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경상도 여행

[경북 안동] 도산서원 비내리는데 시사단과 퇴계 이황

만년지기 우근 2011. 6. 29. 13:00

 

 

[경북 안동] 도산서원 비내리는데 시사단과 수녀님 우산

                                                                                          우근 김  정  희

 

나는 안동에서 도산서원을 많이 좋아한다.

좋아하는 이유는 도산서원앞에 흐르는 큰 강물 때문이다.

어느 한쪽에서 물만 바라다 보면 마치 작은 바다같은 느낌이 든다.

바다같은 큰 강물은 아니지만 도산서원에서는 바다의 기상을 느낄 수 있다.

우리나라 산이 70%이고 바다가 삼면이로 반도 국가라 부른다.

하지만 바다를 볼려면 내륙에서는 산을 구비 구비 돌아야 나온다.

내가 살고 싶은곳은 바로 바다가 이지만 꿈만 꾸고 있다.

살아간다는게 그렇게  만만치가 않다는 이야기이다.

도산서원에서 다시 비내리는 잔잔한 바다를 보았다.

이 아름다움에 혼자라면 더 많은 시간을 여기에서 보냈으리라는 생각을 했다.

잠시 시간이 멈춰졌으면 하는 건 바로 앞에 보이는 시사단의 아름다운 풍경이다.

여행이라는 특별한 시간에 내가 살아온 모든 시간을 반추해 보았다.

산다고 살아 왔는데 정말로 나는 잘 살았는가!

 

도산서원에서 시사단은 또 얼마나 중요한 곳인가!

퇴계 이황선생님 사후 222년만에 1792년 정조16년 퇴계 이황선생님 학덕을 기리고

지방선비들의 사기를 높혀주기 위해서 어명으로 도산서원에서 시행된 "도산별과"를 시행했다.

당시 도산별과에 응시한 유생은 7228명이었고,답안지 제출자는 3632명이었다.

한편 이것을 기념하기 위해 정조왕께서 내려주신 제목을 게시한 곳에 단을 꾸몄다.

바로 시사단이다.  

 

지방에서 봤던 유일한 과거 바로 도산별시다.

안동은 바로 이런 점에서 한국 정신문화의 수도라 말할 수 있다. 

 

 

 

 

 

 

 

 

천원짜리 지폐에 나오는 도산서원이다.

지금 지폐에는 없는 그림이다.

이것도 없어진 유물로 기억하기 바란다.

천원짜리 현재 지폐에는 서울 문묘 명륜당이 자리잡고 있다.

세월유수를 느낀다.

 

 

 

도산서원 들어가는 입구의 아름다운 강이 멈추워져 있는것 같다.

들어가는 입구부터 숙연해 진다.

 

 

돌을 지나서 나무계단과 나무의지들이 숲속의 아름다움을 더 해준다.

 

 

 

시간이 허락한다면 시사단에서 도산서원을 담아보고 싶었다.

 

 

이황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다른 뜻에 대해서는 이황 (동음이의)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이황
출생 1501년 11월 25일 (음력)
조선 경상북도 안동 도산면 토계동
사망 1570년 12월 8일
조선 경상북도 안동 도산면 토계동
사인 병사 (노환)
거주지 조선 경상북도 안동, 한성부, 안동
국적 조선
별칭 자는 경호, 호는 퇴계
학력 한학 수학
직업 학자, 문인, 정치인
종교 유교
부모 이식
친척 숙부 이우, 형 온계 이해

이황(李滉, 1501년 음력 11월 25일 ~ 1570년 음력 12월 8일)은 조선 명종·선조 시대의 명신. 정치보다는 학자 지향형 인물이다.

승문원부정자로 관직에 발을 들여놓았으나 사화(士禍)와 훈구파 내부의 정쟁으로 혼란스러워지자 관작을 사퇴한다.

풍기군수 재직 시절 서원들을 지원하였으며, 임금 명종의 친필 사액(賜額)을 받아

백운동서원을 소수서원으로 만듦으로써 사액 서원의 모범 선례가 되었고,

사림파의 세력이 확장하는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하였다.

 

소고 박승임, 서애 류성룡 등의 문하생을 배출했는데,

후일 동인이 분당된 뒤 박승임의 제자는 남인 일부와 북인 일부로, 류성룡과 그의 후예들은 남인으로 이어진다.

 

는 경호(景浩), 는 퇴계(退溪-퇴거계상[退居溪上]의 줄임말)·도수·퇴도(退陶),

본관진보(眞寶)이며, 시호는 문순(文純)이다.

진사(進士) 의정부좌찬성 이식(李埴)의 아들이다.

조선 정치사에서 특히 동인남인 계열의 종주이다. 이우의 문인이다.

목차

[편집] 생애

[편집] 생애 초기

[편집] 출생과 가정 환경

퇴계 이황은 경북 안동부 예안현(오늘날의 안동시 예안면)에서 진사(進士) 의정부좌찬성 이식과 부인 박씨의 7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날 때 그의 부모는 태몽을 꾸었는데 이식이 40세 때 진사시에 합격한 해에

어머니의 꿈에 '공자가 대문 안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 이황을 낳았다하여 대문을 성림문(聖臨門)이라 일컬었다.[1]

그러나 그의 아버지는 그가 태어난 지 7개월 만에 마흔 살의 나이로 사망하여, 이황은 홀어머니 박씨 밑에서 자라야 했다.

형은 온계(溫溪) 이해(李瀣)로 이해 역시 학자였으나 을사사화로 희생된다.

일찍이 허씨와 결혼하였으나 27세에 상처하고, 재혼한 권씨 역시 46세에 사망한다.

[편집] 수학

아버지를 일찍 여의었으나 대대로 물려오는 재산이 있었으므로 어렵지 않게 생활하였다.

어려서 서당에서 한학을 수학하던 이황은 열두 살 때부터 숙부인 송재 이우에게서 학문을 배웠다.

송재는 그때 관직에 있었는데, 바쁜 일과 중에도 퇴계를 가르쳤다.

1528년에 소과에 입격하고 성균관에 들어가 성균관유생이 되었다.

[편집] 교육, 정치 활동

[편집] 정치 활동과 학문 연구

을사사화, 소수서원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529년(중종 23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그 후 승진을 거듭하여 성균관 사성이 되었으나 사직하고 고향에 들어가 학문을 연마하였다.

그러나 조정에서 다시 불러 다시 홍문관 교리를 지내고 전한이 되었다.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형 이해(李瀣)에게 연좌되어 화를 입어 한때 파직되었다가 복직하였으나,

이미 벼슬에 뜻을 두지 않았을 때이므로 사직하고 고향에 내려가 양진암을 짓고 학문에 몰두하였다.

일찍 그가 서울에 있을 때 《주자전서》를 읽고 여기 몰두하여 성리학을 연구하여,

마침내 대성하여 '동방의 주자', '이부자' 라는 칭호를 받게 되었으며

이로부터 사방에서 학자들이 모여들어 학문을 배웠다.

[편집] 지방관 생활과 서원 건립

비록 조정의 부름이 있더라도 관직에 오래 머물지 않고 부득이한 경우에는 외직을 자청하였다.

명종 초에 단양·풍기 등의 군수를 역임한 것도 이 때문이다.

풍기 군수 시절에 서원들을 지원하였으며, 소수서원 사액을 실현시켰다.

 

풍기군수 재직 시절 임금 명종의 친필 사액(賜額)을 받아 백운동서원을 소수서원으로 만듦으로써 사액 서원의 모범 선례가 되었고,

 사림파는 서원을 근거지 삼아 세력을 확대해 나가게 된다.

그의 소수서원 사액 실현은 사림파의 세력이 확장하는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하였다.

 

1552년(명종 7) 다시 소환되어 홍문관 교리·대사성·부제학·공조참판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앞서 풍기 군수의 직을 버리고 고향에 내려왔을 때 그는 한서암을 짓고 1555년에는 도산서원(陶山書院)을 세웠다.

이이가 그를 방문한 것도 이때의 일이며, 명종이 그가 관직에 나오지 않음을 애석히 여겨

화공에 명하여 도산(陶山)의 경치를 그려오게 하여 완상한 것도 이때의 미담이다.

 

그의 사상은 50~60세에 걸쳐 완성되었는데, 변론·저술·편저 등 중요한 것은 모두 이 기간에 되었으며,

《계몽전의》, 《주자서절요》, 《송계원명이학통록》, 《인심경석의》 및

기대승과 문답한 《사단칠정분리기서》와 같은 것은 그의 대표적인 명저이다.

[편집] 생애 후반

명종 말에 예조 판서가 되고 대제학·판중추 겸 지경연사 등이 되어 유명한

《무진육조소》와 《성학십도》를 지어 임금께 올리니 이는 국은에 보답하고 학문을 개발하기 위한 만년의 대표작이다.

 

선조가 즉위한 후 대제학, 지경연이 되어 성리학을 그림과 함께 쉽게 서술한

《성학십도》(聖學十圖)를 지어 왕에게 올려 성리학이 국가 이념임을 밝히게 한다.

친구로서 호남의 대학자 하서 김인후, 사마시에 함께 급제한 김난상 등과 교류하였다.

[편집] 사후

그가 죽자 선조는 문순공의 시호를 내리고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을 추증하였으며,1610년 문묘(文廟)에 모셨다.

광해군 때 성균관 문묘에 종사되었으며 경북 안동의 도산서원을 비롯한 전국 40여 개 서원에서 제사하고 있다.

학문상으로는 영남 지역기 이반인 동인과 남인의 종통이었다.

숙종 때까지 그를 기리는 뜻에서 소수서원과 도산서원에서 특별 과거가 주관되었다가,

영조 때 폐지되었으나 정조 때 까서야 정조가 행차하면서 부활하였다.[2]

1968년 대한민국 대통령 박정희의 특별 지시로 1천원 권의 첫 주인공으로 도완되었다.

이후 30년간 천원권 지폐의 도완 인물로 계속 유지되었다.

[편집] 저서 및 작품

[편집] 저서

  • <단양산수기>
  • <유소백산록>
  • 《계몽전의》
  • 《주자서절요》
  • 《송계원명이학통록》
  • 《인심경석의》
  • 《사단칠정분리기서》

[편집] 작품

  • 《무진육조소》
  • 《성학십도》

[편집] 가족 관계

첫 부인 허씨는 27세때 사망하고, 재혼한 권씨는 46세때에 사망한다.

그뒤 이황은 재혼하지 않았고, 기녀 두향을 소실로 맞이하였다.

아들이 일찍 죽자 재혼한 이는 둘째 며느리였다.

  • 아버지 : 이식(李埴, 1461년 - 1501년)
  • 어머니 : 박씨(朴氏, ? - [1537년]])
    • 형 : 7명
    • 형 : 이해(李瀣, 호는 온계(溫溪))
    • 누이 : 이씨
  • 부인 : 허씨(許氏, ? - 1528년)
  • 부인 : 권씨(權氏, ? - 1547년)
  • 첩 : 두향[3], 기생.
  • 숙부 : 이우

[편집] 이황의 사상

[편집] 이기 이원론

이이와 더불어 한국성리학(유학)의 가장 대표적인 학자로 주자의 이기이원론적 사상 및

영남학파의 창시자인 이언적주리설을 계승하여 자신의 사상을 발전시켰다.

그는 철저한 철학적 사색을 학문의 출발점으로 하여 연역적 방법을 채택,

겸손하고 신중한 태도로 학문에 임하여 어디까지나 독단과 경솔을 배격하였다.

 

그는 우주 만물은 이와 기의 이원적 요소로 구성되어 그 중에 하나라도 결핍되면 우주의 만상을 표현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기의 도덕적 가치를 말함에 이는 순선무악한 것이고 기는 가선가악한 것이니,

즉 이는 절대적 가치를 가졌고 기는 상대적 가치를 가진 것이라 하였다.

 

그러므로 그의 심성 문제를 해석함에도 역시 이러한 절대·상대의 가치를 가진 이기이원으로 분석하였다.

이것이 뒤에 기대승과의 논쟁이 벌어진 유명한 ‘사단칠정론’으로 이후 한국 유학자로서

이 문제를 언급하지 아니한 사람이 없을 만큼 중요한 주제를 던진 것이다.

 

그의 학문은 일본에도 큰 영향을 끼쳐, 에도 시대에는 기몬 학파와 구마모토 학파가 있었고,

 메이지 시대의 교육 이념의 기본 정신을 형성하였다.

그러나 이황의 학문적 근본 입장은 진리를 이론에서 찾는 데 있지 않았다.

오히려 진리는 평범한 일상생활 속에 있다는 것이 그의 신념으로 지와 행의 일치를 주장,

그 기본이 되는 것이 성이요, 그에 대한 노력으로서 ‘경’이 있을 뿐이라 하였다.

 

실로 그의 학문·인생관의 최후 결정은 이 경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으로

이 경을 70여 생애를 통하여 실천한 것이 이황이었다.

그는 문학·고증학에도 조예가 깊었으며

그 사상·학풍이 후세에 계승되어 영남학파를 형성, 유학계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편집] 조식과의 논쟁

이황은 조식에 대해 "오만하여 중용의 도를 기대하기 어렵고, 노장에 물든 병통이 있다"고 비판[4]했다.

그러자 조식은 선비들이 공부한다는 핑계로 자신의 부모의 고혈을 짜고, 여러 사람들에게 폐를 끼친다고 응수했다.

남명은 "요즘 학자들은 물 뿌리고 청소하는 절차도 모르면서 입으로는 천리(天理, 하늘의 진리)를 담론하며

허명(虛名)을 훔친다"고 맞대응 하는 등의 신경전을 벌이기도 했다.[5]

 

후일 조식의 제자와 이황의 제자들은 율곡 이이성혼의 제자들과 대립하며 동인을 형성했다.

그러나 이황의 제자와 조식의 제자 간 사상의 차이는 다시 동인을 양분화시키는 원인이 된다.

같은 해에 태어난 두 거유의 상이한 출세관과 학문관은 결국 남인북인의 분화로 이어졌고,

당쟁을 격화시키는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5]

[편집] 이이와의 논쟁

그는 사물을 이(이성)과 기(물질, 힘)로 보되, 이와 기는 서로 다른 것으로 보고 이기이원론을 주장했다.

또한 이기이원론이면서도 이로써 기를 다스려야 한다는 주장을 피력했다.

이는 이와 기를 동일한 것으로 보는 이이와 논쟁하게 된다.

 

이황은 이이의 이기일원론을 수용하지는 않았으나 그의 탁월한 학문적 능력을 인정하여, 후생가외라 불렀다.

그러나 젊은 이이가 스승 이황과 논쟁하는 것을 본 이황의 문하생들은 이이에게 적개심을 품기 시작한다.

이후 지배층의 논리인 서인 이이의 이기일원론에 대항하여,

이황의 제자들은 논쟁을 공리공담으로 여긴 조식의 제자들,

이언적의 제자들과 연합하여 영남 학파와 동인 붕당을 형성하게 된다.

[편집] 일본 유학에 영향

1592년(선조 25년)부터 발생한 임진왜란 당시 경상도 지역의 서적과 도공 등이 상당수 약탈당했는데,

이때 이황의 저서가 상당수 약탈당하였다.

경상북도의 해안가를 통해 유출된 이황의 서적, 서한들은 후일 일본성리학 발전에 영향을 주었다.

18세기 미국에 의해 서구 문물이 강제로 유입되기 전까지 일본에는 조선에서 전래된

이황 계열의 성리학이 막부 세력의 사상적 기반이 되어 유행하였다.

[편집] 문하생

소고 박승임, 성암 김효원, 서애 류성룡, 학봉 김성일[6] 등을 문하생으로 배출한다.

김효원동인의 영수가 되었고, 박승임은 학문 연구에 몰두하였으나

그 제자들 중 일부는 북인, 일부는 남인으로 출사한다. 류성룡과 그의 주변 인물들, 제자들은 모두 남인으로 이어진다.

 

양반가의 자제들 외에 상민의 자제들도 그의 문하에 출입하여 수업하고 배울 수 있었다.

그가 소수서원에서 성리학 강학을 할 때면, 대장장이 배점이 뜰에 꿇어 엎드려 배우기를 간청하자 그는 이를 허락한다.

그가 죽자 배점은 3년간을 상복을 입고 소식(素食)하며 심상(心喪)했다.

[편집] 불행한 가정사

생후 1년만에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에게서 성장했다.

그러나 45세 되던 해 을사사화로 친형 이해가 연루되어 처형당한다.

첫 부인 허씨를 27세에 잃고, 재혼안 둘째 부인은 46세에 사별한다.

이후 그는 재혼하지 않고 48세 때 만난 기녀 출신 소실 두향 외에는 일체 여자를 가까이 하지 않고 평생을 보냈다.

 

1548년 2월 이황의 둘째 아들이 일찍 요절하였다.

그는 둘째 며느리는 정혼한 후 1년도 안되어 남편이 죽고 청상과부가 되자,

며느리의 개가를 허용하고 남의 눈을 피해 친정으로 몰래 돌려보낸다.

 

그가 선조 즉위 초 한성부로 가던 길에 한 주막에 들렀을 때,

그의 입맛에 딱 맞는 음식을 해온 이가 있었는데 그때 그가 개가를 허용한 둘째 며느리였다 한다.

한성부에 분가한 그의 손자 내외가 아이에게 고열이 있어서 위중하자, 그에게 도움 요청을 하였으나 그는 냉정하게 거절한다.

그의 증손자는 병을 치료하지 못하고 그보다 앞서 사망하고 만다.

[편집] 평가

그의 제자 중 학봉 김성일은 선생께서 산과 계곡을 거닐 때면 마치 '신선 같다'고 평하였다.

[편집] 기타

2007년부터 쓰이는 대한민국 1000원권에 실린 이황의 초상

대한민국의 1000권 지폐 앞면에 그의 얼굴이 그려져 있다.

그의 도산 서원에서는 많은 학생들이 배출되었고, 동인과 남인, 북인 학자와 정치인들을 양성한 요람으로서 1910년 이전까지는 성역화 되었다.

그러나 유교 성리학을 비판하던 경상북도의 공산주의자들은 도산서원을 도산서원(盜産鼠院)이라 하여

도둑들을 생산하는 쥐새끼들의 소굴이라고 노골적으로 비난하여 물의를 빚게 되었다.

[편집] 사림 확산에 기여

풍기군수 재직 중 서원들에 대한 지원을 계속했으며, 백운동 서원의 현판을 왕의 사액 하사운동을 추진하여 성공시킨다.

이후 서원의 보급과 사액서원의 수가 늘어나면서 사림파(士林波)의 세력의 확장에 기여하였다.

또한 조식의 문하생인 북인소북대북으로 나뉜 뒤, 소북이 대북에게 숙청되고

대북은 서인에게 숙청되면서 그의 문하는 쇠퇴했고, 이언적은 많은 제자를 내지 못하여

이황의 제자들이 영남학파의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편집] 기생 두향

그에게는 소실로 '두향'이라는 기생이 있었다.

1548년(명종 3년) 1월 단양군수로 부임한 후 만난 기생 두향은 이후 그가 떠나간 뒤에도 그에 대한 절개를 지켰다.

1571년(선조 27년) 그의 부음을 들은 기생 두향충주 강선대에서 충주호로 몸을 던져 투신했다.

그뒤 매년 10월이면 이황의 후손들은 이황에 대한 절개를 지켜 순사한 두향의 묘소를 찾아 벌초하고 시제를 드린다 한다.

[편집] 일화

그가 도산서원에 있을 때 어느 행인이 말을 타고 그 앞을 지나가는 사람이 있었다.

시중을 들던 제자들과 하인들이 지나가는 이의 무례함을 지적했다.

'선생님, 저 사람 행동이 지나칩니다. 선생님 앞을 지나면서도 말에서 내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황은 '내버려 두어라, 말 탄 사람이 그림속의 사람처럼 좋은 경치를 더해 주는데 무슨 허물이냐?'라며

하인과 제자들에게 자신을 못알아보는 행인을 내버려 두라고 지시한다.

이문형, 윤두수, 윤근수 등을 탄핵했던 훈구파 권신 이감경상도관찰사로 있을 때 그를 찾아 문안인사를 드렸다 한다.

 

출처: 위키백과 

 

 

강물과 바다가 다른점은 바로 이런 반영이다.

바다는 항상 정지를 모르는데 강물은 언제나 유유히 흐른다.

 

 

 

 

역사는 이렇게 흐르고 흘러도 인물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다.

강물이 고요하나 고요안에서도 역사가 되어 흐르고 있다.

 

 

 

도산서원은 세월이 흐름에 따라 더 유서가 깊어지고 사람들에게 잘 알려질 거라는 생각을 한다.

이 나무의 아름다움에 도산서원의 풍경이 더욱더 빛난다.

 

 

도산서원

 

주소 : 경북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 680

전화 : 054 - 840 - 6559

팩스 : 054 - 840 - 6557

 

도산서원 홈페이지 : www.dosanseowo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