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광순(高光洵)선생
(1848. 2. 7 ~ 1907. 10. 16)
국가보훈처에서는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국권회복과 조국독립을 위해 헌신하신 고광순 선생을 10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
1848년 2월 전남 담양에서 태어난 선생은 임진왜란 당시 의병을 일으켜 충청도 금산에서 순국한 고경명?고종후?고인후 3부자의 후예답게 가풍의 영향을 받아 어려서부터 절의정신이 남달리 투철하였다.
48세 되던 해에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선생은 국왕에게 상소를 올려 “국사를 그르친 괴수를 죽여 국법을 밝히고 나라를 망치는 왜적을 빨리 물리쳐 원수를 갚아야 한다”고 하면서 을미사변의 원흉들을 단죄할 것을 통렬하게 주장하였다. 단발령이 내려지자 선생은 기우만, 기삼연 등 호남지방 유림들과 연락을 취하고 의병의 규합에 나서 호남의병의 선봉에 섰다.
1906년 6월 최익현 의병이 정읍을 거쳐 순창으로 들어가자 선생은 여기에 동참하고자 달려갔다. 그러나 최익현 등이 이미 출동한 진위대에 체포되고 해산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선생은 울분을 참지 못하여 다시 백낙구, 기우만과 함께 구례서 의병을 일으켰다. 선생은 이들과 함께 군사를 모아 순천을 공략하기로 하였으나 군세가 미약하여 실패하였다.
이 무렵 선생은 광무황제로부터 비밀리에 의병을 독려하는 「애통조」를 받고 감격하여 스스로 토적복수를 맹세했다. 이에 따라 1907년 1월에 선생은 고제량 등의 지사들과 함께 장정 5백여 명을 모아 담양에서 의진을 결성하고 의병장으로 추대되어 양회일, 기삼연 등과 창평, 능주, 동복 등에서 활동하여 ‘호남의병의 선구자’로 명성을 날렸다. 1907년 9월 최후의 결전을 준비하던 선생은 근거지를 마련하여 장기지속의 항전태세를 갖춘다는 ‘축예지계’의 새로운 의병전략을 수립하고 지리산을 근거지로 택하였다. 이에 선생은 의진의 도독으로 남원에서 곡성, 광양, 구례를 거쳐 지리산으로 들어갔다.
선생은 의진의 본영으로 삼은 지리산 연곡사에 나라를 곧 되찾을 수 있다는 신념으로 ‘불원복’(不遠復)이라 쓴 태극기를 세우고 항전의 채비를 갖추었다. 1907년 10월 16일 새벽, 1개 중대와 1개 소대, 순경 등으로 편제된 일제군경은 연곡사를 포위하고 공격을 개시하였다. 최후의 순간을 감지한 선생은 부하들에게 “한번 죽어 나라에 보답하는 것은 내가 평소 마음을 정한 바이다. 여러분은 나를 위해 염려하지 말고 각자 도모하라”고 말하고 결사 항전하다가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선생의 나이 60세였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독립기념관과 서대문 독립공원 역사관에서는 선생의 뜻과 공적을 기리기 위하여 별도의 전시실을 마련하고 관련자료와 사진을 10월 한달 동안 전시할 예정이다.
(1848. 2. 7 ~ 1907. 10. 16)
국가보훈처에서는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국권회복과 조국독립을 위해 헌신하신 고광순 선생을 10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
1848년 2월 전남 담양에서 태어난 선생은 임진왜란 당시 의병을 일으켜 충청도 금산에서 순국한 고경명?고종후?고인후 3부자의 후예답게 가풍의 영향을 받아 어려서부터 절의정신이 남달리 투철하였다.
48세 되던 해에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선생은 국왕에게 상소를 올려 “국사를 그르친 괴수를 죽여 국법을 밝히고 나라를 망치는 왜적을 빨리 물리쳐 원수를 갚아야 한다”고 하면서 을미사변의 원흉들을 단죄할 것을 통렬하게 주장하였다. 단발령이 내려지자 선생은 기우만, 기삼연 등 호남지방 유림들과 연락을 취하고 의병의 규합에 나서 호남의병의 선봉에 섰다.
1906년 6월 최익현 의병이 정읍을 거쳐 순창으로 들어가자 선생은 여기에 동참하고자 달려갔다. 그러나 최익현 등이 이미 출동한 진위대에 체포되고 해산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선생은 울분을 참지 못하여 다시 백낙구, 기우만과 함께 구례서 의병을 일으켰다. 선생은 이들과 함께 군사를 모아 순천을 공략하기로 하였으나 군세가 미약하여 실패하였다.
이 무렵 선생은 광무황제로부터 비밀리에 의병을 독려하는 「애통조」를 받고 감격하여 스스로 토적복수를 맹세했다. 이에 따라 1907년 1월에 선생은 고제량 등의 지사들과 함께 장정 5백여 명을 모아 담양에서 의진을 결성하고 의병장으로 추대되어 양회일, 기삼연 등과 창평, 능주, 동복 등에서 활동하여 ‘호남의병의 선구자’로 명성을 날렸다. 1907년 9월 최후의 결전을 준비하던 선생은 근거지를 마련하여 장기지속의 항전태세를 갖춘다는 ‘축예지계’의 새로운 의병전략을 수립하고 지리산을 근거지로 택하였다. 이에 선생은 의진의 도독으로 남원에서 곡성, 광양, 구례를 거쳐 지리산으로 들어갔다.
선생은 의진의 본영으로 삼은 지리산 연곡사에 나라를 곧 되찾을 수 있다는 신념으로 ‘불원복’(不遠復)이라 쓴 태극기를 세우고 항전의 채비를 갖추었다. 1907년 10월 16일 새벽, 1개 중대와 1개 소대, 순경 등으로 편제된 일제군경은 연곡사를 포위하고 공격을 개시하였다. 최후의 순간을 감지한 선생은 부하들에게 “한번 죽어 나라에 보답하는 것은 내가 평소 마음을 정한 바이다. 여러분은 나를 위해 염려하지 말고 각자 도모하라”고 말하고 결사 항전하다가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선생의 나이 60세였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독립기념관과 서대문 독립공원 역사관에서는 선생의 뜻과 공적을 기리기 위하여 별도의 전시실을 마련하고 관련자료와 사진을 10월 한달 동안 전시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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