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 단양]정도전과 도담삼봉
우근 김 정 희
여행지를 몇번이나 가 보아야 할까?
도담삼봉에 가면 나는 항상 한자리에서 몇시간씩을 보내곤 했다.
그런 여행을 나는 좋아한다.
깃발 여행은 그래서 절대로 사양한다.
내가 아는게 얼마나 될까?
단양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도담삼봉이 개발이라는 미명하에 주위 경관이 아쉽고
안타깝기만 하다.
어딘가에 도담삼봉을 담은 풍경사진이 있을거다.
개발도 좋지만 그대로 그대로 유지되기를 바란다.
도담삼봉을 바라 보면서 고려만 썩어 있는가!
우리나라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우리들이 가져가야 할 정신은 도대체 어떤 것인가.
후손에게 우리는 무엇을 남겨 주어야 하는가.
밖에서 지금 천둥번개가 내내 큰 소리를 지르고 있다.
우리는 누구나 다 왔다가 간다.
정도전이 어릴때 놀았던 도담삼봉에서 나는 오늘 사진으로 담아 본다.
마음 한자락을 도담삼봉에 내려 놓았다.
며칠전 많은 비가 내려 물도 흐리고 물도 봄치고는 만수에 가깝다.
다시 올때 도담삼봉은 내게 무슨 말을 하는지 듣고 싶다.
도담삼봉의 야경이 보고 싶었다.
이 등불로 조명된 야경사진을 담고 싶다.
보트를 타고 싶다.
도담삼봉에서 시 한수를 읊으면서 주거니 받거니를 하고 싶다.
배가 아닌 정자에 앉아서 혹은 기대고 편안한 자세로 마시고 취하고 싶다.
인생이 별거더냐.
왔으니 가야 한는데 나는 어떻게 살다가 가야 하는가.
도담삼봉에 물어보니 오늘 물 색깔 처럼 살아 보라고 한다.
정도전에 대해서 여러가지 이야기가 난무하다.
그래서 오랫만에 역사공부를 하고 싶어서 정도전을 찾아 보았다.
삼봉 정도전은 역사적인 큰 인물이라 말하고 싶다.
어느 사회이든지 부패되면 다시 바꾸어야 한다.
누구나 다 권력을 갖기만 하면 영원하리라 생각하지만 권력은 추풍낙엽이라 말하셨던
외할아버지 말씀이 다시 생각난다.
정도전이 옳은가!
정몽주가 옳은가!
역사가 더 흘러가야 판단 할 수 있을까?
어제는 가고 없다고 말하지만 없어지지 않는다.
미래는 오지 않아서 없는가.
우리나라 역사책을 읽으면서 한숨만 저절로 날때가 많다.
누가 역사책을 이렇게 만들어 놓았을까?
사대 서고지를 다 없애려고 했지만 봉화 서고지는 남아 있다.
역사를 다시 조명해야 한다.
인물도 제대로 다시 평가해야 한다.
역사는 우리것으로 부끄럽지 않게 다시 조명 해 보자.
부끄러운 선조들만 살다가 간 나라가 아니다.
정도전
정도전 | |
문헌공 삼봉 정도전 영정 | |
출생 | 1342년 경기도 양주[출처 필요], 또는 경상북도 영주[1], 또는 경상북도 봉화[출처 필요], 또는 충청북도 단양[2] |
---|---|
사망 | 1398년 한성 남은 사택 |
사인 | 타살 |
거주지 | 한성부 |
국적 | 고려, 조선 |
별칭 | 삼봉(호), 종지(자), 문헌(시호), 봉화백[3] |
학력 | 1362년 문과 급제 |
직업 | 문인, 정치인 |
배우자 | 경숙택주 경주 최씨(최습의 딸) |
자녀 | 정진, 정영, 정유 |
부모 |
정운경(부), 영천 우씨(모)[출처 필요]
|
정도전(鄭道傳, 1342년[4] ~ 1398년 8월 26일)은 고려 말, 조선 초의 유학자이자 정치가이다.
자는 종지(宗之). 호는 삼봉(三峯),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아버지는 형부상서 염의선생 정운경이고 어머니는 우연의 딸 영천 우씨이다.
본관은 봉화(奉化)이다.
조선 건국의 일등 공신이자 최고 권력자였던 그는 조선의 이념적 바탕을 마련하고 모든 체제를 정비하였다.
신덕왕후 강씨 소생 방석 등을 세자로 추대하였다가 이방원과의 왕위 다툼에 의한 1398년 제1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에게 살해되었다.
목차 |
[편집] 생애
[편집] 출생
정도전은 1342년 아버지 형부상서 정운경과 어머니 영천 우씨 사이에서 맏아들로 태어났다.
출생지에 대해서는 경기도 양주, 경상북도 영주와 봉화, 그리고 충청북도 단양이라는 설이 있으나 확실하지 않다.
그의 호 삼봉은 삼각산과 같이 학문과 경술에 우뚝하라는 뜻으로 이존오,박의중,이집,김구용 등이
1369년 가을 삼각산 그의 집을 찾아와 지어준 것이라고 한다.[5]
정도전은 어려서부터 매우 총명하고 학문을 좋아하였으며 독서를 좋아하였다.
그의 아버지 정운경은 이곡과 나이를 잊은 두터운 친교가 있었기 때문에 이곡의 아들 이색과 가깝게 지낼 수 있었고,
성균관에서 스승과 제자로 만나 성리학에 대해 한층 심도있게 연구하는 계기가 되었다.
[6] 이때 그와 함께 공부했던 이들은 정몽주, 박의중, 윤소종, 이존오, 이숭인, 설장수(偰長壽) 등이며,
성균관에서 경사(經史)를 강론하였는데 특히 문장과 성리학에 능하였다.
[편집] 관직
공민왕 때인 1360년 성균시에 급제한 데 이어 2년 뒤1362년 문과 동진사로 급제하여
1363년 충주사록(忠州司錄)으로 초임 관로에 나아갔다.
전교시주부(典敎寺主簿)·통례문지후(通禮門祗候)를 지냈다.
그뒤 성균박사, 태상박사 등의 요직을 두루 거치면서 출세를 하였다.
그러나 그의 벼슬살이는 순탄하지 않았다.
공민왕이 신돈을 기용하자 그는 벼슬을 버리고 삼각산 옛집으로 낙향해서 은둔생활을 하였으며,
아버지와 어머니가 정월과 12월에 연이어 작고하여 영주에서 3년간 여묘살이 하며 학문연구와 교육에 힘썼다.
[6] 당시 관료들은 백일탈상이 관례였으나 그는 성리학적 가례에 따라 3년상의 예를 다 하였다.
70년 예조정랑 겸 성균`태상박사(禮曹正郞兼成均太常博士)가 되어 전선(銓選)을 관장하였다.
신돈이 제거된 뒤 정도전은 기용됐으나 1374년(공민왕 24) 공민왕이 살해되면서 친명파에 속했던
정도전은 다시 정치적 위기를 겪는다.
그때 정국은 친원파(親元派)와 친명파(親明派)가 대결하고 있었다.[6]
1375년(우왕 1) 원나라 사신이 왔을 때 원나라의 사신을 맞아들이는 문제로 조정에서는 신흥사대부와 권신들 간에 대립이 일어났다.
이인임과 지윤 등은 사신을 맞아들이자고 한 반면, 정도전을 비롯한 신흥사대부들은 이에 반대했다.
그러나 이인임 등은 그들의 주장을 물리치고 원나라 사신을 맞이할 준비를 하였다.
이인임은 정도전을 영접사로 보내려고 했다.
[6] 이에 정도전은 “사신의 머리를 베든지, 그렇지 않으면 묶어서 명나라로 보내버리겠다.”라며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리하여 정도전은 이인임·경부흥(慶復興) 등의 권신의 진노를 사 나주의 속현인 회진현(會津縣)으로 유배되었다.
1377년에 유배에서 풀려나 4년간 선향 영주에서 학문과 후진을 양성하며 지냈다.
이때 정몽주가 맹자 한질을 보내와 하루 반장 또는 한장씩 읽으며 완전히 이해를 한 다음 뒷장을 넘겼다고 한다.
그가 즐겨 읽었던 《맹자》는 군주도 잘못하면 신하가 벌을 줄 수 있다는 내용이 담긴 책이다.
그 뒤 1381년 가을 삼각산 옛집으로 돌아와‘삼봉재’(三峯齋)를 열어 학문과 교육에 힘썼다.
전국에서 많은 재생들이 운집하여 교육의 즐거움을 향유하였으나 그 또한 오래가지 못했다.
전임 재상이 재실을 헐어 버리는 등 박해를 함으로써 재생들을 이끌고 부평부사 정의에 의탁하여
부평 남촌으로 이사하여 후생 교육사업을 재기 하였으나 이곳 역시 재상 왕모가 별장을 짓는다고 학숙을 폐쇄하였다.
계속되는 멸시와 박해로 다시 김포로 옮겨야 했다.[6]
1383년 가을 드디어 정도전은 비장의 결심을 하고 함주에 있는 동북면도지휘사(都指揮使) 이성계(李成桂)를 찾아갔다.
외적의 침략을 물리쳐 고려의 새로운 영웅으로 떠오른 이성계를 만나기 위해 함흥으로 직접 찾아간 것이다.
정도전은 부패한 관료로 인한 피폐한 백성들을 구제하고 도탄에 빠진 나라를 구하는 길은
오직 혁명 밖에 대안이 없다고 결론 짓고, 이를 실행하기 위해서는 이성계의 군사력이 절실하였던 것이다.
당시 조우에서 정도전은 이성계 휘하의 정예 군대와 일사분란한 지휘통솔에 감탄을 금치 못했고,
이성계 또한 정도전의 심오한 학문과 원대한 국가경영에 대한 경술에 감탄해 마지 않았다.
정도전은 이성계 휘하의 동북면 군사들의 모습을 보면서 그들이 군령을 엄하게 지킬 뿐 아니라
무기들 또한 잘 정비되어 있으며 훈련에도 열심히 임하고 있다는 것을 파악했다.
정도전은 이성계를 훌륭하다고 칭찬하며 “이 정도의 군대라면 무슨 일인들 성공시키지 못하겠습니까?”라고 넌지시 떠보았다.
평생 전쟁터를 누벼 온 이성계가 정도전의 말뜻을 알아채지 못할 리 없었으나, 무슨 뜻이냐며 반문하였다.
이에 정도전은 동남방의 왜구를 소탕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편집] 개혁 정치
[편집] 이성계와 역성혁명
정도전은 그날 밤 이성계와 밤새도록 술을 마시며 세상 돌아가는 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다음날 정도전은 군영 앞에 서 있는 오래된 소나무의 껍질을 벗기고 그 위에 이성계를 위해 시 한 수를 지었다.
아득한 세월에 소나무 한 그루
몇 만 겹 푸른 산속에 자랐도다.
잘 있다가 다른 날에 서로 만나 볼 수 있을는지?
인간 세상 굽어보다가 곧 큰 발자취를 남기리니.
[출처 필요][용비어천가]
이 시에서 정도전은 이성계를 늙은 소나무에 비유하고 있는데,
앞으로 때가 되면 이성계는 천명(天命)에 따라 세상을 구원하러 나서야 하며,
자신과 손잡고 큰일을 하여 위대한 역사적 과업을 남기게 될 것이라는 자신의 속마음을 은근히 드러내었다.
이성계는 개혁을 주장하는 정도전에게 협력하기로 하고 지원을 약속했다.
그의 인물됨됨이에 매료된 정도전은 그의 막료가 되었고 이후 역성혁명까지도 논의하게 되었으며
이 일을 계기로 정도전은 이성계의 참모로서 큰 야망을 품게 되었다.
1384년 임용과 동시에 성절사(聖節使) 정몽주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85년 성균관 제주(祭酒)와 86년 외보를 요청 남양부사(南陽府使)로 도임하여 선정을 베풀어 부민들로부터 칭송을 받았다.
1388년 성균관 대사성(大司成)으로 올랐다가 그해 음력 6월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으로 정권을 잡게 되자
조준과 함께 이성계의 우익이 되어 토지개혁을 단행하였다.
그해에는 우왕을 내쫓고, 이인임의 주장으로창왕을 세웠다.
이때 정도전은 힘껏 이성계를 뒤에서 도와주었다.
정도전은 밀직부사에 올라 조준 등과 함께 전제(田制) 개혁에 착수했다.
조세 제도와 토지 제도를 바로잡음으로써 새 정권을 창출하는 데 필요한 자금 확보는
물론 백성들의 지지를 이끌어 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어 조민수 등 구세력을 제거함으로써 차근차근 조선 건국의 기초를 닦아 나갔다.
1389년 음력 11월 여주로 유배된 폐주 우왕이 자신을 찾아온 김저(金佇)와 정득후(鄭得厚)에게 보검을 주며
곽충보(郭忠輔)와 함께 이성계를 제거하라는 밀명을 내린 음모사실이 곽충보의 고변으로 발각되었다.
이에 이성계는 우왕을 서인으로 강등시켜 강화도로 유배시켜 버렸다.
정도전은 정몽주, 조준과 함께 뜻을 같이해 창왕을 폐위시키고, 공양왕을 추대하여 폐가입진을 실현하였다.
1391년에 이성계는 삼군도총제부를 만들고 군대를 장악하였고, 정도전은 우군도총제의 자리를 맡았다.[7]
[편집] 조선의 건국
1392년(공양왕 4) 4월 이방원이 선죽교에서 정몽주를 격살함으로써 고려 왕조를 지지하는 세력은 구심점을 잃고 와해되었다.
6월 정도전은 비로소 소환되어 정치 일선에 나서서 새왕조 창업을 위한 정지 작업을 단행하여
7월17일 공양왕의 선양을 이끌어 내어 이성계를 임금으로 추대하여 새 왕조 조선을 건국하였다.
그는 당시의 자신과 이성계의 관계를한 고조 유방과 그의 참모 장량에 비유하였는데,
이 말은 한 고조가 장량을 이용해 한나라를 세운 것이 아니라 장량이 한 고조를 내세워 자신이 원하는 제국을 건설했다는 뜻으로,
자신 또한 태조를 내세워 자신이 원하는 새로운 왕조를 건설한 것이며,
조선 건국의 실질적인 기획자가 곧 자신이라는 뜻이다.
조선 왕조가 건국되자 정도전은 왕명을 받아 새로운 왕조의 정책 방향을 제시하는 17조의 〈편민사목〉을 지어 발표하였다.
또한 조선 건국을 반대한 정적 등 반대파를 일소하였다.
[6] 조선을 건국하는 데 일등 공신이 된 정도전은 문하시랑찬성사(門下侍郞贊成事) 겸 판의흥삼군부사(判義興三軍府事) 등의
군국의 요직을 겸함으로써 권력을 손에 쥐어 조선의 핵심 실세가 되어
행정, 군사, 외교, 교육에 이르기까지 조선의 전반적인 문물 제도와 정책의 대부분을 직접 정비해 나갔다.
태조로 즉위한 이성계는 나랏일을 모두 정도전에게 맡겼다.
그리하여 정도전은 명실상부한 조선의 2인자가 되었으며,
건국 사업에 크게 이바지하여 새 나라의 문물 제도와 국책의 대부분을 결정하였다.
즉 한양 천도 당시 궁궐과 종묘의 위치 및 도성(都城)의 기지를 정하고,
각 궁전 및 궁문의 칭호, 도성의 8대문 및 성안 48방(坊)의 이름 등을 제정하였다.[8]
“재상의 나라”를 꿈꾸었던 정도전은 훌륭한 재상을 선택하여
그 재상에게 정치의 실권을 부여하여 위로는 임금을 받들어 올바르게 인도하고,
아래로는 신하들을 통괄하고 백성들을 다스리는 중책을 부여하자고 주장하였다.
즉, 정도전은 임금은 단지 상징적인 존재로만 머물고 나라의 모든 일은 신하들이 회의를 거쳐 결정하는 나라를 이상적인 나라로 생각하고 있었다.
태조 때의 정치는 태조와 그의 신임을 받은 정도전 등 소수의 재상이 이루었다.
한편 조선은 각 지역에 관리를 파견하여 “중앙집권 관료국가”가 되었다.
이것은 이전까지 지방 세력을 인정하는 봉건국가와는 비교되는 정체였다.
정도전은 조선이 갖춰야 할 정부 형태와 조세 제도는 물론 법률 제도의 바탕을 만들었으며,
불교를 배척하고 유교를 나라의 통치 이념으로 확립시켰다.
또한 정도전은 수도 천도를 결정하고 수도 이전을 단행하였다.
또한 노비 해방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며, 병제(兵制)를 대폭 개혁하여 진법(陳法)·진도(陳圖)를 지어 장병을 훈련하고,
1397년(태조 6)에 동북면 도선무순찰사(東北面都宣撫巡察使)가 되어
지금의 경원(慶源 : 함경북도) 지방에 가서 성보(城堡)를 수치(修治)하고 주·군과 역참을 획정하였다.
정도전은 고려 말 배불론(排佛論)의 주동자로 철두철미 불교의 말살을 기도하고
유교로써 문교(文敎)를 통일하고자 하여 주자학으로 불교와 노자교(老子敎)를 압도코자 유감없이 공격을 가하였다.
불교의 자비는 친함과 안면이 있음에 따라 차별이 있고,
불교는 인류 자연의 성정에 위배하여 사회 조직을 파괴하는 것이며,
석가가 인세(人世)를 이탈하여 자립자영코자 아니하였음은 타력에 따라 기생(寄生)코자 한 것이고
특히 선종(禪宗)과 같은 것은 인심을 현혹하는 마종(魔宗)이라고까지 비판하였으나
아무도 이에 응대하는 불교인이 없었던 유학의 대가였다.
[편집] 한양 천도
한양을 조선의 새 수도로 결정한 것은 물론, 서울의 도시 설계에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경복궁 자리도 정도전이 잡은 것이라고 한다. 무학대사는 지금의 청와대 자리에 궁궐을 세워야 한다고 했으나 정도전은 반대하였다.
그는 무학대사가 추천한 위치는 동향이며 터가 너무 좁아 왕도로 적당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결국 정도전의 뜻대로 경복궁이 현재의 자리에 세워지게 되었다.[6]
태조의 허락 아래 종묘와 사직, 궁궐의 터 등이 들어설 자리를 정했을 뿐만 아니라
각종 궁궐 및 각 전각의 이름은 모두 정도전이 손수 지었다.
[8] 그 밖에도 종묘의 제례법과 음악도 정도전이 제정한 것이었다.
특히 〈몽금척〉(夢金尺), 〈수보록〉(受寶籙), 〈문덕곡〉(文德曲) 등 수많은 악장을 지어
태조의 공덕을 찬양하였는데, 이 악장은 조선조 5백 년간 중국에서 연주되었다.
[편집] 조선건국 이후 정권 투쟁
신덕왕후 강씨는 자신의 아들을 왕세자로 책봉하기를 간절히 소원 하였고,
태조 이성계 역시 방석을 총애하여서 대소신료들은 태조의 의중에 따라 여덟째 아들 방석을 세자로 책봉하였다.
태조의 전처 한씨 소생 아들 중 다섯째 인 이방원은 정치적 야심이 가장 컸던 탓에 이 일로 격분하였다.
[9] 왕세자를 누구로 임명하느냐는 문제에 관해서 당초의 의론은 "시절이 태평하면 적장자를 세우고,
난세에는 공이 많은 왕자를 세워야 한다."는 원칙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왕과 왕비의 의도와 배극렴의 주장으로 의안대군 이방석을 왕세자로 세웠다.
그러나 전처 한씨 소생의 왕자들은 자신들을 배제하고, 중전의 아들 막내가 왕세자가 된 것에 대해 모두 분개하였다.
이것이 훗날 제1차 왕자의 난의 원인이 되었다.
조선 창업에 성공한 정도전은 세자책봉에 이은 새나라 문물과 제도정비에 착수했다.
그는 국가의 통치규범인《조선경국전》, 중국과 우리나라의 역대 제왕들의 치적을 담은
《경제문감》(經濟文鑑),《경제문감별집》(經濟文鑑別集) 등의 편찬을 주도하여
새로운 치국의 대요와 관제 등 모든 제도와 문물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이어 국방력 강화와 고구려 고토수복을 위한 공병제도를 도입 군의 통수권을 국가에 귀속 시키기 위한 사병을 혁파하였다.
또 조세수급의 안정을 통하여 국가 재정의 건전성 확보하기 위하여 경자유전의 원칙에 입각한 과전법을 단행하는 등 일소에 혁신하였다.
그러나 급진적인 정책추진에 대한 반발하는 부류들이 태동되었다.
1395년 일부 반발 세력에 의한 국가기밀 누설로 인하여 갈길 바쁜 조선은 명나라와 외교적 분쟁에 발목이 잡히고 말았다.
신흥국 조선의 일신을 경계하였던 명제 주원장은 조선의 정조표전(正朝表箋) 문구에
명나라를 모독하는 글귀가 있다는 걸 문제삼아 태조에게 정도전을 자신에게 넘겨줄 것을 요구하였다.
이에 태조는 정도전은 병에 걸렸다거나 나이가 55세로 많다거나 하는 등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명나라의 소환에 응하지 않았다.
하지만 주원장은 계속해서 그의 소환을 요구하였고, 이를 무마하기 위한 조처로 일선에서 물러나 동북면도선무찰리사로 체직 된다.
그러나 조선의 요동공벌은 건국초기부터 면밀히 계획된바 간과할 수 없기에
정도전은1397년 2월 태조 이성계의 중임으로 복귀하여 요동 정벌을 위한 군사훈련에 박차를 가한다.
애석하게도 그의 요동공벌 출정은 조준의 반발로 주춤하는 사이
하륜의 부추김과 이숙번이 지지한 이방원의 반란에 살해됨으로 인하여 무산되고 말았다.
[편집] 죽음
정도전은 신덕왕후 강씨 소생인 이방석을 세자로 세운 일로 인해, 이방원과 대립하게 되었다.
이에 앙심을 품은 이방원은 그가 한씨 소생의 모든 왕자들을 궁으로 불러 들인 후에 신의왕후 죽일 계락을 세웠다고 누명을 뒤집어 씌워 살해하였다.
[7] 그러나 이방석의 세자 책봉은 정도전이 아니라 태조 이성계가 한 일이고,
정도전이 왕자들을 암살하는 계략을 실제 세운 근거가 없다.[8]
1398년(태조 7) 음력 8월 26일 밤에 그는 이방원(태종)의 습격을 받아 죽었다.
정도전은 그때 송현에 있는 남은의 별장에서 남은, 심효생 등과 함께 이방원(태종)의 사병에게 무참히 살해되었다.
태종은 정도전이 세자 이방석(芳碩)에게 당부하여 먼저 난을 일으켰기 때문에 군사를 일으켰다고 하나
실은 태종이 정권을 잡기 위하여 일으킨 변란으로 희생된 것이다(→제1차 왕자의 난).
[편집] 사후
정도전의 묘의 위치는 알려지지 않았다.
봉화정씨 을류보에 경기도 광주(廣州) 사리현(士里峴)에 있다는 기록이 있고,
柳馨遠(1622-1673)의 ‘동국여지지(東國輿之地)’ 과천현조에는 현동북 18리에 있다는 기록이 있다.
[6] 정도전과 그 일가는 1398년 음력 8월 태종(이방원)에 의해 몰살당하였으나,
맏아들만 살아 남아 태종 11년에 판 나주목사로 중용되어세종 대에 형조판서를 역임하였다.
조선 제22대 왕인 정조는 정도전의 저서 《삼봉집》을 간행했다.
1865년 흥선대원군은 경복궁을 중건하고 그 설계자인 정도전의 공을 인정해 그의 관작을 회복시켜 주었다.
[6] 또한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정도전을 복권하고 문헌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그뒤 고종은 후손들이 사는 경기 양성현(안성군 공도면, 평택시 진위면)에 사당을 건립하였다.
[10] 고종은 공의 위업을 기려 유종공종(儒宗功宗) 현판을 특필하여 하사하였다.
사당은 1986년 3월 향토유적 2호로 지정되었다.[10]
2003년 11월, 2007년 12월 정도전 재평가와 그의 학문 연구를 위한 삼봉학 학술회의가 열렸다.[11]
[편집] 가계
- 아버지 : 정운경(鄭云敬, 1305 ~ 1366)
- 어머니 : 영천 우씨(榮川禹氏) 산원(散員) 우연(禹淵)의 여식(女息)
- 최씨: 경주최씨(慶州崔氏) 찬성(贊城) 최습(崔濕)의 여식(女息)
- 아들 : 정진 (조선) 정진(鄭津, 1361년 ~ 1427년)
[편집] 주요 저작
- 《삼봉집》(三峯集)
-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
- 《대명률직해》(大明律直解)
- 《경제문감》(經濟文鑑)
- 〈경제의론〉(經濟議論)
- 《불씨잡변》(佛氏雜辨)
- 《심문천답》(心問天答)
- 《심기리》(心氣理)
- 《학자지남도》(學者指南圖)
- 《진맥도결》(診脈圖結)
- 《고려국사》(高麗國史) 37권
- 《상명태일제산법》(上明太日諸算法)
- 《오행진출기도》(五行陣出寄圖)
- 《태을72국도》(太乙七十二局圖)
- 《진법》(陣法)
- 《강무도》(講武圖)
- 〈궁수분곡〉(窮獸奮曲)
- 〈납씨가〉(納氏歌)
- 〈정동방곡〉(靖東方曲)
- 〈문덕곡〉(文德曲)
- 〈신도가〉(新都歌) 등.
[편집] 평가
[편집] 당대의 부정적 평가
그는 조선의 개국공신이었고, 한성부의 각 전각과 궁궐의 이름을 지은 인물이었다.
그러나 사림에 의해 비판을 받았는데, 이는 그대로 수용되었다.
그에 대한 비판이나 부정적 견해가 일반화된 데에는 그의 동지에서 정적으로 돌변한
정몽주의 제자와 정치적 계승자인 사림파 외에도 정몽주를 현창함으로서
정도전을 격하하려는 이방원의 의도도 있었다는 시각도 있다.
정몽주는 이성계의 조선 개국, 역성혁명에 반대하여 이방원, 조영규 등에 의해 살해되었다.
그러나 정도전, 남은 은 이성계를 도와 실질적으로 조선을 건국했다.
반대로 정몽주에 대한 현창솨 사업은 그를 제거한 이방원이 정도전을 격하할 의도와,
그의 충신 이미지를 부각시켜 새 왕조에 저항하는 세력을 도덕적으로 억제하려는 등의
정치적 효과를 보고 그를 충절의 대상으로 격상시켰다는 것이다.
[편집] 후대의 평가
후일 조선 정조가 그의 문집을 간행한 이래 1863년 흥선대원군에 의해 복권되고 사당에는 유종공종이라는 현판이 내려졌다.
그뒤 고종 때 문헌의 시호가 내려지고 복작되었다.
[편집] 방송
[편집] 정도전을 연기한 배우들
[편집] 다큐
- 2011년 1월 23일 KBS1TV 《학자의 고향 - 삼봉 정도전 편,1부 정도전, '하늘을 버리고 백성을 선택하다'》
- 2011년 1월 30일 KBS1TV 《학자의 고향 - 삼봉 정도전 편,2부 정도전, '조선을 디자인하다'》
사람과 말과 도담삼봉이 말이 없다.
충북 단양 팔경 1경 도담삼봉
주소: 충북 단양군 매포읍 하괴리 84-1
전화: 043 - 422 - 1146
입장료 : 없음
이용시간 : 09 :00 ~ 18:00
매주 월요일 휴관
주차: 당일 승용차 2,000원
당일 버스 4,000원
체류:승용차 4,000원
버스 8,000원
교통편: 북단양IC → 532지방도로 매포방면 → 5번국도 단양방면 →하괴삼거리 →4번국도 도담삼봉 방면 →도담삼봉
음식: 도담삼봉 주변에서 쏘가리회,민물 매운탕
숙박: 도담삼봉 주변에는 호텔,콘도,모텔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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