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 장군과 통영 동피랑 강강 수월래
우근 김 정 희
성웅 이순신장군에 대해서 대한민국사람중에서 모르시는 분은 없으리라 생각한다.
사실 제 개인적인 생각이다. 만약 그때 전사하시지 않았다면 성웅 이순신장군은 지금처럼 빛이 날까?
대한민국에는 지금 존경할만한 인물이 있는가.
대학로에 가보면 함석헌선생님의 시비가 서있다.
살아계실적에 나는 선생님의 책과 강연회에 빠지지않고 들었었다.
그런데 어느날인가 함석헌선생님은 언론에서 떠들고 그 마음을 달래느라 얼마나 울었던가.
그 다음부터 였으리라. 될 수 있으면 TV를 보지 않는다.
그리고 거기에 나오는 이야기도 믿지 않는다.
일이라는게 모두들 정의와는 무관하게 자신들의 정의로 풀어버리기에 ---
그런면에서 보자면 성웅 이순신장군은 장렬하게 전사를 하셔서 지금 빛이나는 것이다.
나는 묻고싶다.
역사적으로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중에 누가 인물로 영웅으로 역사에 남을까?
원래 이글은 통영을 동피랑을 마치면서 낼려고 했던 그러나 처음으로 이미 준비 해놓은 자료이다.
내가 블로그를 시작한지 100여일이 넘어가면서 그리고 뒤를 돌아다보면 달라진게 많이있다.
우선 컴을 하면서 내 자신의 잃어버리고 놓아버렸던 언젠가 해야한다는 생각만 가지고 살아온 시간들이
내자신에게 나에게 가져다 준건 무엇인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억울하게 당하기만 한 일이 누구에게나 있다.
어제 저녁을 먹으면서 어떤 학생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그분은 지금 내가 어렵기때문에 내 옆에서 떠나지 않고 계시면서 치우천황 엄마 노릇을 해 주신다.
마지막까지 내 곁에 남아서 의리를 지켜주는 분께 나는 무엇으로 답을 드려야 할까?
이왕에 터진 일이니 이기회에 사무자료까지 그대로 있으니 터트려야 한다는 것이다.
불의를 보고 참지 못하는 그 사람이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처음 블로그를 시작해서 몇일이 되지 않았다.
나는 서정주선생님을 직접 만나서 지금도 창간호의 시를 내가 직접 받으러 갔었고 전화로 통화하지 말고
집으로 찾아 오라고 해서 가보았던 서정주선생님 댁에서 긴긴 이야기를 들었고 나는 그때도 시에 대해서
무례할 정도로 이야기를 했다.
그러던 내가 맞지도 않는 사업에 파묻혀서 21년을 지내고 있다.
갑자기 걸려온 전화로 30분 밖에 자지 못해서 세수를 하고 거울을 보니 눈이 벌것게 충혈되어도 가야만 한다고
했더니 시간을 지체하게 만든다.
차에 가서 시동을 걸었더니 방전이 되어서 부르고 고쳐서 찾아간 수원 화성 병원들만 상대를 한 나로서는 병원에서
연구소에서 어떻게 가야한다고 해야 길을 찾는다.
두산연구소에 전화를 해서 자세히 가르쳐주어서 찾아가지만 우리나라 도로표지판은 아는사람을 위한 표지판이지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햇갈리고 어렵다.
이게 우리의 국민성일까. 잘사는 사람을 위해서만 있는 법처럼 어쩌면 그렇게도 당혹하게 만드는지 모른다.
나는 약속을 될 수있으면 지킨다.
안지키는 사람과는 상대를 안한다.
할 수 없이 못지킨 사람이 내 앞에서 잘못을 했다고 할때까지 아예 보지도 아니,모르는 사람으로 대한다.
그러기에 그저 그저 살아가고 둥글 둥글 살아가는 사람을 보면 부럽기도 하다.
그렇게 태어났으니 그렇게 살다가 가야하지 않을까?
잠적해버리고 숨어버리는 사람을 너무나 이해를 한다.
그러는 찰라에 나에게 다시 인생을 결단해야만 되는 일들이 일어난다.
오죽하면 감옥문을 만들어 놓고 글을 썼을까.
자유하리라. 어느 댓글에다 써놓은 말 처럼 조금 늦게 가더라도 양심이 하라고 하는대로 살아가리라.
그런면에서 나는 이순신장군을 좋아한다.
백의종군을 할 수 있는 결단이 선조로서 존경을 한다.
다른 사람에게 불의에 굴종하지않은 당당함을 그대로 본받아야 한다.
그렇게 살아가리라. 그렇게 살다가 돌아가리라.
지금부터 나오는 글은 제 글이 아닙니다.
저는 컴맹이기도 하지만 이렇게 해서 놓아야 한사람이라도 더 읽을것 같아서요.
가장 큰 축제가 한산대첩축제입니다. 해마다 8월 24일 전후로 열리는데요, 재단법인 한산대첩축제위원회(이사장 이수성)에서 주관하고, 실무집행위원회에서 총괄합니다. 집행위원회의 과장이 유용문씨이고, 팀장이 최원석씨이지요. 알만한 사람들이지요? 축제마지막날, 8월24일 저녁에는 한산대첩 현장에서 해마다 재현행사를 합니다. 넓은 바다위에서 수백척의 어선들이 학익진을 재현하고, 불꽃놀이가 보편화되어 정말 해전이 일어나고 있는 착각을 일으키지요. 관람은 망일봉 이순신공원에서 내려다보면서 즐기고 있는데, 동시에 수만명이 불편없이 구경할 수 있습니다. 아마도 얼마가지 않아서, 이 재현행사는 세계적인 볼거리로 올라설 것입니다.
이글은 김형진 위원장님께서 댓글에 써주신글중 일부입니다.
아래에 왼쪽 첫번째이십니다.
내년 행사에 메일 부탁드립니다.
이순신 장군과 한산대첩
1545(인종 1)~1598(선조 31)조선 선조때의 명장.
이순신 /이순신 영정, 이상범이 제작했으며 ...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를 지내며 임진왜란으로 나라가 존망의 위기에 처했을 때 바다를 제패함으로써
전란의 역사에 결정적인 전기를 이룩한 명장이며, 모함과 박해의 온갖 역경 속에서 일관된
그의 우국지성과 고결염직한 인격은 온 겨레가 추앙하는 의범(儀範)이 되어 우리 민족의 사표(師表)가 되고 있다.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여해(汝諧).
이순신 /이순신장군 영정, 묘당도 이충무공유적, ...
아버지는 정(貞)이며, 어머니는 초계변씨(草溪卞氏)이다.
그의 가문은 고려 때 중랑장(中郞將)을 지낸 이돈수(李敦守)의 후손으로 조선에 들어와
7대손 변(邊)이 영중추부사와 홍문관대제학을 지내는 등 주로 문관벼슬을 이어온 양반계급의 집안이었으나,
할아버지인 10대손 백록(百祿)이 기묘사화의 참변을 겪게 된 뒤 아버지 정도 관직의 뜻을 버리고
평민으로 지내 가세도 기울어져 있었다.
1545년 3월 8일(양력 4월 28일) 당시 한성부 건천동에서 셋째 아들로 태어나 어머니의 엄격한 가정교육하에서 성장했다. 그의 전몰 후 정경부인(貞敬夫人)의 품계에 오른 보성군수 진(震)의 딸인 부인 상주방씨(尙州方氏)와의 사이에
회(?)·열( )·면(?) 등 3형제와 딸을 두었고, 서자로 훈(薰)·신(藎) 그리고 2명의 딸을 두었다.
노량해전에 참전했던 회는 현감, 열은 정랑(正郞)이었으며 면은 난중에 왜적과 싸우다 전사했고,
훈과 신은 무과에 올랐다.
두 형이 모두 죽었기 때문에 이순신은 또한 조카들을 친자식과 같이 극진하게 대했다고 한다.
22세에 무예를 배우기 시작하여, 28세 되는 1572년(선조 5) 훈련원별과(訓鍊院別科)에 응시했으나
달리던 말이 넘어지며 낙마하여 왼쪽다리가 부러지는 부상을 입어 등과에 실패했다.
그뒤 1576년 봄 식년무과에 급제하여 그해 12월 귀양지로 여기던 함경도 동구비보(童仇非堡)의
권관(權管)으로 부임했다.
1579년 2월 귀경하여 훈련원봉사가 되었고, 그해 10월에는 충청병사의 막하 군관으로 전임되었다.
이듬해 7월 발포수군만호(鉢浦水軍萬戶)가 되었다. 1582년 1월 군기경차관 서익(徐益)이 발포에 와서
군기를 보수하지 않았다고 무고하여 첫번째로 파직되었으나 그해 5월 다시 임명되어 훈련원봉사가 되었다.
1583년 7월 함경남도병사 이용의 막하 군관으로 전근, 10월 함경북도 건원보(乾原堡) 권관으로
오랑캐 토벌에 공을 세워 11월에 훈련원참군이 되었으나 15일에 아버지가 죽자 휴관했다.
1586년 1월 사복시주부(司僕寺主簿)에 임명되었다가 북방 오랑캐들의 침범이 있자 16일 만에
다시 함경도 조산보병마만호(造山堡兵馬萬戶)로 천거되었다.
이듬해 8월에는 녹둔도둔전관(鹿屯島屯田官)을 겸하고 있을 때 섬의 방비를 위하여 증병을 요청했다.
그러나 병사 이일(李鎰)은 이 청을 들어주지 않았고 오랑캐의 습격을 당하여 패한 죄로 하옥되었다.
1589년 2월 전라도순찰사 이광(李洸)의 군관이 되었고, 또 순찰사의 주청으로 조방장(助防將)을,
이어 11월에는 선전관도 겸직하게 되었으며 12월에는 정읍현감이 되었다.
이듬해 고사리진병마첨절제사(高沙里鎭兵馬僉節制使)·만포진수군첨절제사(滿浦鎭水軍僉節制使)에
임명되기도 했으나, 모두 대간들의 반대로 취소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년 전인 1591년 2월 진도군수에 임명되었으나 부임 전에
다시 전라좌도수군절도사로 임명되어, 2월 13일 정읍을 떠나 전라좌수영(全羅左水營:지금의 여수)에 부임했다.
유성룡(柳成龍)은 이미 이이(李珥)가 이조판서로 있을 당시 이순신의 이름을 소개한 바 있었으나,
이순신은 이이가 자기와 성씨가 같은 문중이라 하여 그의 재직시에 찾아가기를 사양했다 한다.
부임 후 왜구의 내침을 염려하여 바로 영내 각 진의 군비를 점검하는 한편,
후일 철갑선(鐵甲船)의 세계적 선구(先驅)로 평가될 거북선[龜船]의 건조에 착수했다.
이순신 /묘당도 이충무공유적, 사적 제114호, ...
전라좌수사의 취임 이듬해인 1592년 3, 4월경에는 새로 건조한 거북선에서 지자포(地字砲)와 현자포(玄字砲)를
쏘는 것을 시험하고 있었다.
이와 거의 때를 같이하여, 1592년 4월 13일 일본군 병력이 도합 20만 명에 달하는 대규모의 침략전쟁인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그는 "왜선 90여 척이 부산 앞 절영도에 와 닿았다"는
경상우수사 원균(元均)의 통첩과 "왜선 350여 척이 벌써 부산포 건너편에 와 닿았다"는
경상좌수사 박홍(朴泓)의 공문을 받은 즉시로 장계를 올리고, 순찰사와 병사,
그리고 전라우수사 이억기(李億祺) 등에게 공문을 보냈다(4.15). 경상좌우도 수군은
왜군의 부산 상륙을 보면서도 전혀 싸우지 않았다.
전의를 상실한 원균은 배와 화포와 군기를 미리 바다에 침몰시켜 버렸다고 한다(〈징비록 懲毖錄〉).
원균은 비장 이영남(李英男)의 책망으로 전라좌도 수군의 구원을 청했으나,
이순신은 맡은 바 경계가 있음을 이유로 영역을 넘어 경상도로 출동하기를 주저했다.
그러나 사태가 위급해지자 그는 광양현감 어영담(魚泳潭), 녹도만호 정운(鄭運) 등
막하 장령들의 격렬한 찬반논의와 그들의 소신을 확인한 끝에 출전의 결단을 내렸다.
4월 27일에 올린 〈경상도 구원에 출전하는 일을 아뢰는 계본(赴援慶尙道狀)〉에서
'같이 출전하라는 명령'(往偕之命)을 내릴 것을 주청했다.
그로부터 전라좌도의 수군, 즉 이순신 함대는 경상도 해역에 전후 4차의 출동을 감행하여
크고 작은 10여 회의 잇따른 해전에서 연전연승했다.
제1차 출전으로 5월 4일 새벽 전선(戰船:판옥선) 24척과 협선(挾船) 15척 등 모두 85척의 함대를 이끌고 출동,
5월 7일 옥포(玉浦)에 이르러 3회의 접전에서 왜선 40여 척을 섬멸하는 큰 승리를 거둠으로써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승서되었고, 제2차 출전인 5월 29일 사천해전(泗川海戰)에서 적탄에 맞아
왼쪽 어깨에 중상을 입었으나 그대로 독전(督戰), 6월 5일의 당항포해전(唐項浦海戰) 및
6월 7일의 율포해전(栗浦海戰) 등에서 모두 72척의 적선을 무찔러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승진되었다.
제3차 출전인 7월 8일의 한산해전에서는 와키사카 야스하루[脇坂安治]의
일본함대를 견내량(見乃梁:지금의 거제군 시등면)에서 한산도 앞바다로 유인,
학익진(鶴翼陣)의 함대 기동으로 급선회하여 일제히 포위 공격함으로써
적선 73척 중 12척을 나포하고 47척을 불태워 이 공으로 정헌대부(正憲大夫)에 올랐으며,
일본수군은 전의를 상실하여 바다에서는 싸우려 하지 않았다.
제4차 출전으로, 9월 1일 부산포(釜山浦)를 습격하여 적선 100여 척을 격파함으로서 치명상을 입혔다.
1593년 7월 14일 본영을 여수에서 한산도로 옮겼으며, 8월 15일에는 수사의 직에 더하여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되었다. 한편 호남으로 들어오는 피난민들을 돌산도(突山島)에 입주하게 하는 등,
민생문제의 해결과 장기전에 대비한 둔전(屯田)을 조직적으로 추진했다.
1594년 3월 4일 2번째 당항포해전에서 적선 8척을 분파하고
9월 29일의 장문포해전(長門浦海戰)에서는 적선 2척을 격파했으며,
10월 1일의 영등포해전에서는 곽재우(郭再祐)·김덕령(金德齡)과 약속하여 장문포의 왜군을 수륙으로 협공했다.
1595년 2월 27일 조정에서는 이순신과 원균사이의 불화를 염려하여 원균을 충청병사로 전직시켰으나,
이듬해 원균의 중상과 모함이 조정 내의 분당적(分黨的) 시론에 심상치 않게 파급되고 있었다.
11월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막하 간첩 요시라(要時羅)는 경상우병사 김응서(金應瑞)를 통하여
도원수 권율(權慄)에게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오래지 않아 다시 바다를 건너 올 것이니,
그날 조선수군의 백승의 위력으로 이를 잡지 못할 바 없을 것인즉……" 하며 간곡히 권유했다.
이 요시라의 헌책(獻策)이 조정에 보고되자, 조정 또한 그의 계책에 따를 것을 명했다.
1597년 1월 21일 도원수 권율이 직접 한산도에 와 요시라의 헌책대로 출동 대기하라고 명을 전했으나,
이순신은 그것이 왜군의 간계(奸計)임을 확신했기 때문에 출동하지 않았다.
도원수가 육지로 돌아간 지 하루 만에 웅천(熊川)에서 알려오기를 "지난 정월 15일에
왜장 가토 기요마사가 장문포에 와 닿았다"고 했다.
일본측 기록에는 정월 14일(일본력 1.13) 서생포(西生浦:울산 남쪽)에 상륙한 것으로 되어 있다.
즉 왜장은 도원수 권율이 독전차 한산도에 내려온 것보다 6일전에 이미 상륙했던 것이다.
"왜장을 놓아주어 나라를 저버렸다"는 비열한 모함으로 파직된 이순신은 군량미 9,914석, 화약 4,000근,
재고의 총통(銃筒) 300자루 등 진중의 비품을 신임 통제사 원균에게 인계한 후,
2월 26일 서울로 압송되어 3월 4일 투옥되었다. 가혹한 문초 끝에 죽이자는 주장이 분분했으나,
판중추부사 정탁(鄭琢)이 올린 신구차(伸救箚:구명 진정서)에 크게 힘입어 도원수 권율 막하에
백의종군(白衣從軍)하라는 하명을 받고 특사되었다.
4월 1일 28일간의 옥고 끝에 석방된 그는 권율의 진영이 있는 초계로 백의종군의 길을 떠났다.
아산에 이르렀을 때 어머니의 부고를 받았으나 죄인의 몸으로 잠시 성복하고 바로 길을 떠나야만 했다.
한편 원균이 이끄는 조선함대는 7월 16일 칠천량(漆川梁)에서 일본수군의 기습을 받아 참패했다.
배를 버리고 육지로 피신한 원균은 왜병의 추격을 받아 살해되었다 한다.
이번에도 김응서 및 권율을 경유한 요시라의 같은 계략이 적중한 것이었다.
정유재침의 다급한 사태에 엄청난 파탄이 초래되었으나, 조정은 속수무책이었다.
자청하여 수군 수습에 나선 그는 8월 3일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명되었고,
칠천량에서 패하고 온 전선들을 거두어 재정비함으로써 출전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사대문궤 事大文軌〉 권24의 〈명량대첩 장계초록〉에 의하면
8월 24일 어란(於蘭) 앞바다로 12척을 이끌고 나왔는데, 명량해전(鳴梁海戰) 당일에는 13척이 참전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8월 29일 명량(속칭 울두목)의 문턱인 벽파진(碧波津)으로 이진,
9월 15일에 우수영 앞바다로 함대를 옮긴 후에 각 전선의 장령들을 소집하여 "병법에 이르기를,
죽고자 하면 오히려 살고 살고자 하면 도리어 죽는다(必死則生 必生則死) 했거니와,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킴에 넉넉히 1,000명도 두렵게 할 수 있다"라고 엄달했다.
9월 16일 이른 아침 명량해협으로 진입한 적선 200여 척과 사력을 다하여 싸워 일본수군의 해협 통과를 저지했다.
일본군은 패전 후 웅천으로 철수했다. 조선수군이 일본수군의 서해 진출을 결정적으로 저지하여
7년 전쟁에 역사적 전기(轉機)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임진년의 '한산도대첩'과 정유년의
' 명량대첩'은 그 전략적 의의를 같이하고 있으나, 명량해전은 박해와 수난과 역경을 극복한
이순신의 초인적 실존(實存)으로 치러진 것이기에 그 의의가 더 크다.
명량대첩으로 선조는 이순신에게 숭정대부(崇政大夫)로 서훈하려 했으나 중신들의 반대로 중지되었다.
10월 14일 셋째 아들 면이 아산에서 왜적과 싸우다 전사했다는 부고가 온 뒤로부터는
심신의 쇠약이 더해지며 자주 병을 앓게 되었다.
1598년 2월 18일 고금도(古今島)를 본거지로 선정하여 진영을 건설, 피난민들의 생업을 진작시켰다.
7월 16일에는 명나라 수군도독 진린(陳璘)이 수군 5,000명을 거느리고 와 조선수군과 합세했다.
8월 19일(일본력 8. 18),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죽자 왜군은 일제히 철군을 시작했다.
순천에 있던 고니시 유키나가는 진린과 이순신에게 뇌물을 보내며 퇴각로의 보장을 애걸했으나,
이순신은 '조각배도 돌려보내지 않겠다'(片帆不返)는 결연한 태도로 이를 물리쳤다.
조·명연합함대는 11월 18일 밤 10시쯤 노량으로 진격, 다음날 새벽 2시경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
소오 요시토모[宗義智], 다치바나 도오도라[立花統虎] 등이 이끄는 500여 척의 적선과 혼전난투의 접근전을 벌였다.
치열한 야간전투가 계속되는 동안 날이 밝기 시작했다.
이 마지막 결전이 고비에 이른 11월 19일(양력 12월 16일) 새벽,
이순신은 독전중 왼쪽 가슴에 적의 탄환을 맞고 전사했다.
"싸움이 바야흐로 급하니, 내가 죽은 것을 알리지 말라"고 당부하며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이순신의 전사에는 의자살설[擬自殺說]이 남게 되었다.
즉 그것은 마지막 싸움인 노량해전에서 '투구를 벗고 선봉에 나섰다'는 전설과
더불어 7년 전란에 위태로운 전투를 몇 십 회나 치르면서도 그 뛰어난 전략과 전술로 한번도 패함이 없었던
그가 자기 몸을 보전하려 했다면 얼마든지 가능했을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에서 발단된 것이다).
노량해전의 전과에는 몇 가지 기록이 엇갈리나, 태워버린 적선이 200여 척,
적병의 머리가 500여 급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순신의 상여는 마지막 진지였던 고금도를 떠나 12월 11일경에 아산에 도착,
이듬해인 1599년 2월 11일에 아산 금성산(錦城山) 밑에 안장되었으나,
전사 16년 후인 1614년(광해군 6) 지금의 아산시 음봉면(陰峰面) 어라산(於羅山) 아래로 천장(遷葬)했다.
전사 후 우의정이 증직되었고, 1604년 10월 선무공신(宣武功臣) 1등에 녹훈되고
풍덕부원군(豊德府院君)에 추봉되었으며 좌의정에 추증되었다.
1643년(인조 21) 충무(忠武)의 시호가 추증되었고, 1704년 유생들의 발의로
1706년(숙종 32) 아산에 현충사(顯忠祠)가 세워졌다.
1793년(정조 17) 7월 1일 정조의 뜻으로 영의정(領議政)으로 추증,
1795년에는 역시 정조의 명에 따라 〈이충무공전서 李忠武公全書〉가 규장각 문신 윤행임(尹行恁)에 의해 편찬,
간행되었다.
이순신은 초상화가 없기 때문에 그의 풍모를 짐작할 수가 없다.
유성룡은 〈징비록〉에서 "순신은 말과 웃음이 적은 사람이었고,
그의 바르고 단정한 용모는 수업근신하는 선비와 같았으나, 내면으로는 담력이 있었다" 하여
그의 인품과 용모를 전하고 있다. 한편 이순신의 진(陣)에 머문 일이 있는 고상안(高尙顔:당시 삼가현감)이
그의 언론과 지혜로움에 탄복하면서도, 그의 용모에서 '복을 갖추지 못한 장수'(非福將也)로 느끼고 있는 것은
매우 인상적이다(〈泰村先生文集〉 권3).
수개월간 진을 같이했던 진린은 '이순신은 천지를 주무르는 재주와 나라를 바로잡은 공이 있다'
(李舜臣有 經天緯地之才 補天浴日之功) 고 했으며,
명나라 황제에게 이순신의 공적을 자세히 보고하여 명나라 조정에서 도독인(都督印)을 비롯한
팔사품(八賜品)을 내렸다.
〈난중일기 亂中日記〉에 따르면 그는 찾아오는 막하 장령들과 공사를 논의하며 새벽 닭 우는 소리를 들었고,
출전하지 않는 날에는 동헌에 나가 집무했으며, 틈을 내어 막료들과 활을 쏠 때가 많았다.
그는 이러한 진중생활 속에서도 술로 마음을 달래며 시가(詩歌)를 읊었고,
특히 달 밝은 밤이면 감상에 젖어 잠 못 이루는 때가 많았다.
또 가야금의 줄을 매었고, 음악감상에 심취하기도 했다.
그의 〈난중일기〉는 거리낌없는 사실의 기록, 당일의 날씨, 꿈자리의 음미,
어머니를 그리는 회포와 달밤의 감상, 투병생활, 또 애끓는 정의감과 울분, 박해와 수난으로 점철된
7년 전란의 진중 일기로서, 그 기록내용이 지니는 사료학적 가치는 물론 일기 문학으로서도 극치를 이룬다.
〈난중일기〉는 그 친필원본이 61편의 장계(狀啓)와 장달(狀達)을 담은
필사원본 〈임진장초 壬辰狀草〉와 함께 국보 제76호로 지정, 현재 아산 현충사에 보존되어 있다.
이순신의 문필은 〈난중일기〉와 더불어 몇 편의 시가와 서간문이 남아 있어
〈무제육운 無題六韻〉·〈한산도야음 閑山島夜吟〉,
그리고 말미에 24자로 한역(漢譯)된 〈한산도가〉가 수록되어 있다.
조경남(趙慶男)의 〈난중잡록 亂中雜錄〉에는 한산도의 작품이 20수나 있었는데
그중에 "바다에 맹세함에 고기와 용이 느끼고, 산에 맹세함에 초목이 아네"
(誓海魚龍動 盟山草木知)라는 구절이 있었다고 한다.
1937년에 간행된 조윤제(趙潤濟)의
〈조선시가사강 朝鮮詩歌史綱〉은 조선 중기의 시조문학발휘시대에 속하는
대표적 인물 중의 한 사람으로 이순신을 꼽고 있다.
朴惠一 글
경상남도 남부, 남해안에 있는 통영 충무
통영시
1995년 충무시와 통영군이 통합되어 통영시가 되었다. 고성반도와 한산도·미륵도 등의 도서로 이루어져 있다. 임진왜란 때 한산대첩 등 해상전투의 격전지였던 곳이며, 한산도를 중심으로 충무공과 관련된 유적이 많다. 한려해상국립공원에 포함되어 해양관광자원이 풍부하고, 청정해역으로 특히 굴 양식과 멸치잡이가 활발하다. 산양읍·용남면·도산면·광도면·욕지면·한산면·사량면·무전동·도천동·서호동·명정동·항남동·중앙동·문화동·태평동·동호동·정량동·북신동·평림동·인평동·당동·미수동·봉평동·도남동 등 1개읍 6개면 17개동이 있다. 시청소재지는 도천동이다. 면적 234.21㎢, 인구 133,939명(2003), 인구밀도 564.9명/㎢(2003).
삼한시대에는 변진 12국에 속했으며, 삼국시대 초기에는 가야의 영역이었다.
그러나 신라의 세력 확장에 따라 신라의 영토가 되어 고자군(古自郡)이 설치되고,
통일신라시대인 757년(경덕왕 16)에 고성군(固城郡)으로 개칭되었다.
고려시대에는 995년(성종 14)에 고주(固州)가 된 후 현으로 강등되는 등 여러 번 행정제도의 변화가 있었으나
1391년(공양왕 3)에 고성현이 되어 조선시대까지 유지되었다.
통영군의 명칭은 고성현에 있었던 경상도·전라도·충청도 등 3도의 수군을 통괄하는
삼도수군통제사영(三道水軍統制使營)을 줄여 부르던 이름인 통제영 또는 통영에서 유래한 것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후 수군을 총 지휘할 목적으로 1593년(선조 26)에 이순신을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하고
일본이 남해와 서해로 향하는 길목인 한산도에 통제영을 설치한 데서 비롯되었다.
이후 통제영은 한산도에서 거제현으로, 다시 한산도와 마주보고 있는 고성현의 통영반도 끝부분으로 위치를 옮겼다. 1870년에 고성현이 도호부로 승격되고 중심지를 통제영 안으로 옮겼으나 1872년에 다시 옛 자리로 돌아갔다.
1895년 지방제도 개정으로 통제영을 폐지했으나, 1900년에 폐지한 통제영에 진남군을 설치하고
통영에 소속되었던 여러 섬과 고성군의 도선면·광이면·광삼면, 거제군의 가좌도·한산도를 관할구역으로 했다.
1909년에 진남군을 용남군으로 개칭했으나, 1914년 군면 폐합 때 용남군과 거제군을 통영군으로 통합했다.
이때 면의 폐합도 이루어져 용남군의 한산면은 그대로, 가좌면·서면(일부)·동면이 통영면으로,
산양면·서면(일부)이 산양면으로, 도선면·산내면이 도산면으로, 도남면·광삼면이 광도면으로,
사량면·원삼면이 원량면으로 통합되었다.
또 거제군이 폐지되고 거제군의 이운면·둔덕면·사등면·일운면·동부면·하청면·연초면은 그대로,
서부면이 거제면으로, 장목면·외포면이 장목면으로 통합되었다. 1931년에 통영면이 읍으로 승격되고,
1953년에 통영군에서 거제도가 분리되어 거제군으로 독립했다.
1955년에 원량면이 욕지면과 사량면으로 분할되었으며, 통영읍이 충무시로 분리·독립했다.
1995년 실시된 전국행정구역개편으로 역사적인 배경과 생활권이 하나였던 충무시와 통영군이 하나로 통합되어
새로운 형태의 도농통합시인 통영시를 이루었다.
고성반도(통영반도)의 남북을 가로지르는 산릉이 이 지역의 지형을 구성한다.
북쪽 고성군 경계에 솟은 벽방산(碧芳山:650m)에서 남쪽으로 천개산(天開山:525m)·발암산(鉢巖山:261m)·
제석봉(帝釋峰:279m)을 거쳐 미륵도의 용화산(龍華山:461m)으로 산줄기가 이어진다.
지형의 영향으로 하천은 유로가 10km 미만인 3차수 하천이다.
광도면의 동해천, 한산도의 두억천 등이 있으나 하상이 사력으로 쌓여 복류하기 때문에,
용수를 조달하기 위해 상류에 저수지들이 축조되어 있다.
해안선은 전형적인 리아스식 해안으로 151개의 도서(유인도 43개, 무인도 108개)가 있으며,
해안선길이는 총 616.8km이다.
지질의 대부분은 화산암류와 심성 관입암류로 구성되어 있다.
쿠로시오 난류의 지류인 동한난류의 영향을 받아 연중 온화한 해양성 기후를 보인다.
통합 전 통영시 지역의 연평균기온은 14.7℃ 내외로 경상남도에서 가장 따뜻하며,
1월평균기온은 2.5℃ 내외이고, 8월평균기온은 25.4℃ 내외로 연교차가 작다.
연평균강수량은 1,458㎜ 정도로 한국의 다우지에 속한다.
동백나무와 종려나무 등 난대성 식물이 자란다.
한편 통합 전 충무시 지역의 연평균기온은 14.7℃ 내외, 1월평균기온은 2.1℃ 내외,
8월평균기온은 25.7℃ 내외로 연교차가 작으며, 연평균강수량은 1,397㎜ 정도이다.
1995년 통합 전 충무시의 인구수와 가구수는 꾸준히 증가하여, 인구는 1970~80년에 37.4%,
1980~91년에 25.5%가 증가했다. 가구수는 같은 기간에 각각 53.8%, 50.8%가 증가했다.
가구당 인구수는 1991년 3.8명으로 1970년의 5.1명에 비해 낮아졌다.
1991년 전입인구는 1만 9,679명, 전출인구는 1만 9,910명으로 전출이 약간 많다.
전입인구는 대부분 인접한 거제군·고성군 지역에서 유입되었으며, 전출인구는 부산·대구·서울 등 대도시를 지향했다.
청장년층의 이출에 기인해 가임연령층이 줄어들면서 연간 출생자수도 계속 감소했다.
1995년 통합 이전의 통영군은 1970~80년에 17.8%, 1980~91년에 21.3%의 인구가 감소했다.
그러나 1995년 충무시와 통합시를 이루어 인구가 14만 2,932명으로 증가했고,
1996년에는 14만 2,639명으로 다소 감소했다.
반면 가구수는 1970~80년에 5.9%가 감소했고, 1980~91년에는 0.9%가 증가해,
가구당 인구수가 1980년 5.1명에서 1991년 4.0명, 1996년에는 3.4명으로 줄었다.
이것은 인구유출 과정에서 가구원 중 일부가 유출하는 것과 핵가족화현상 때문이다.
또한 가임연령인 20~40세의 연령층이 집중적으로 유출하여 연간 출생자수가 감소했다.
행정동별 인구분포를 보면 읍·면지역에 30%(201명/㎢), 시 중심부인 동지역에 70%(4,646명/㎢)가 거주하고 있다.
취락은 고성반도에 있는 광도면·도산면을 제외하고 대부분 해안가에 입지한다.
섬의 남쪽에 외해로부터 파도를 막아주는 다른 섬이 있을 때는 남쪽 해안지역에 입지하나,
섬이 없을 경우는 북쪽 해안지역에만 입지하는 특징을 보인다.
평지가 부족하여 취락의 70% 이상이 완경사지에 입지하며 특히 산양읍 등
도서지역의 촌락은 95% 이상이 경사지에 입지한다.
촌락의 대부분이 반농반어촌이며, 순수어촌은 14%이다.
가옥형태는 욕지도의 경우 3간홑집구조(온돌방-온돌방-부엌-툇마루)·
4간홑집구조(온돌방-대청-온돌방-부엌-툇마루)를 기본형으로 하고 있다.
사량면에서는 전(田)자형의 2간겹집구조가 나타나고 있다.
옛 충무시 지역은 해안선을 따라 북동-남서 방향으로 좁게 발달해 있다.
산이 많아 수계의 발달이 미약하고 주거지는 주로 해안의 곡구부에 분포해 있다.
통영항 일대는 상업기능이 밀집해 있고 미륵도의 도남동 일대에는 수산·관광 취락이 형성되어 있으며,
미수동에는 굴 양식을 하는 어촌이 발달해 있다. 통영시의 중심시가지를 이루는 이곳은 평지가 적어
주택지가 산 중턱이나 산정에까지 형성되어 있다. 1988년부터 미수동·도남동 등
외곽지역에 민영 아파트가 건설되기 시작해 1991년에는 1,247세대가 건설되었다.
해저 터널 /충무운하 밑으로 건설된 해저 ...
수산업이 경제의 중심을 이루고 있으며, 농업용수가 부족하여 농업은 부진하다.
총경지면적 54.02㎢ 가운데 논이 20.0㎢, 밭이 34.02㎢이며, 경지율은 23.1%이다(1995).
시의 대부분이 섬이며 구릉성 산지로 되어 있어 경지는 완만한 경사를 이루는 산간 곡저부나
해안에 협소하게 분포한 다.
농산물로는 쌀·보리·콩 등의 식량작물과 고구마가 생산되었으나 점차 재배면적이 축소되고,
온난한 기후조건을 이용하여 상품작물인 키위·유자 등 난대성 과일이 재배되기 시작했다.
1961년 광도면 죽림리에서 재배에 성공한 파인애플을 비롯하여 바나나·유자·비파·망고 등의
열대성 과수가 대표작물이다. 욕지면 납도의 대단지에 조성된 감귤재배지에서는 많은 감귤이 생산되고 있다.
섬이 많고 수심이 5~15m로 얕으며, 청정수역에 연해 있어 연근해어업 및 양식업 등 수산업이 활발하다.
연근해 어업으로 고등어·도미·대구·멸치 등이 잡히고, 굴·피조개·홍합·진주조개·바지락·미역 등의 양식이 이루어진다.
특히 굴·대구·돌미역 등은 통영을 대표하는 특산물이다.
굴 양식은 1960년대 광도면에서 뗏목수하식 양식으로 시작되다가 목재의 구입이 어려워지면서
지금은 줄에 종패(種貝)를 달아 양식하는 연승수하식을 이용한다.
양식조건이 유리하여 보급이 빨리 이루어진 반면, 과도한 양식시설과 밀식 등의 문제점이 발생되고 있다.
산양읍 일대를 중심으로 방어·도미 등을 축양하는 축양어장이 있다.
통영 앞바다에서 잡히는 멸치는 품질이 좋기로 유명하며,
용남면에서 거제시를 사이에 두고 진해만의 해역과 사량면의 윗섬·아랫섬 및 욕지도에서 많이 잡힌다.
주산지인 한산도를 중심으로 한 진해만에서는 어류의 보호를 위해 매년 7월 1일부터 11월 30일까지만
멸치어획이 허가되고 있다. 통영시에는 산양읍의 삼덕항을 비롯해 160여 개 어항이 있다.
도남동과 정량동에서는 고령토가 소량생산되며, 1988년까지는 금광이 있었으나 지금은 폐광되었다.
제조업은 통조림·건조굴 등을 생산하는 수산물가공업 중심이다.
전국적으로 알려져 있는 전통공예로는 광도면 노산리의 통영문대발, 안정리의 목공예품,
산양읍 남평리의 나전칠기 등이 가내공업으로 생산되고 있다.
나전칠기는 조선시대 통제영 내에 13공방을 두고 관급으로 기능공을 양성하여
진상품·군수품·생필품의 보급을 목적으로 시작한 것이다.
이 제품은 이 지방의 특산물로 정교함과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으며,
내구성도 높아 주민소득과 외화획득에 중요한 몫을 담당하고 있다.
특히 자개세공을 놓은 나무 소반인 통영반(統營盤)은 지금도 각 가정에서 많이 사용되고 있다.
시 중심부의 상설시장을 중심으로 상업활동이 이루어지며 수산물 유통과 인근 고성군·거제시 지역의
주민들에게 일상용품을 공급하는 상업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다.
조선시대 수군의 본거지였던 삼도수군 통제영이 있었던 곳으로 예로부터 교통의 중심지가 되어왔다.
육지부인 광도면·도산면에 마산-거제를 잇는 국도가 지나며, 그밖의 지역은 해상교통에 의존하고 있다.
1996년 통영항으로 개칭된 충무항은 안벽길이 1,076m, 방파제 1,191m, 잔교 9기, 물량장 1,727m의
시설을 갖추고 있는 무역항이다.
통영항에서 부산·여수·욕지도·비진도·윗섬·아랫섬 등을 연결하는 정기여객선이 운행되고 있다.
한편 용남면과 거제도를 잇는 거제대교가 1971년 준공되었고,
1992년 마산-거제를 잇는 14번 국도가 4차선으로 확장되면서 내륙지역과 연결되어 교통이 편리해졌다.
미륵도와 고성반도는 1967년 개통된 충무교로 연결되어 있으며,
1932년 개통된 충무운하와 충무해저터널이 있다.
해안을 따라 해안일주도로가 개설되어 있다.
도로총길이 568.5km, 도로포장률 51.9%이다(1996).
세병관 /세병관(조선), 보물 제293호, 경남 ...
국가지정문화재(보물 2, 사적 3, 천연기념물 6, 중요민속자료 2, 중요무형문화재 7),
도지정문화재(유형문화재 8, 기념물 7), 문화재자료 6점이 있다. 조선시대 통제영이 있었고
임진왜란 당시 격전지로서 이순신과 관련된 유적지가 많다.
선사시대 유적으로 욕지면 노대리에 욕지도패총(경상남도 기념물 제27호),
산양읍 연곡리에 통영연대도패총(사적 제335호)이 있다.
명정동의 충무충렬사(사적 제236호)는 1606년에 건립된 이순신의 사당으로,
경내에는 이순신의 위훈을 찬양하여 명나라 신종이 보내온
충무충렬사팔사품(보물 제440호)을 비롯해 수조도 병풍 충렬묘비(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13호) 등이
소장되어 있고 뜰에는 수령 400여 년 된 충렬사동백나무(경상남도 기념물 제74호)가 있다.
당동의 착량묘(경상남도 기념물 제13호)는 1599년 이순신이 노량대첩에서 전사하자 지방주민들이 건립한 사당이다.
한산면에는 21개소의 이충무공 유적지가 있다.
한산도이충무공유적(사적 제113호) 가운데 제승당은 충무공이 한산대첩공훈으로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후 지은 건물로 1597년까지 삼도수군의 본영으로 삼았던 곳이다.
이곳에는 충무공의 영정을 모신 충무사와 한산정·대첩문·행적비 등이 있다.
정유재란 때 소실·폐진되었다가 1739년(영조 15) 조경 통제사가 중건하고 유허비를 건립한 이래
1976년에 복원되었다.
문화동에 있는 세병관(보물 제293호)은 1603년 이경준 통제사가 건립,
이듬해 삼도수군통제사영을 이곳에 옮겨와 300년간 본영으로 삼은 곳이다.
당동의 착량묘(경상남도 기념물 제13호)는 1599년 이순신이 노량대첩에서 전사하자 지방주민들이 건립한 사당이다.
봉평동에 있는 용화사(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0호)는 신라 선덕왕 때 창건된 것으로 경내에는
용화사보광전(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49호)을 비롯해 도솔암(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62호)·명부전·해월루 등의
건축물이 있다. 문화동벅수(중요민속자료 제7호)는 1906년(광무 10) 동민들이 풍수사상에 의거,
동남방이 허하다 하여 마을의 평안을 염원하는 토속적인 신앙심에서 세운 것이다.
북신동에는 조선시대에 축조된 통영읍성지가 남아 있으며, 산양읍 삼덕리에는
당포성지(경상남도 기념물 제63호)와 삼덕리부락제당(중요민속자료 제9호)이 있다.
당포성지는 고려말 왜구의 침략을 막기 위해 최영 장군이 쌓은 성이다.
사량면에는 최영장군사당(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32호)이 있으며,
이곳 사람들은 장군의 위패를 모시고 매년 2회 사당제를 지내고 있다.
광도면에는 통영향교(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18호)와 안정사가 있다.
안정사는 신라 654년(무열왕 1) 원효대사가 창건한 사찰로, 경내에는 안정사대웅전(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80호),
안정사범종(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83호), 안정사괘불(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82호),
안정사련 및 금송패(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84호), 안정사만세루(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45호) 등이 있다.
천연기념물로는 한산면의 홍도괭이갈매기번식지(천연기념물 제335호),
도산면 도선리의 백로 및 왜가리 번식지(천연기념물 제231호),
욕지면 우도의 생달나무와 후박나무(천연기념물 제344호), 욕지면 모밀잣밤나무숲(천연기념물 제343호),
한산면 통영비진도의 팔손이나무자생지(천연기념물 제63호), 산양읍 추도의 후박나무(천연기념물 제345호) 등이 있다.
한려해상국립공원의 중심부에 있고, 한산도의 충무공 유적지, 해수욕장과 낚시터 등이
많은 한국 제1의 해상관광지이다.
통영항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남망산공원에는 이충무공동상·한산대첩비·시조비·수향정이 있고,
산 중턱에는 조선시대의 무과 고시장인 열무정과 이곳 출신의 시인인 유치환시비가 있다.
산양읍에는 해상국립공원을 조망하며 해안 드라이브를 할 수 있는 산양일주도로가 개설되어 있다.
전구간에 동백나무가 심어져 있어 겨울 한철 동백꽃이 만발하며, 도로 주변에는 달아공원,
어류 축양장과 양식장, 낚시터가 산재해 있다. 한산면의 비진도해수욕장·추봉리자갈해수욕장,
산양읍의 연대해수욕장, 욕지면 동항리의 목과자갈해수욕장 등이 있다.
특히 비진도해수욕장은 수려한 경관을 지닌 천혜의 피서지로 널리 알려져 있다.
또한 해안 곳곳에 낚시터가 산재해 있어 부산·마산·진주 등 인근 도시 주민들의 주말 낚시터로 이용되고 있다.
한국의 나폴리라 불리는 한려수도 관광권의 중추기지 역할을 하게 될
통영도남관광단지가 1996년 도남동 일대 약 28만 7,600㎡부지에 완공되었다.
이 지방의 특색 있는 교육기관은 1592년 한산도에 건립된 운주당(제승당으로 중건)으로
조선 수군의 군사교육을 담당했으며, 도천동에는 1805년(순조 5) 설립된 백운서재(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9호)가 있다.
전통 교육기관으로는 1900년(광무 4) 광도면 죽림리의 고성향교 터에 새로 건립한 통영향교가 있었다.
대성전·동무·서무·명륜당·서재·풍화루 등의 건물이 있으며, 대성전에는 공자를 비롯한 오성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근대 교육기관으로는 1908년에 개교한 진남보통학교(지금의 통영초등학교)가 그 시초이다.
1917년 설립된 경남수산전습소의 후신인 통영수산전문대학이 있었으나 1994년 경상대학교와 통합되었다.
1995년 현재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33개교, 중학교 11개교, 고등학교 5개교와 경상대학교 통영캠퍼스가 있다.
문화행사로는 매년 10월 한산대첩을 기리기 위한 한산대첩기념대전이 열린다.
이 행사는 충렬사에서 봉행되는 이순신의 제사인 고유제를 시작으로 불꽃놀이·축등행렬이 이어지며,
가장행렬·통영오광대·승전무·풍어제 등 30여 종의 각종 문화 예술행사가 개최되는 종합 문화행사이다.
그 가운데 통영오광대(중요무형문화재 제6호)는 1900년경 합천군 초계면의 대광대놀음이 전파되어 발전된 것으로
문둥이탈·풍자탈·영노탈·농창탈·포수탈 등 5개 과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승전무(중요무형문화재 제21호)는 임진왜란 이후 삼도수군 통제영에서
각종 의식 및 이순신의 춘추향사·탄신제·기신제 때 헌무하여 오면서 전승되다가
일제강점기에 명맥이 끊긴 것을 다시 발굴한 것이다.
승전무와 함께 행해지는 통영검무는 다른 지방의 검무가 외향적이고 호전적인 것과는
달리 내향적이고 조직적이며 섬세하고 우아한 것이 특징이다.
어업이 성해 동제·어업노동요 등이 발달했다.
시내에서 가장 오래된 동제는 산양읍의 삼덕리부락제당에서 행하는 동제이다.
이 동제는 지금도 매년 섣달 그믐날에 행해지며, 마을의 풍농풍어를 기원한다.
그밖에 사량면 양지리 능량마을의 위민굿, 사량면 수우도의 동제 등이 있다.
어업노동요인 〈살치기〉는 그물당기는 소리로 작업지시와 풍어의 기쁨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농업노동요로는 〈모찌기노래〉·〈보리타작노래〉·〈도리깨나작노래〉, 길쌈노동요로 〈삼삼기노래〉·
〈물레노래〉·〈베틀노래〉 등이 전승되고 있다. 남해안별신굿(중요무형문화재 제82호),
문화동에 소목장(小木匠:중요무형문화재 제55호), 북신동에 나전장의 끊음질(중요무형문화재 제10호)
기·예능 보유자가 있고, 민속놀이로 민간제례악·이무기놀이·사또놀음 등이 있다.
한편 한산도 각 지명의 유래와 아름다움을 표현한 가사체인 〈한산가〉와 〈통영개타령〉·〈잠노래〉·
〈쌍가락지노래〉 등이 있다. 종교기관으로는 1995년 현재 개신교 교회 111개소, 천주교 교회 7개소,
불교 사찰 54개소, 유교 교당 1개소가 있다.
의료기관으로는 병원 2개소, 의원 32개소, 치과의원 15개소, 한의원 21개소, 보건소 관련 의료기관 25개소가 있다.
金基赫 글
제가 가지고 있는 사진으로만 알려드려서 미진 합니다.
이걸 보시고 사진을 보충하시고 싶으신분은 댓글을 남겨 주십시요.
제 글을 보시고 김형진 추진위원장님께서 사진을 보충해 주셔서 다시 올립니다.
통영은 분명 세계의 통영으로 거듭날 것입니다.
여기에 자료 몇개가 더 첨부만 된다면 통영을 알리는데 여러분들께서 쉽게 볼 수 있도록 힘써주신 김형진위원장님
진심으로 감사드리구요.
저도 통영 사랑합니다. 예술의 도시로 예향의 고장으로 길이길이 빛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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