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헌 싸롱( 3월 5일 조선일보)
조선조에 의병대장을 많이 배출한 집안이 제봉(霽峯) 고경명(高敬命:1533 ~1592) 집안이다. 호남가단(湖南歌團)의 중심지이자, 풍류선비들의 살롱이었던 소쇄원(瀟灑園)의 단골멤버가 고경명이었다. 난리가 나자 60살의 나이로 의병들을 이끌고 금산전투에서 전사한다. 이때 제봉이 수천 명의 의병을 소집하였던 명문장이 마상격문(馬上檄文)으로 전해진다. 제봉의 둘째 아들인 고인후도 아버지와 같이 전사한다. 큰아들인 고종후는 이때 같이 죽지 못한 것을 한(恨)으로 여겼다. '너는 살아서 집안을 이어야 한다'는 어머니의 만류를 뿌리치고 1년 뒤 진주성 2차 싸움에 참가하여 숙부인 고경형과 함께 전사하였다. 전사한 두 아들은 모두 대과에 급제한 수재들이었다.
구한말 일본이 또 침략을 해오니까 이 집안은 또 의병활동을 했다. 제봉의 후손인 녹천(鹿川) 고광순(高光洵:1848~1907)이 연곡사 전투에서 13명의 동지들과 함께 순절(殉節)한다. 이때 녹천의 나이 60세였다. 제봉과 그 후손인 녹천 두 사람 모두 나이 60세에 의병장으로 일본군과 싸우다 죽는 공통점이 있다. 녹천이 전사하자 다시 고광수(高光秀:1875~1945)와 고광문(高光文:1864~1944)이 의병활동을 이어갔다. 이들은 천석 재산을 의병활동에 바쳤고, 해방될 때까지 금강산에 숨어서 지내야만 하는 고초를 겪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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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명문가 가운데 국가적 위기 때마다 살신성인을 실행한 가문으로 창평고씨 제봉 고경명의 후손들을 빼놓을 수 없다. 제봉 고경명(1533~92)은 임진왜란 때 자신의 두 동생 및 두 아들과 함께 전사했다. 제봉과 둘째아들 학봉 고인후(1561~92)는 금산전투에서, 큰아들 고종후(1554~93))는 1년 후 진주성전투에서 전사했다. 이뿐만 아니라 제봉의 동생인 경신은 각각 전투에 필요한 말을 구하고 돌아오다 풍랑을 만나 익사했는가 하면 동생 경흥은 진주성 전투에서 전사했다. 일가족 5명이 국가적 위기에 목숨을 바친 것이다.
학봉 가문에서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가문 경영에 있어 이미 100여 년 전에 유례없는 ‘투톱 체제’가 형성됐다는 점이다. 투톱 가문 경영의 핵심은 ‘의병운동’과 ‘신교육운동’이었다. 먼저 학봉의 11세 종손인 녹천 고광순(1848~1907)은 구한말 왜구의 침략이 노골화되자 의병장으로 나서 제봉과 같은 나이인 60세에 순국했다. 제봉의 호연지기 정신이 300여 년의 시공간을 뛰어넘어 재현된 것이다. 너무도 닮은꼴의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재현이었다.
방계인 춘강 고정주(1863~1933)는 신교육운동을 주도했다. 학봉의 10세손인 춘강은 구한말 규장각 직각(直閣·도서관장에 해당) 벼슬을 하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낙향해 창흥의숙(호남 최초의 근대학교)을 세우고 신교육운동에 뛰어들었다. 춘강은 동아일보를 창업한 인촌 김인수의 장인이고 동아일보 사장을 역임한 고재욱의 조부다. 또 춘강의 후손인 고일석(무등양말 창업자)은 창평고를 설립하며 그의 유지를 이었다. 창평고는 현재 명문고로 이름을 얻고 있다.
이와 같이 학봉 가문은 한 손엔 칼, 한 손엔 펜을 들고 국가적 위기가 닥쳤을 때 국난 극복에 힘을 쏟았다. 우리 역사상 이런 문과 무가 조화된 가문 경영은 결코 흔치 않다. 자칫 노선상의 대립으로 일가 간의 불화로 얼룩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학봉의 14세 종손인 고영준 씨(68)는 일가 간 서로 불화를 일으키지 않는 이유로 대대로 내려오는 가훈인 ‘세독충정(世篤忠貞)’을 꼽았다. 세독충정은 제봉 고경명의 좌우명으로, ‘인간이 세상을 살아감에 있어 나라에 충성하고 항상 올바른 마음을 굳게 지녀야 한다’라는 정신을 담고 있다.
학봉 가문은 우리 역사상 국가적 위기 앞에 호연지기를 발휘한 최고의 명가로 꼽힌다. 그것은 다른 가문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문과 무의 조화를 통해 가문 구성원끼리 반목하지 않고 오히려 서로간의 경쟁심을 고양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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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소나 식사는 싸거나 비싸거나 내 초이스지만 기름값이 문제였다
서울보다 한 뼘이라도 더 먼 일산에서 저 아랫녘 여수의 향일암까지 2박 삼일을 중간중간 이곳저곳 들려 오르락 내리락하니
간단하게 25만원을 상회하고 톨게이트 비용까지 교통비는 좀 억울한 부분이였다
여덟시 경 간식 보따리 풀러 간단히 아침을 해결하고 서둘러서 본격적인 뿌리 다지기 행보를 시작했다
나야 어차피 운전면허도 없는 사람이니 그렇다치지만 남편은 우왕좌왕 오히려 한 술 더 뜬다
시골길에는 사람이 드물고 간혹 보이는 이들은 한참 연만하신 분들이 시골 길에서 길 찾아 가기가 여간 힘든 노릇이 아니다
땅은 문중에서 내어 놓고 나라에서 준 30억으로 지엇다는 녹천 고광순 할아버지의 사당은 ㅡ이전 글 참조 ㅡ
아직 완공 전이였지만 주변 경관도 좋을 뿐 아니라 그 규모가 사뭇 커 보였다
배롱 나무들이 가로수처럼 심어져 있었고 근처 이곳저곳에는 문중 어르신들의 무덤이 산재해 있었다
아직 옮겨오지 못했다는 녹천 할아버지 비를 물어물어 찾아서 인사 드리고 결국 종가집의 소재는 창평 면사무소에 물어보기로 했다
다행히 종손ㅡ 고영준님의 핸펀을 알아내어 통화하니 광주에서 오고있는 중이라며 20분만 꼼짝말고 기다리라는 신신당부..
일면식도 없는 것을 종친이라는 이유만으로 베푸는 情이 따뜻하게 느껴졌다
가까운 식당에서 문중 사람 두분과 같이 점심을 하며 조상님들의 칭송에 침이 마르고 아웃사이더 격인 나는 썩은 미소만 날릴 수 밖에..
게다가 도가니탕이라는 줄 알고 받은 우족탕은 생전 처음이라 소 발이라는 생각에 영 찝집하더니
저녁 무렵에는 결국 평생에 두 세번 겪었을까 말까한 소화불량으로 한 고생을 했다
헤어져서 14대 어르신인 제봉(고경명) 할아버지를 모신 광주의 포충사에 가서 기념관을 둘러본 후 참배도 드리고
그 곳 사무실 사람의 안내로 근처의 가까이에 있는 제봉 할아버지 생가를 찾았다
병충처럼 처진 솔 숲에 둘러싸인 조금은 기운 듯 아주 오래된 기와집은 낡은 모습조차 기품있고 아름다웠다
동백 나무 여럿이 봉긋한 봉우리를 열듯말듯 발갛다
젊은 아낙이 방문을 빼꼼히 열어 보더니 포충사 직원의 뭐라는 소리에 슬그머니 방문을 닫는다
미처 누군지 묻지 못한것이 못내 아쉽다
머지않은 곳에는 영어마을이라는 입간판... 아무~ 이유없이 거냥 우습다
이래저래 예정보다 늦어졌다
길 눈이 어두운 두 늙은이 자연히 구례로 향하는 맘이 바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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