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t1.daumcdn.net/blogfile/fs13/26_blog_2008_11_16_19_30_491ff5b05305d?x-content-disposition=inline)
청마 유치환선생님께서 빨간 우체통 옆에서 사랑하는 사람에게 5000통의 편지를 쓰셨던 장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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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우체국위에 길을 걸으면 이영도선생님이 운영하셨던 문화유치원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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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 아라는 시가 써져있다
예전에는 이곳에서 청마 유치환선생님께서 서서 편지를 쓰셨던 곳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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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영 중앙우체국은 청마 유치환선생님의 사랑편지로 유명한곳이다
토요일이라서 중앙 우체국은 굳게 닫혀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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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로 만들어진 책상에 서서 화살표가 보이는 곳에 사랑하는 사람이 수예점을 하고 계셨다고 한다.
청마 선생님께서는 사랑하는 사람을 보면서 사랑편지를 써서 우체통에 부치고 사랑하는 사람은 그걸 받아보고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세상이 바뀌어도 사랑이야기에는 모든 사람이 감동을 한다.
사랑이란.
모든 사람들이 꿈꾸고 있는것이기 때문이고 사랑 이야기가 계속이어지는 건
그만큼 어려운 상황들이 기다리고 있어서가 아닐까?
누구나 사랑을 원하지만 누구나 다 사랑을 하는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사랑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았다.
지금 편지로 사랑을 나누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잠시 나는 핸드폰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보면서 앞에서 말하는 사랑도 좋지만
이 가을 편지로 사랑을 써보는 건 어떨까?
나는 행복 옆에 책상을 다시 놓아서 길거리 여행을 하는 사람들이 여기에서 편지를 쓰고
사랑하는 사람이 그걸 받는다면 사랑은 더 깊어지지 않을까?
그러다가 또 사랑 이야기가 여기에서 하나 더 탄생할 수 도 있지 않을까 생각하면서 혼자서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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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집중 2층은 이중섭선생님께서 처음으로 작품전을 열었던 곳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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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아직 완성되지 않는 책인데 내가 한컷만 부탁을 했다
아래에 남문이 보수공사중이다.
나오시는 분은 통영 향토역사관 김일룡관장님이시다.
향토역사관은 다음에 포스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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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문을 복원공사중이다.
장미예식장 통영 최초의 예식장인데 지금도 간판이 그대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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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마 거리를 지나면서 뽄쟁이가 뭐야?
이집은 화원인지 모자 전문점인지 모를정도로 가게가 화분으로 잘 치장되어 있다.
통영 청마거리에서 사랑편지를 쓴다
우근 김 정 희
사랑이라는 편지를 써보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통영 청마거리를 걸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가장 중요한게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나는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사람이 세상에 처음 사랑이라는 과정이 없으면 태어날 수 없다.
한사람은 사랑이라고 말하고 다른이는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우리는 태어났다고 보아야 한다.
청마거리에서 청마선생님은 5000통의 사랑편지를 썼다고 한다.
사랑이라는게 남녀간에 사랑편지만 5000통이나 쓰셨을까?
말이 그렇지 5000통이라는 편지는 그냥 써지는 숫자가 아니다.
나는 광주에서 서울에 대학을 오면서 집에서 챙겨왔던게 몇가지가 있었는데 그중에서 편지봉투와 우표
그리고 편지지를 꼭 챙겨왔었다.
1979년 내 용돈이 한달에 삼만원이었는데 그 돈으로는 편지를 쓸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서 였다.
그래도 모자라서 내 돈으로 가끔은 우표를 샀던 기억이 난다.
그래서 나는 5000통의 편지가 얼마나 많은 양인지 잘알고 있다.
편지봉투를 5000장을 쌓아놓아본적 있는가.
아니면 1부터 5000까지 숫자를 편지봉투에 써본적이 있다면 얼마나 많은 양인지 알 수 있다.
혹여 그때 내편지를 지금까지 가지고 있는 친구가 있을까?
있다면 내 편지를 보고 싶고 글로 올리고 싶다.
이 글을 읽고 있다면 연락을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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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진은 작년 전혁림미술관에 갔을때 사진이라서 정겹다.
청마 유치환선생님과 여러 문인선생님들이 여기에 다 계신다.
1945년이면 일제치하에서 해방되었던 해이기에 그 시절에는 사진이 아주 귀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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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모습이 예술로 승화된 작품이다.
간판이 오래되어서 떨어졌는데 여러분은 어찌 보이시는지.
예수님의 고뇌가 그대로 베어져 보이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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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마 유치환선생님 부인 권재순선생님께서 운영하신 문화유치원 자리이다.
간판만있지 유치원은 헐려서 없어졌고 지금은 충무교회의 주차장이 되었다.
문화유치원도 복원계획에 들어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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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치원에서 바라본 해뜨는집이다.
통영에서 가장 유명한 사랑하는 사람이 다녔던 집이였다고 한다.
이집에서 파는 튀김을 향토문화관에서 내온 커피와 마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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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동 벅수이다.
벅수는 장승으로 마을에 세워져서 동네에 수호신이라고 말할 수 있다.
벅수는 돌장승으로 원래 빨간 색칠이 되어있는데 세월 흔적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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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판이 희미한게 왜 그럴까?
이것도 보수하실때 같이 해야겠기에 사진으로 올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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벅수는 1906년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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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병관 오르는 길에 문화 전당포가 지금도 영업중이다.
청마 유치환 선생님에 대해서 백과 사전을 찾아보았다.
백과사전을 읽어 보면서 얼마나 시간이 지나야 청마 유치환선생님에 대해서 고쳐질까?
컴퓨터의 발달로 백과사전보다 답사를 해서 글을 쓰는 사람들이 훨씬 정확하고 세밀하다는걸 다시 한번 더
느끼면서 향토역사관 김일룡관장님이 존경스럽다.
유치환 (한국 시인·교육가) [柳致環]
1908. 7. 14 경남 충무~1967. 2. 13 부산.
시인·교육자.
개요
시의 기교나 표현에 집착하지 않고 생에 대한 의지를 진지하게 추구했다.
본관은 진주. 호는 청마(靑馬).
아버지 준수(焌秀)의 8남매 가운데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극작가 치진(致眞)은 그의 형이다.
1922년 통영보통학교 4학년을 마치고 일본으로 건너가 도요야마 중학[豊山中學]에 입학했다.
이때 형이 펴낸 동인지 〈토성〉에 시를 발표했다고 하나 확인할 수 없다.
한의원을 경영하던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1926년 귀국, 동래고등보통학교에 편입해 졸업했다.
이어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했으나 1학년 때 중퇴했으며, 사진관을 경영하는 등 여러 직업을 전전하다가
1937년 통영협성상업학교 교사가 된 뒤 교육계에 종사했다.
1937년 문예동인지 〈생리 生理〉를 주재했고, 1939년 첫 시집 〈청마시초〉를 펴냈다.
1940년 가족을 거느리고 만주 옌서우 현[煙首縣]에 가서 농장관리인으로 일하다가 8·15해방 직전에 귀국하여
통영여자중학교 교사로 근무했으며, 조선청년문학가협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
6·25전쟁 때는 문총구국대 일원으로 참여했다.
해방 직후 생명에의 열애를 노래한 점에서 서정주와 함께 '생명파 시인'으로 불렸다.
1954년 경상남도 안의중학교 교장에 취임했고, 같은 해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이 되었다.
이어 한국시인협회 초대 회장을 비롯해 경주고등학교·경주여자중학교·대구여자고등학교·
부산여자상업고등학교 교장을 지냈다.
1967년 교통사고로 죽었으며 묘지는 부산광역시 서구 하단동에 있고, 경주 불국사,
부산 에덴 공원, 통영 남망공원 등에 시비가 세워졌다.
1931년 〈문예월간〉 12월호에 〈정적 靜寂〉을 발표해 문단에 나왔으며,
이후 35년 동안 14권에 이르는 시집과 수상록을 펴냈다.
그의 시에 일관되게 나타나는 특징은 허무와 애수이며, 이 허무와 애수는 단순히 감상적이지 않고
이념과 의지를 내포한다.
특히 대표시 〈깃발〉(조선문단, 1936. 1)은 연민과 애수를 통해 존재론적 차원의 허무를 제시하고 있는데,
여기서의 '깃발'은 이상향에 대한 동경의 상징이다.
또한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로 시작되는 〈행복〉에서는
그리움의 대상에 대한 절망의 애수를 보여주었고,
이러한 시세계는 첫 시집 〈청마시초〉(1939)와 제2시집 〈생명의 서〉(1947)에 잘 나타나 있다.
〈청마시초〉에 나타난 허무는 정신편력과 더불어 다양하게 변모하는데 이것은 죽음에 대한 그의 태도에서 출발한다.
여기서의 죽음의 의미는 2가지로 나뉜다.
첫째, 일제 말기의 극한상황과 결부되어 자학적 분노와 생명의지를 보여준 것으로
이는 결국 종교적 자아로 승화되고,
둘째, 인간의 숙명인 죽음이 역설적으로 인간존재에 대한 연민과 애수로 나타난다.
이는 제6시집 〈보병과 더불어〉(1951)에 실린 종군시(從軍詩)들에 이어져 전장에서 애수에 젖기도 한다.
한편 제2시집 〈생명의 서〉에 실린 시는 만주에서 쓴 것이 대부분이며,
여기에 실린 〈생명의 서〉와 〈일월〉에서는 허무와 고독을 극복한 강인하고 웅건한 의지를 보여주었고,
후에 대표시 〈바위〉로 이어져 순수한 본질적 자아로 복귀하려는 의지로 나타났다.
그는 후기에 와서 허무에 회의를 느껴 이를 극복한 다른 시세계를 보여주려 했으나
갑작스럽게 죽음으로써 이루지 못했다.
시인 스스로 "윤리를 갖지 않은 글, 윤리의 정신에서 생산되지 않은
문학은 무엇보다 첫째 그것을 읽어 줄 독자가 없을 것"이라 했듯이
현대시사에서 보기 드문 도덕적인 시인으로 평가된다.
시집으로는 〈울릉도〉(1947)·〈예루살렘의 닭〉(1953)·〈청마시집〉(1954)·
〈뜨거운 노래는 땅에 묻는다〉(1960)·〈미류나무와 남풍〉(1964) 등이 있다.
1950년 서울특별시 문화상, 1958년 자유문학상,
1962년 대한민국 예술원상과 부산시 문화상 등을 받았다.
출처:브리테니커
다음은 향토역사관과 세병관을 쓸려고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