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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이 도처에 깔리고 공포가 사방에서 조여오는구나. 내가 이 땅에서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적어도 이 시대가 오기 전에 죽었더라면 좋았을텐데 하는 생각을 하루에도 수없이 한다. 세계 전체에 사람이 거의 살지 않았던 때가 있었다는 기록을 먼 훗날에 태어날 우리 후손이 과연 믿을 수 있을까.”
14세기 이탈리아 인문학자 프란치스코 페트라르카가 쓴 이 편지는 확실히 묵시록의 분위기를 닮았다. 이것이 종말론자의 과장된 허풍이 아니었음을 <흑사병의 귀환>을 통해 생생히 확인할 수 있다. 페트라르카의 말처럼, 그 실상은 분명 믿기 힘들다.
“누군가 내 몸에 상처를 내어 피가 그의 얼굴에 튀었다. 그는 그날 병에 걸려 바로 다음날 죽었다.” “피는 감염된 허파에서 목구멍으로 흘러들어 몸 전체를 곪게 하고 결국 녹여버린다. 병은 사흘동안 계속되고 나흘째 되는 날 죽게 된다.” “실성한 어미는 배 아파 낳은 자식을 살해했고 병에 감염되지 않았음에도 단지 슬픔과 공포와 당혹감 때문에 목숨을 끊는 사람들도 있었다.”
1347년 이탈리아 남부 시칠리아 섬에서 시작된 흑사병은 단 3년 만에 북진을 거듭하며 유럽 전역을 휩쓸었다. 당시 유럽 인구의 절반이 죽었다. 이후 300여년 동안 유럽 도시 곳곳에서 기승을 떨쳤다. 1666년 런던에서는 매주 6000여명이 죽어 나갔다.
흑사병 자체는 새로운 이야기가 아니다. 그러나 이 책은 피와 고름으로 가득찬 그 기록을 새로운 관점에서 되짚어 추적한다. 저명한 동물학자인 크리스토퍼 던컨과 역사학자인 수잔 스콧이 함께 펼친 이 흥미로운 연구는 하나의 질문에 대한 집요한 탐구다. ‘도대체 흑사병의 정체는 무엇인가.’ 중세 유럽 교회의 교구 기록 등을 뒤지며 실증적 연구를 펼친 두 학자는 흑사병에 대한 지금까지의 통념을 뒤집는다.
우선 흑사병이 물과 음식, 또는 벼룩과 쥐 등을 통해 전염된 것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의 접촉만으로도 감염됐음을 입증한다. ‘수인성 전염병’이 아니라 ‘바이러스성 역병’이었다는 것이다. 가공할 속도로 삽시간에 번져간 흑사병에 대해 벼룩과 쥐와 마녀는 아무 책임이 없다.
유럽인에게 널리 분포하는 에이즈 항체인 ‘CCR5-델타32’ 돌연변이 인자가 흑사병 항체와 똑같다는 주장도 내놓는다. 이는 흑사병과 300여년 동안 싸운 유럽인에게 남겨진 훈장이다. 별 쓸모 없었던 이 항체는 오늘날 에이즈라는 새로운 전염병에 대한 인간의 방어무기다. 이 사실은 20세기의 에이즈가 300여년전에 사라진 것으로 믿었던 흑사병의 또다른 변종일 가능성을 강력히 시사한다.
저자들은 페스트의 발원지로 동아프리카를 지목한다. 최초의 인류가 탄생해 가장 오랫동안 살아온 그곳이야말로 인간을 숙주삼은 각종 바이러스의 저장고라는 것이다. 저자들은 인류 역사 곳곳에 등장하는 정체불명의 역병들이 흑사병 바이러스의 여러 변종으로부터 촉발된 것이 아니었는지 의심하고 있다.
이런 연구는 의미심장한 가설로 이어진다. 흑사병이 완전히 사라진 게 아니라, 그 이전과 이후를 거쳐 여러 변종을 통해 계속 인류와 함께 해왔다면, 그들은 언제든 다시 나타날 수 있다. 실제로 흑사병의 증세는 에볼라, 마르부르크 병 등 바이러스성 출혈열과 대단히 흡사하다. “중세를 공포로 몰아넣었던 전염병이 (지금) 잠복기에 있을 가능성이 있으며, 언제 또다시 우리를 덮칠지 모른다.”
의학추리소설을 보는 듯한 흥미진진한 서술은 이 묵시록적인 이야기를 더욱 솔깃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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