 습성을 뿌리치게 하는 것으로 우리의 영혼을 옮겨놓았습니다.


이라크를 침공한 미제국주의자들이 늘 하는 말이 하나 있습니다. ‘평화’입니다. 그러나 그 가증스러운 제국주의자들의 평화는 결국 자신들만을 위한 ‘평화’라는 것을 우리 모두는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평화가 아닙니다. ‘강요된 침묵’일 뿐입니다.


우리에게 한글이 없었다면, 우리가 제국주의자들에게 느끼고 있는 이 모든 분노와 슬픔을 어쩌면 그들의 언어로 표현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래서 한글은 바로 우리의 ‘영혼의 묵시록’ 같은 존재입니다.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그 무엇, 그것이 영혼이라면 한글은 그 영혼을 나타내주는 가장 좋은 지표입니다.


2007년의 대한민국에서, 한 명의 ‘먹물 먹은 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대단히 고통스러운 일인지도 모릅니다.


우리 민족의 역사와 지나온 날들의 고통스러운 기억들을 사랑하고 보듬어 안으며, 함께 빛나게 할 내일을 고민한다는 것은 일종의 ‘용기’ 혹은 ‘만용’이 필요합니다. 기꺼이 우리의 어제와 오늘과 미래를 껴안은 사람들에게서 저는 세종의 고뇌와 인간적인 슬픔을 봅니다.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쉽게 익혀서


인터넷에 ‘글쓰기’를 하시는 분들은 많습니다. 이른바 ‘눈팅’에서 ‘논객’까지 말이지요. 그 모든 분들을 저는 ‘씨줄’과 ‘날줄’로 생각합니다.


베를 짤 때 씨줄이나 날줄 하나만 가지고는 삼베를 짤 수 없듯이, ‘논객’은 ‘눈팅’들께, ‘눈팅’은 ‘논객’에게 서로 영향을 주고받습니다. 그리고 그 매개체는 바로 한글입니다. 우리의 오랜 언어이지요.


한글은 아주 쉽습니다. 중국 현대문학의 상징인 노신 선생이 중국어 표기의 한 방법으로 한글을 추천했던 이유도 바로 ‘간이성’과 ‘평이함’이었습니다. 이 세상 어느 말보다도 한글은 ‘지나치게’ 쉽습니다.


그러나 이토록 쉬운 한글을 ‘어렵게’ 쓰는 자들이 있습니다. 끝끝내 ‘한글-한자 공용 표기’를 주장하며, 우리말의 고유한 미덕인 ‘다양한 형용성’을 하나의 의미로만 규정하려는 자들입니다.


세로쓰기는 한글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일본어나 중국어에 더 맞는 표기법입니다. 한글은 가로로 써야 그 모양과 쓰임새가 확연히 드러납니다.


한글 맞춤법을 파괴하고 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더구나 그들이 저와 같은 ‘문학’이라는 걸 한다고 설레발치는 것을 보면, 입안에 가득 고이는 욕지거리를 참기가 힘듭니다.


또 ‘외계체’는 말 그대로 인터넷의 신속성과 즉흥성을 반영한 것이지, 하나의 정당한 표기법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그 외계체의 가장 저렴한 수준을 드러내는 자칭 ‘작가’를 특례입학시킨 모 대학 당국은 우리말의 미래에 대해 얼마나 고민하고 있습니까. 그 학교에는 국어국문학과가 있기나 한 겁니까.


날마다 쓰는 데 편하게 하고자 할 따름이다


인터넷에 글을 쓰시는 모든 분들께 부탁드립니다. 자신의 글에 대해 ‘최소한의 교정’을 말이지요. 그것은 자신의 글을 읽어주는 분들에 대한 가장 기초적인 예의입니다. 개혁의 당위성을 나누고 진보를 지향하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그렇습니다.


가장 초보적인 수준의 맞춤법과 띄어쓰기조차 ‘틀린’ 글들을 볼 때마다 제 마음은 그리 편안하지 못합니다. 수구세력의 기관지인 <조선일보>는 깔끔한 서체와 아울러, 철저한 교정을 합니다. 그들의 허위와 가식을 밝혀내려는 진보·개혁 진영의 글쟁이들 역시 <조선일보>에 못지않은 ‘프로근성’을 지녀야 합니다.


‘최소한의 교정’도 보지 않은 글을 올리는 사람은 논객으로서의 자질이 부족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논객은 ‘주장’만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 주장에 따르는 ‘대안’까지 제시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고민의 흔적이 깃든 글들은 저를 행복하게 하지만, 그 글 속에 기생하는 국적불명의 ‘유사 한국어’와 엉터리 맞춤법은 저를 아프게 합니다.


대한민국과 그 대한민국이 거처하는 한반도를 사랑하십니까. 그렇다면 우리말부터 사랑해 주시기를 희망합니다. 외래어에 점령당한 일본어의 뒷길을 우리 한국어와 한글이 따라갈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외국어를 아는 것은 문화적인 힘이지만, 그 외국어를 아무런 생각도 없이 쓰는 것은 그 민족의 사유가 빈곤함을 드러내는 척도이기도 합니다.


오늘은 한글날입니다.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기까지 한 우리의 문자가 태어난 날입니다. 축하해주고 아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한글의 생일을 축하합니다.

출처 : 詩처럼 좋은 세상
글쓴이 : 시간의상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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