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한마당

용정 용주사 이야기모음

만년지기 우근 2008. 7. 27. 03:32
 

용주사 이야기 모음



대한불교 불이종


종조 : 만해 한용운 선사

종지 : 천지일체의 생성원리를 견성하고 불타의 정각인 귀명자비에

자각자타의 근본교지를 증득하고 생명일체의 존엄성을 높이 받들어

상구보리 하화중생하여 각행원만을 기본이념으로 삼아 삼계유심의 일체감을

불이사상으로 통념집결함.


본존불 : 석가모니불

소외경전 : 금강경, 법화경, 화엄경, 무량의경, 보상행법경


주요연혁

1989. 6. 불이회를 설립

1997. 2. 대한불교 불이종 창종 결집

1997. 9. 대한불교 불이종 창종 공포

1997. 9. 총본산과 총무원을 용국사로 선정

1997. 12. 초대종정 성공 대종사 추대

2002. 1. 제2대 종정 성공 대종사 재 추대


주요행사

석존탄신일(음 4.8일), 석존출가일(음 2.8), 석존성도일(음 12.8),

석존열반일(음 2.15), 만해석사탄신일(음 7.12),

만해선사열반일(음 5.9), 창종공포일( 양 9.21)

1998. 실직자 무료급식소 개원

1999. 건공소학교 장학재단 설립(中길림성 연길시 소재 년550만원씩 전달)

2000. 맨발도보 천리길 대행진(참가자:장애인 중앙곰두리, 종단스님 장소 : 서울역에서 부산역까지 24박 25일)

 

2001. 용정시 용주사복원 불사(中길림성 용정시 1300년 고찰)

경로위안 잔치, 불우이웃돕기, 군경 고흔 천도법회, 불우학생 장학금전달


임원현황

종정 성공, 원로원장 법공, 총무원장 학운, 법계고시원장 법묘, 종학원장 법운,

기획실장 정철, 경북종무원장 성도, 충남종무원장 법운, 총무부장 혜경, 교무부장 덕봉.

홍부부장 수연, 수석부의장 도은, 교육원장 일휴, 포교원장 각원, 자문위원장 덕봉,

사무총장 월곡, 경남종무원장 효정, 대구종무원장 명산, 재무부장 월봉,

교육부장 도의, 섭외부장 연홍


2002-07-11





중국 조선족발전후원회장  이  승  래


일송정 푸른 솔은...



젊은 시절 친구들과 어울려서 막걸리 몇 순배 하다보면 술기운에 기대어

가슴에 감춰둔 웅지를 슬그머니 드러내며 부르던 노래가 있었다.



일송정 푸른 솔은 늙어 늙어 갔어도

한줄기 해란강은 천년 두고 흐른다

지난날 강가에서 말달리던 선구자

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



용두레 우물가에 밤새소리 들릴 때

뜻 깊은 용문교에 달빛고이 비춘다

이역하늘 바라보며 활을 쏘던 선구자

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



용주사 저녁종이 비암산에 울릴 때

사나이 굳은 마음 길이 새겨 두었네

조국을 찾겠노라 맹세하던 선구자

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



윤해영작사/ 조두남작곡 우리의 가곡 선구자이다.



우리나라 젊은이라면 누구라도 그 노래를 들을 때

대한민국의 젊은이로서 조국을 위해서 무엇이건 해야 한다는

애국심이 가슴속에서 꿈틀 될 것이다.

나 역시 눈을 감고 이 곡을 듣다보면 용두레 우물가에 밤 새소리며

용주사의 저녁 종소리가 들리어오고 잃어버린 조국을 찾기 위하여

말을 몰아 해란강변을 달리는 선열의 거친 삶이 느껴진다.

 

이렇듯 가곡'선구자'는 일제하에서 우리민족이 탄압을 받을 때 불렀던

한이 서려있는 노래이며 용정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우리민족의 혼이

살아 숨 쉬는 의미 있는 노래이다.



90년대 초 나는 중국 연길과 용정을 여러 차례 방문해야 할 일이 생겼다.

당시는 한중수교 이전이여서 공산권 국가의 입국은 여러 가지로 제재가 많았다.

우선 안기부에서 교육을 받아야 했으며, 홍콩으로 가서 비자를 재발급 받아야 했고,

북경으로 날아가서도 하루를 묵은 후 열차 편으로 연길까지 가야만 하는

아주 복잡하고 고단한 여정이었다.



연길에서 버스를 타고 40분을 달리면 해란강이 흐르는 용정에 닿을 수 있다.

이곳은 한국의 역사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데,

용정이라는 지명의 기원과 상징이 되는 용정이라는 우물을

1879년 조선인들이 발견하여 두레박을 설치하여 용두레우물이라 명명하였다 한다.

또한 민족시인 윤동주가 중학교를 이곳에서 다녔고,

박경리의 소설 토지(土地)의 한 배경이기도 한 문학과 연관 깊은 곳이다.



용정중학교는 우리나라의 항일의사들을 배양한 곳으로

아직도 교정에는 윤동주시인의 시비에는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새겨져 있다.

이처럼 용정은 우리나라의 항일역사와 함께 하였기 때문에 곳곳마다

우리 선조의 숨결이 배어 있는 곳이다.



그러나 지난번 용정에 와보니 노래 선구자에서 전해 내려오는

비암산에는 주위로 해란강이 휘돌아 흘러갈 뿐

비암산 정상의 일송정의 소나무는 흔적조차 없었다.

아쉽게도 그 소나무는 일제에 의하여 1938년 베어졌다고 전해온다.

선구자 노랫말에 등장하는 해란강, 용두레 우물, 금문교, 용주사 등이 모두 현존하는데

유독 일송정만이 사라진 것이 안타까워 나는 일송정을 복원하기로 했다.



처음의 계획은 일송정이 있었다는

그 자리에 20년생 백두산 소나무를 옮겨심기로 해서 연변의 책임자를 선정하여

우리나라의 상징인 소나무를 옮겨 심었으나 중국 측의 기술 부족으로 소나무가 죽어버리는 바람에

다음해 8월 15일 광복절을 기해 그 자리에 일송정 정자를 세우고 일송정의 상징인 소나무를

또 다시 심기로 하여 지원 및 확인 차 중국을 재차 방문한 것이었다.



남북분단 상황 하에서, 지난날 우리민족의 독립운동의 요람지였던 용정에

대한민국 사람이가서 독립운동과 관련된 기념사업을 하는 것이 북한에서 보면,

남한의 자본주의의 침투요, 중국 측에서 보면 민족문화의 침투라고 볼 수도 있기 때문에

중국과 북한을 자극하지 않기 위하여 조용히 추진했다.



일단 용정시의 리준일 부시장이 앞장서서 현지의 일을 추진했으며

연변일보 주경화 부사장과 최창규 연변가무단장이 중국 측 연락을 맡아 수고했으며

한국 측에서는 통일부 변경섭 당시 과장이 업무를 맡아서 추진 하였으며 나는 재정적 지원을 맡았다.



지금 비암산 정상에 어렵게 복원된 일송정 팔각정자는 계속 보존되고 있으나

일송정의 상징인 소나무의 복원은 어려움이 많았다.

처음에는 중국측의 소나무 옮겨 심는 기술의 차이로 옮겨 심은

소나무가 죽어서 두 차례 다시 옮겨 심었으며 한 번은 원인 모를 이유로 인하여

멀쩡한 소나무가 잘려나가 그 자리에 소나무를 다시 옮겨 심었다.

한번은 옮겨 심은 소나무가 우리 고유의 전통 소나무가 아니고

만주송이 심어져서 내심 유감이었으나 다시 심는 과정에서

우리 고유의 소나무가  심어져서 잘 자라고 있다.

 

용정시의 책임을 맡은 용정시 문화발전 추진회의 리준일 회장의 노고가 많았다.

 

2001년 9월 3일 에는 용정에서 일송정 복원 10주년 기념행사를 했다.

용정시문화발전추진회와 용정시 정부는 일송정건립 10주년 기념식에서 일송정으로 인하여

지난 10년 동안 해외(한국인을 포함)관광객 100만 여명이 다녀가 외화 수익에 기여한 바가 크다고 하여

일송정 정자 앞에 일송정 건립 기념 표식을 세우고 유공자에게 감사패를 전달해 줬는데

용정시 추진회에서 필자를 초청하여  뜻깊은 기념행사에 함께 참석하였다.

용정시에서는 10여 년 동안 일송정 건립 후에 관람하는

사람들에게 입장료는 받으면서도 정작 관리는 하지 않고 있었다.

일송정을 건립하고 1996년,2001년 매 5년마다 정자 도색 및 보수비도 필자가 계속 지원해 줬다.

 

심지어는 보수비를 지원하러간 필자에게도 관리인들이 입장료를 징수할 정도로 관리가 허술했었다.

입장료 수입에만 신경을 쓰고 정작 중요한 일송정의 관리와 보수에는 무심한 듯 보여 실망스러웠으나

최근에 중국 길림성 용정시 정부에서는 일송정일대를 관광지로 지정하여  관리가 잘 되고 있다.



중국 용정시 정부의 무관심과 여러 가지 우여곡절 속에서도 건립한지

10년이 넘어 가면서 일송정이 잘 보존되게 되어 다행스러우며

중국 조선족문화발전후원회장’의 입장으로서 가슴 뿌듯하다.



최근에 다시 심은 일송정의 소나무는 우리 고유의 소나무로서

우리민족 독립운동의 상징인 일송정의 푸른 솔이 용정시의 뒷산인 비암산에서 굳건히 뿌리박고 살아나

일제의 치하에서 조국광복을 위한 우리 민족의 혼으로 영원히 살아 숨쉬기를 바랄 뿐이다.





                2001. 9. 3



           용정 일송정건립 10주년 기념행사를 다녀와서

              중국 조선족발전후원회장  이  승  래




[스크랩] [차길진의 영혼수첩] 일송정의 비밀 

 원본: gugu8592의 블로그  2006/11/07 오후 2:53 | 기본폴더 

'독립운동가 시신들이 생체실험 마루타로…'

 '일송정 푸른 솔은 늙어 늙어 갔어도.'

 온 국민이 사랑하는 가곡 '선구자'의 첫 구절이다.

이 노래의 배경이 된 중국 용정은 일제강점기 조선독립의 꿈을 품은 독립투사들의 집결지였으며,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했던 시인 윤동주가 묻힌 곳이기도 하다.

 일송정은 용정 비암산에 있는 정자로 한민족의 슬픈 역사를 대변해왔다.

노래에 등장하는 일송정의 푸른 솔, 소나무는 일본에 의해 고사되었다가 최근에야 복원됐으며,

'선구자' 3절 '용주사 저녁종이 비암산에 울릴 때'에 등장하는 용주사는 사라진지 오래.

그나마 바닥까지 드러난 해란강만이 쓸쓸히 용정시를 가로지르며 흐르고 있을 뿐이다.


한때 불교계에서 용주사를 복원하려했지만

중국 당국은 민족정신을 운운하며 허락하지 않았다.


 얼마 전 일송정 근방 모텔을 인수한 사업가가 찾아와 고민을 털어놨다.

사실 그 모텔은 10년 전 지었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폐건물처럼 방치되어 있다가

이번에 그가 주변 땅과 함께 모텔을 인수하면서 새롭게 오픈하게 되었는데 아무래도 뭔가 석연치 않았다.

 '모텔을 짓기 전 다섯 개 정도의 무덤이 있었답니다.

이장을 하려고 무덤을 팠는데, 글쎄 한 여자 무덤에서 시신 없는 관이 나온 겁니다.

' 시신 없는 무덤은 이 여자의 무덤 뿐만이 아니었다.

일송정이 있는 비암산 주변에 이런 무덤이 많다는 소문이었다.

도대체 시신은 어디로 사라진 걸까.

 

 모텔은 제대로 된 운영도 해보지 못하고 문을 닫았고,

이후 10년 동안 주인 없이 폐건물로 방치되는 바람에 귀신이 나온다는 흉흉한 소문까지 돌았다.

이런 모텔을 인수했으니 사업가는 심란할 수밖에 없었다.

고민 끝에 진짜 모텔에 영가가 있는지,

이 영가를 달랠 방법은 없는지 내게 도움을 청하기로 하고 멀리 중국에서 날아왔는데.

 

 나는 할 수 없이 건강상의 문제로 미뤄왔던 구명시식을 올리기로 결정했다.

구명시식을 시작하자 정말 셀 수 없이 많은 영가가 몰려왔다.

영가들은 모두 조국을 위해 독립운동을 하다 돌아가신 분들로

그 중에는 아버님의 친구 분까지 있었다.

 

 천둥소리와 함께 강한 쇳소리가 법당에 진동했다.

근래 이런 구명시식은 처음이었다.

여기저기서 나는 쇳소리는 마치 감옥 철창을 손톱으로 긁는 듯 괴기한 소리였다.

그때였다. 시신 없이 관만 나왔던 무덤의 주인공이 정체를 드러냈다.

 그녀는 용정을 무대로 독립운동을 하던 여류인사로 자신은

일본군에 의해 생체실험용 마루타로 희생되는 바람에 시신이 없다고 말했다.

'오늘 이 자리에 온 많은 독립운동가 영가들은 대부분 일본에 의해 마루타로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일본군은 시신까지 실험용 도구로 사용했습니다.'

 

 순간 가슴이 턱 막혀왔다.

용정은 민족정신이 높았던 지역으로 독립투사가 많아

중국과 일본, 러시아와 조선을 잇는 독립운동의 허브역할을 했던 기점이 아니었던가.

조국의 독립을 위해 온몸을 바쳐 싸운 독립투사들이 생체실험용 마루타로 최후를 맞이했다는

영가의 증언은 충격, 그 자체였다.

 

 영가들은 독립투사들의 정신적 요람이었던 용주사를 복원해달라고 부탁하며

내년 백두산 천도재를 이곳 용정의 한 극장에서 올리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그 말에 나는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와 함께 독립을 염원했던 영가들도 많았기 때문이었다.

겨울밤, 하늘의 별을 바라보며 한민족 독립운동의 성지인 용정 천도재를 가슴에 품어본다.





일송정 소나무.용주사 `복원중' 

[연합뉴스 2005-08-02 06:32]


(룽징(龍井)=연합뉴스) 안정원 기자 = 항일독립운동 당시 한민족의 기상을 상징하는

일송정(一松亭) 소나무와 용주사가 복원되고 있다.

중국 지린(吉林)성 옌볜(延邊) 조선족자치주 룽징시에 위치한 비암산 언덕 소나무는

가곡 `선구자'를 통해 잘 알려진 나무.


이 소나무는 1938년 일본군이 사격 연습용 과녁으로 이용하거나

나무에 구멍을 뚫어 후춧가루를 넣고 쇠못을 박아 고사시킨 뒤

반세기가 넘도록 우리 기억에서 사라져갔다.


이후 룽징시 사회단체 등은 소나무 복원을 위해

1989년과 90년, 91년, 2002년 네차례 나무를 심었지만

누군가에 의해 잘리거나 말라죽었고

일송정 소나무는 현실에서 볼 수 없는 노래말 속의 존재로 남아 있었다.


하지만 지난 2003년 3월 룽징시와 3.13 기념사업회가

인근 승지촌에서 자라던 수령 20여년생 3m 크기의 소나무를 심었고 2년이 지난

현재 해란강을 바라보며 단단히 뿌리를 내렸다.


또 1923년 건립된 뒤 중국 공산화 당시 사라진 용주사도 올초부터

비암산 자락에 새롭게 지어지고 있다.


항일운동의 근거지로 평가받고 있는 용주사는 1990년대 후반

옌볜의 한 불교단체가 복원에 나섰다가 중단된 뒤

올해부터 룽징시와 민간인이 관광 육성 차원에서 굴착기 등을 동원해

1천여평 규모의 부지조성 공사를 진행중이다.


룽징 3.13 기념사업회의 한 관계자는

"풍수학적으로 비암산은 용의 머리에 해당되지만 정작 용의 눈 역할을 담당했던

용주사가 사라져 아쉬움이 컸다"며

"용주사가 복원되면 한민족의 기상도 높아 갈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http://www.idaegu.co.kr/seo/03/56.html

56. 용정의 이모저모



용정이랑 지명을 가진 데는 아름다운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고증에 의하면 용두레우물은 1839년부터 1880년사이에 조선이민인 장인석과 박인덕에 의해 발견 되었다 한다.



◇용두레우물이 있는 거룡우호공원



이 우물은 일찍이 여진족이 쓰던 우물로,

한족과 조선이민들이 우물이 깊고 오가는 길손들이 두레박을 빌리는 일이 잦아

두레박 즉 용두레를 해놓아 그때부터 용두레우물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이 고장 이름도 용두레촌으로 부르게 되었던 것이다.

그후 우물에서 용이 날아올랐다는 전설이 있기도 했다.


1934년 11월에 용두레촌의 이기성의 발의로 우물을 수선하고

약 2미터 높이의 비석을 세워 비문에는 <룡정지명기원지정천>이라 새겼던 것이다.


우물 주위에는 버드나무를 심었는데 문화혁명 때 비석은 자취를 감추었고 우물도 메워졌다고 한다.

1986년 룡정인민정부에서 애국주의 교육과 향토애교육의 차원에서

역사 문물인 용두레우물을 수건하고 비석을 복원했다.


비암산의 일송정은 독립운동과 항일선구자들의 상징으로 겨레의 사랑을 받고 있는 상징으로 자리 매김되어 왔다.


일송정의 유래를 보면, 50여년전까지만 해도 비암산의 깎아지른 벼랑 끝에

아름드리 소나무가 바위에 뿌리를 박고 자라고 있었는데 그 소나무의 모양이

흡사 돌기둥에 푸른 청기와를 얹은 정자와 비슷하다 하여 일송정(一松亭)이라 불렀다고 한다.


용정지구에 거주하는 조선민들은 대를 이어 오면서 일송정을 신성시했는데

여인들은 생남하기 위하여 일송정의 바위에 기도했으며,

농부들은 기우제를 지낼 때도 일송정바위를 두고 지냈으며,

독립운동가와 항실선구자들은 비밀집회 장소로 사용했다.


용정의 백성들이 일송정을 사랑하게 된 또 하나의 원인은

용주사에서 일송정을 바라보면 그 모양이 마치 바위 위에

호랑이가 버티고 앉아있는 것 같았다고 한다.


용정사람들은 단군조상 때부터 호랑이를 길상물로 여겨 왔기에

그 호랑이 즉 일송정이 밤낮으로 용정을 굽어보면서 가난한 사람들의 생활을 헤아려 준다면서

일송정을 더욱 사랑하고 아꼈다고 한다.


일본의 총영사와 현병대장은 일송정 

즉 소나무를 군사들이 실탄연습을 하는 과녁으로 삼고

매일같이 보총과 박격포를 쏘았는가 하면,

줄기의 껍질을 도려내고 구멍을 뚫어 후추씨를 넣고 대못을 박아

그때부터 시들기 시작하여 1938년에 이르러서는 영영 말라 죽었던 것이다.


용정시인민정부와 각계 인사들은 이 유서깊은 유물을 보존하기 위하여

1990년에 작은 소나무를 그 자리에 심고 `일송정’이라는 정자를 세워 오늘에 이르고 있다.


용주사 역시 일송정과 더불어 용정시의 유구한 역사문물의 하나로 1920년에 지어졌다 한다.


용두레우물에서 용이 날아올라 명주를 입에 물고 해란강을 넘어 비암산에 앉아 해란강을 굽어보고 있었다 한다.


조선에서 온 한 스님이 이것을 보고 생각하기를 비암산을 등에 업고 해란강을 앞에 두었으니

사람들에게 희망을 안겨주는 명당터라 여겨 이곳에 절을 짓고

이름을 <용주사>라 부르게 된 것이다.

역시, 문화대혁명의 영향으로 스님과 신도들이 떠나자

절은 관리하는 사람없이 그만 무너지고 말았던 것이다.



◇용두레우물 앞에 선 서지월시인


지금 용정시 인민정부에서는 용주사를 복원하기 위하여 애쓰고 있다고 한다.


이곳의 특산물로는 사과배가 있다.

사과배의 원산지는 용정시 노두구진 소기촌으로

1921년에 최범두가 조선의 목청에서 6개의 배나무 접목을 들여왔는데

그의 형 최창호가 김치움에 보관했다가

그 이듬해 당지의 돌배나무를 접하여 세 그루를 살려내어 배육했다고 한다.


둥글둥글 하면서도 큼직해 햇빛을 받는 쪽이 불그레한 색을 띠어

사과와 비슷하다 해서 사과 배라 부르게 된 것이다.


우리들에게 너무나 익숙한 청산리 대첩이 있는데,

1920년 10월 21일부터 26일까지 김좌진장군이 지휘하는

북로군정서군과 홍범도 장군이 지휘하는 연합부대가

일본침략군 이즈마지대의 토벌에 항격하여 10여 차례 전투를 벌였는데

청산리 대첩인 것이다.


청산리대첩은 1910년부터 있어온

반일무장 전투의 최대의 승리로 일본침략군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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