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 한마당

허준 동의보감

만년지기 우근 2008. 4. 21. 14:38

 

허준 (조선 의원)  [許浚]
 
1546(명종 1) 서울~1615(광해군 7).
조선시대 선조·광해군 때의 명의.
개요
 
허준 /허준, 최광수가 그린 영정
본관은 양천(陽川). 자는 청원(淸源), 호는 귀암(龜巖).
출생과 성장
허준은 1546년(명종 1) 지금의 서울특별시 강서구 가양동에서 아버지 허론(許碖)과
어머니 김(金)씨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양천허씨의 시조인 허선문(許宣文)의 20세손이다.
할아버지 곤(琨)은 무관으로 경상우수사를 지냈고 아버지 론 역시 무관으로
용천부사를 지냈다.
 
허준은 어릴 때 경상도 산청으로 이사하여 이곳에서 성장한 것으로 전해진다.
허준은 이곳에서 어려서부터 의사수업을 시작했다.
그는 서자로 태어났기 때문에 신분제 사회에서 벼슬길로 나가지 못하고
당시 중인이나 서얼들의 업으로 되어 있던 의학의 길을 택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허준의 총명과 열성은 이미 20대에 그를 전국적으로 유명한 의사가 되게 했다.
1569년 6월 그의 나이 24세 되던 해 부제학 유희춘(柳希春)의 부인을 치료하기 위해
서울로 초치되었고 이듬해에는 유희춘의 병까지 치료하게 되어 서울 장안에서 명성이 높았다.
내의원 생활
허준이 내의원 취재에 등과한 것은 1574년(선조 7) 그의 나이 29세 때로 상당히 늦은 나이에 궁중의사로서의 생활을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내의원에 들어간 다음해부터 어의로 선임되어 안광익(安光翼)과 더불어
임금의 병을 진찰하고 효험이 있자 임금으로부터 신망을 얻게 되었다.
 
1578년 9월 내의원 첨정으로 있을 때 당시에 새로 출판된 〈신간보주동인유혈침구도경 新刊補註銅人腧穴鍼灸圖經〉을 임금으로부터 하사받았다.
1587년에는 임금의 건강이 회복되었기 때문에 내의원 책임자와 어의들이 모두 포상을 받았는데 허준은 태의 양예수(楊禮壽)·안덕수(安德秀) 등과 더불어 녹피(鹿皮) 1영(令)을 하사받았다.
 
1590년에는 허준이 왕자를 살린 공으로 당상관(정3품 통정대부 이상을 말함)의
가자(加資)를 받았다.
그러자 정원 사헌부 사간원에서 일제히 나서서 "왕자를 치료한 것은 의관으로서 의당 해야 할 일이고 비록 공이 있다 해도 의관에게 당상의 가자를 내린다는 것은 있을 수 없으므로
취소할 것"을 왕에게 여러 번 간청했으나 선조가 신하들의 거듭된 요구를 물리쳤다.
1592년에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백성들이 살상되고 왕은 의주까지 피신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때 허준은 선조의 건강을 돌보았다.
이때의 공로로 허준은 뒷날 공신의 대열에 끼게 된다.
1595년 왕이 별전편방에 나와 의관인 허준 등으로부터 침치료를 받는데
약방 도제조 김응남, 제조 홍진, 부제조 오억령 등이 입시했다.
 
1596년 동궁인 광해군의 병을 고친 공로로 허준은 가자되고
김응탁(金應鐸)·정예남(鄭禮男)은 승직(陞職)되었다.
이에 허준은 그 벼슬이 정헌대부 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즉시 간원들이 나서서 의관들의 가자를 개정할 것을 청했으나
선조가 "공로가 있는 자들이다"라고 하여 듣지 않았다.
 
같은 해에 선조가 허준에게 완비된 우리나라 의서를 찬집하라고 일렀다.
허준이 유의 정작(鄭碏)과 태의 양예수·김응택·이명원(李明源)·정예남 등과 편국을 설치하고
책의 요점을 잡아가는 시점에 정유재란이 일어나 의관들이 흩어져 작업은 자연히 중지되었다. 이에 선조가 허준을 다시 불러 허준 혼자 책임지고 새로운 의서를 만들라고 하면서
내장방서 500권을 내어주며 참고하도록 조치했다.
1600년 수의(내의원의 책임자) 양예수(지사:정2품)가 사망함에 따라 허준이 수의가 되었다.
1604년 임금이 호성공신(扈聖功臣)의 교서를 발급하여 의관으로서는
허준과 이연록(李延祿) 두 사람을 3등에 책훈하고 허준은 양평군(陽平君)에 봉작되었다.
1606년에는 임금의 병을 치료한 공로로 양평군 정1품 보국숭록 대부로 승급했다.
이것은 벼슬로서는 최고의 품계인 만큼 신하들의 반대가 극심하여 수십 차례에 이르렀다.
 
계속되는 신하들의 반대 때문에 선조도 결국 허준의 가자를 보류했다.
1607년에는 임금의 병이 위중하고 잘 낫지 않았는데 이것은 허준이
약을 잘못 썼기 때문이라 하여 연일 조정에서 수의 허준을 벌주는 일로 논의가 복잡했으나
선조가 벌을 주기보다 의술을 다하게 해야 한다고 막아섰다.
 
1608년에 마침내 선조의 병세가 급박하다가 돌연히 사망했다.
선조의 병은 이미 어찌할 수 없는 것이었지만 사헌부나 사간원에서 가만 있을 리 없었다.
광해군 즉위초부터 연일 계속되는 계청에 허준을 보호하던 광해군도 마침내 견디지 못하여
허준의 직책을 좌면하고 거처를 제한하는 벌을 내리도록 승인했다.
 
그러나 그해가 가기 전에 허준에게 내린 벌을 해제했다.
이런 와중에서도 허준은 〈동의보감 東醫寶鑑〉의 찬집에 노력하여 1610년(광해군 2)
마침내 완성했다.
이후 어의로 있다가 1615년 죽었다.
그의 사후 광해군은 생전에 보류되었던 보국승록대부를 추증했다.
저술
허준이 오늘날까지 의성으로 추앙받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그의 의학적 저술 때문이다.
종이와 인쇄시설이 극히 구하기 힘든 시기였으므로 임금의 지시가 아니면
책을 만들기 어려웠다.
오늘날 남아 있는 모든 허준의 저술은 왕명에 의한 것이다.
기록에 있는 허준의 저술은 1581년 5월에 나온
〈찬도방론맥결집성 纂圖方論脉訣集成〉이라는 진찰서 4권이 최초이다.
환자를 진맥하는 기본을 알기 쉽게 쓴 책으로, 중국의 고양생(高陽生)이 쓴
〈찬도맥결 纂圖脉訣〉이라는 책을 허준이 고쳐쓴 것이다.
 
원서는 1권으로 되어 있는데 표현이 잘못된 곳이 많고 문장도 복잡하게 얽혀져
실제 임상에는 사용하기 어려운 책이었다.
이것을 허준이 고쳐쓰면서 문장을 짧고 쉽게 바꾸고 잘못된 것은 바로잡아
4권의 책으로 만든 것이다.
 
허준이 쓴 책은 동의고전 중의 하나인 〈두창집요 痘瘡集要〉로, 두창(천연두)에 관한
책으로는 임원준이 1460년에 편찬한 〈창진집 瘡疹集〉이 있고
이것을 1518년 우리말로 번역한 〈언해창진방 諺解瘡疹方〉이 있는데
임진왜란 때 모두 유실되어 두창 치료에 관한 참고서가 없었다.
 
두창의 원인과 치료법을 모르게 되어 자연히 미신적 측면으로 흘러 백성들의 고통이 심했다.
나라에서는 두창에 관한 책의 편찬을 허준에게 위임했다.
허준은 자신의 오랜 기간의 치료경험과 〈의학입문 醫學入門〉·〈고금의감 古今醫鑑〉·
〈득효방 得效方〉·〈만병회춘 萬病回春〉, 전씨의 〈소아직결 小兒直決〉 등을 참고하여
1년 만에 〈두창집요〉를 편찬했다.
 
이 책의 상권에는 두창의 원인·예방·증상이 서술되어 있고,
하권 뒷부분에는 임신부의 두창과 반진에 대한 내용이 씌어 있다.
이 책은 출간 전후 두창 치료의 참고서로 널리 이용되었는데
당시 사회발전의 한계로 말미암아 비과학적·비위생적인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 책은 1601년에 편찬되었고, 1608년 내의원에서 목판본으로 출판했다.
〈언해두창집요 諺解痘瘡集要〉는 이 책을 우리말로 번역하여 백성들이 사용하기 쉽게
만든 책이다.
〈언해태산집요 諺解胎産集要〉 역시 1608년에 허준이 왕명을 받아 찬술한 부인과에 속하는
태산(胎産)과 태아보호에 관한 의서로 1책으로 되어 있고 각 항목마다 한글로 번역되어 있다.
 
이 책은 총 81장으로 되어 있는데 그 기술이 정연하고 산과에 관해서는 빠짐없이 간결하게
씌어 있다.
이 책의 인용서는 〈의학입문 醫學入門〉·〈의학정전 醫學正傳〉·〈소문 素問〉·〈맥경 脈經〉·〈고금의감〉·〈부인대전 婦人大全〉·〈종행선방 種杏仙方〉·〈본사방 本事方〉·〈득효방〉
등이다.
 
〈언해구급방 諺解救急方〉은 조선시대 세종의 명을 받아서 편찬한 구급방을 허준이
선조의 명을 받아 우리말로 옮겨 1607년 내의원에서 간행한 책으로 상하 2책으로 되어 있다. 〈동의보감〉은 허준이 1596년 왕명을 받아 편찬을 시작한 책으로 시작한 지 15년 만인
1610년(광해군 2)에 완성되었다.
 
우리나라의 의학전통은 모두 〈동의보감〉으로 흘러들어왔다가 다시 〈동의보감〉에서 흘러나갔다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만큼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의서이다.
〈동의보감〉은 기존의 의학전통을 집약해놓았을 뿐만 아니라
이후의 의학전통의 원천이 되었다.
 
18~19세기에 나온 우리나라의 대표적 의서인 주명신의 〈의문보감 醫門寶鑑〉,
강명길의 〈제중신편 濟衆新編〉, 황도연의 〈의종손익 醫宗損益〉 등은
〈동의보감〉을 약술해놓은 것이다.
 
이 〈동의보감〉은 허준의 대표적 저작일 뿐만 아니라 필생의 저작으로서 중국·일본을 비롯한 동양에서는 물론 유럽에까지 영향을 미친 위대한 의서이다.
〈신찬벽온방 新纂辟瘟方〉은 허준이 왕명을 받아 저술하여 1613년에 편찬한
전염병의 예방과 치료에 관한 의서로 1책으로 되어 있으며 내의원에서 간행했다.
이 책에서 말하는 벽온이란 지금의 발진티푸스 또는 장티푸스와 같은 질병으로 여겨진다.
 
이 책은 22개의 항목으로 되어 있는데 앞부분에서는 온역병의 원인을 설명하고
온역병의 경과과정을 3단계로 나누었으며 책의 뒷부분에서는 온역병을 앓을 때의 섭생과 금기, 그리고 예방법에 관해 설명했다.
 
〈신찬벽온방〉은 〈간이벽온방 簡易辟瘟方〉보다 체계적·실용적인 치료법들이 씌어져 있어
당시 전염병 치료의 참고서로 널리 이용되었다.
물론 당시 과학발전의 한계를 넘지 못하여 전염병의 원인과 예방법에서는 제한성이 많았다. 〈벽역신방 辟疫神方〉은 1613년 허준이 왕명을 받아 편찬한 것을
그해 12월 내의원에서 간행한 것이다.
 
이 책을 편찬한 이유는 1612년 함경도에 역려가 유행하고 이듬해에는 8도에 전파되었기 때문에 1525년(중종 20)에 간행된 〈간이벽온방〉을 다시 인출하여 각 도에 반포했고 그 책이 효용이 없는 점을 염려하여 다시 허준이 쓴 〈신찬벽온방〉을 1613년에 반포했으나 논역이 종식되지 않은데다가 여름부터는 당독역(唐毒疫)이 유행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기 때문에
왕이 허준에게 명하여 다시 이 책을 편찬하게 한 것이다.
 
이때 유행한 당독역은 발열·두통이 있고 전신에 붉은 발진이 생기며 정신이 혼미하고
헛소리를 하며 목에 동통이 있고 한기가 있는 것으로 보아 성홍열이 아닌가 추측된다.
이처럼 허준은 여러 권의 중요한 의서를 저술하여 사람들을 병고에서 구하려고 노력했는데
그가 쓴 책들은 모두 중요한 의서로서 지금까지도 효용성을 인정받고 있다.
의학사상
허준의 의학사상은 그때까지 내려오던 여러 가지 전통이 집약되어 있다.
■ 민족의학사상
허준은 〈동의보감〉의 집례에서 말하기를 "중국의 동원(東垣)은 북의라 하고 단계(丹溪)는
남의라 했다.
의에 남북의 이름이 있는데 우리나라는 동방에 치우쳐 있고 의약의 도가 연면하게 끊이지 않은, 즉 우리나라의 약을 일러 동의라고 할 수 있다"라고 주장했다.
이것은 허준이 중국의학과 대별되는 우리의 전통의학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이것을 바로 세우기 위한 염원을 품고 있었음을 반증하는 말이다.
이것이 그의 주된 저술인 〈동의보감〉의 이름에서 동의라는 말을 드러낸 이유이기도 하다(→ 한의학).
 
허준이 활약하기 전부터 우리나라는 중국의 난삽한 의학이론에 침식되어 백성들이
병고에 시달리고 있었다.
중국과는 자연환경, 자라는 동식물, 음식, 질병 등이 다르기 때문에
우리나라의 독자적인 의학이 발전해야만 했으나 당시만연한 사대주의 사상은
중국에 경도되어 독자적인 의학이 뿌리내리지 못했다.
 
이런 환경에서 허준은 중국의 의서를 참고할 때도 반드시 비판적으로 검토하여
우리 현실에 맞는 부분만 채택했다.
당대에 최고로 꼽히던 진단서는 중국의 고양생이 쓴 〈찬로맥결〉이었는데
허준은 이 책을 동의보감 저술시에 전혀 인용하지 않았다.
그외에도 허준은 우리땅에서 나는 향약을 중시하고 향약을 쉽게 쓸 수 있도록
그의 저술에서 자세하게 서술하려고 했다.
허준이 민족의학의 전통을 분명하게 세운 후 비로소 민족의학은 그 토대를 이루었다.
■ 민중의학사상
허준은 어려서 서자로 자랐기 때문에 민중의 고통을 체험했고,
그 후로도 늘 고통받는 가난한 민중들의 입장에 서 있었다.
그 단적인 예가 〈언해두창집요〉·〈언해태산집요〉·〈언해구급방〉 등
우리말로 된 의서로 이를 간행하여 양반사대부뿐만 아니라 일반 백성들이 병고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하려고 애썼다.
 
또한 〈동의보감〉에도 반드시 향약명을 함께 써서 이 땅에서 나는
약초를 쉽게 사용할 수 있도록 한 것은 중요한 점이다.
전쟁으로 인해 모든 것이 부족했던 당시의 백성들에게는 큰 혜택이었다.
■ 예방의학사상과 실용사상
허준은 "건강을 유지하는 데 중요한 것은 육체와 정신을 단련하는 것이고
약과 침은 그 다음"이라는 선진적인 의학사상을 강조했다.
이 소박한 의학사상은 허준의 진보적 의학사상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그는 마음과 몸을 단련하고 수양을 잘하면 병을 미리 막아 오래 살 수 있는데
이것을 모르고 병의 치료에만 매달려서는 안 된다고 했다.
 
일단 병이 생긴 다음에는 제때에 치료하여 불행을 막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자신의 저서에서 정상적인 생체의 생리적 메커니즘에 대해 쓰고
몸을 건강하게 하는 방법을 제시한 다음 질병의 병리적 메커니즘과 증상 및 치료 처방과
예후에 대하여 썼으며 끝으로 해당 병의 치료에 효과가 있는 단방문들과 침구법을 밝히는
독특한 서술체계를 세웠다.
■ 동의학적 공적
허준은 우리민족 의학사상 가장 탁월한 의학지식과 이론을 가졌던 사람으로 그때까지 발전,
지탱되어왔던 민족의학을 과학이론적인 면과 실용적인 면에서 새로이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림으로써 의학발전에 크게 기여했으며 무엇보다도 의료사상적 측면에서
민족의학·민중의학의 지향을 분명히 함으로써 근대민족의학의 지향점을 건설했다.
허준은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의 의학발전에도 크게 기여한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동의보감 (허준 한의학서)  [東醫寶鑑]
 
1610년 허준(許浚 : 1546~1615)이 편찬한 한의학서.
동의보감 /〈동의보감〉, 목활자본(1613 간행본), 규장각 ...
 
동의보감 /<동의보감>, 목활자본(1613 간행본)
25권 25책. 고활자본(改鑄甲寅字). 1613년 훈련도감에서 간행되었다.
1596년(선조 29) 선조의 명으로 허준·정작(鄭碏)·양예수(楊禮壽)·김응탁(金應鐸)·이명원(李命源)·
정예남(鄭禮男) 등이 우리나라 의사들에게 필요한 보다 간략하면서도 실제 의료기술에
필요한 의서로서 편찬하기 시작했으나 완성하지 못하고 1597년 정유재란을 맞아 중단했던 것을
전쟁이 끝난 후 허준이 혼자 다시 편찬하여 1610년 완성했다.
 
정작은 승려의사로 권위가 있었으며 양예수는 그당시 조선의 의사들이 존중한
〈의림촬요 醫林撮要〉 13권을 교정한 경험이 있는 의사였다.
〈동의보감〉은 우리나라에서 편찬된 의서는 물론, 중국에서 수입된 의서까지
모두 활용해서 편찬한 것으로, 병증(病症)을 중심으로 한 병문(病門)으로 나누지 않고
현대적 분류방법과 비슷하게 병증과 치료방법을 중심으로 다음과 같이 나누었다.
내경편(內景篇)은 신형(身形)·정(精)·기(氣)·신(神)·혈(血)·몽(夢)·성음(聲音)·언어(言語)·진액(津液)·
담음(痰飮)·오장육부(五臟六腑)·간(肝)·심(心)·비(脾)·폐(肺)·신장(腎臟)·담(膽)·위(胃)·소장(小腸)·
대장(大腸)·방광(膀胱)·삼초부(三焦腑)·포(胞)·충(蟲)·대변(大便)·소변(小便)·수양(修養)·양노(養老)
등으로 주로 내과의 질병을 들었다.
 
외형편(外形篇)은 두(頭)·면(面)·안(眼)·이(耳)·비(鼻)·인후(咽喉)·두항(頭項)·배(背)·흉(胸)·유(乳)·복(腹)·제(臍)·요(腰)·협(脇)·피(皮)·육(肉)·맥(脉)·근(筋)·골(骨)·수(手)·족(足)·모발(毛髮)·전음(前陰)·후음(後陰) 등으로 주로 외과의 질병을 들었다. 잡병편(雜病篇)은 천지운기(天地運氣)·심병(審病)·변증(辨證)·진맥(診脈)·용약(用藥)·토(吐)·한(汗)·하(下)·풍(風)·한(寒)·서(暑)·습(濕)·조(燥)·화(火)·내상(內傷)·허로(虛勞)·곽란(霍亂)·구토(嘔吐)·해수(咳嗽)·적취(積聚)·부종(浮腫)·장만(脹滿)·소갈(消渴)·황달(黃疸)·해학(匐)·
온역(瘟疫)·사숭(邪崇)·옹저(癰疽)·제창(諸瘡)·해독(解毒)·구급(救急)·괴질(怪疾)·잡방(雜方)·부인(婦人)·소아(小兒) 등이다.
 
병리와 진단방법으로 보아 내과와 외과에 속하지 않은 여러 가지 병증을 다루었다.
특히 부인과와 소아과가 있다.
탕액편(湯液篇)은 탕액서례(湯液序例)·수부(水部)·토부(土部)·곡부(穀部)·인부(人部)·금부(禽部)·
수부(獸部)·어부(魚部)·충부(蟲部)·과부(果部)·채부(菜部)·초부(草部)·목부(木部)·옥부(玉部)·석부(石部)·금부(金部) 등이다.
 
주로 약물에 관한 지식을 열거했다.
침구편(鍼灸篇)은 침을 놓는 데 필요한 경혈(徑穴)을 그림을 그려서 설명하는 한편,
침을 통해서 병을 고치는 방법을 자세하게 설명했다.
이상과 같이 사람의 모든 병증상을 5가지로 나누어서 항목에 따라 치료방법을 자세히 기록하고
치료 근거가 되는 여러 가지 문헌을 들었다.
병을 치료하는 데 있어 전해지는 의서에 근거를 둔 기록만을 추린 것이 아니라,
병에 따라서는 민간에 전해지는 이른바 속방(俗方)의 치료방법과 편찬자가
스스로 경험한 비방까지 덧붙여 여러 가지로 참고가 된다.
 
의서로서 또 하나의 특색은 비슷한 병 중에서도 특별히 여러 사람들이 흔히 체험하는
병증세부터 다루되 손쉬운 방법으로 치료할 수 있도록 자세하게 설명한 데 있다.
가령 배앓이 환자들이 흔한데, 이런 환자들은 배앓이 치료를 설명한 조항을 찾아 읽으면
쉽게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있다.
이렇듯 활용하기에 편리하도록 편찬되어 있을 뿐 아니라 내용이 그 어떤 의서보다도 충실하다는 것이
세계적으로 인정되어, 권위있는 동양의학서로서 일찍부터 일본과 중국에 소개되었다.
 
이 책은 1613년 훈련도감에서 만든 목활자로 인쇄되었는데, 이때의 초판본 완질 25책은 남아 있지 않고, 뒤에 전주와 대구에서 목판본으로 출판된 것이 완전하게 전승되고 있다.
우리나라 책으로 이 책만큼 외국에서 거듭 출판된 것도 드문 일인데,
출판된 지 115년 뒤에 일본에서 완질이 출판된 것을 비롯해서 1763년 중국에서도 출판되었으며
일본과 중국에서 모두 7번 출판을 거듭했다.
이상과 같은 여러 가지 사실을 종합해볼 때 의서로서 세계에 자랑할 수 있는 귀중한 책이다.
安春根 글
출처 : 브리테니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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