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근 창작 한마당/우근의 한소리

음양철학연구원 청관 김원희선생님

만년지기 우근 2010. 6. 11. 10:50

 

  

 

 

 

 

 

 

 

 

 

음양철학연구원 청관 김원희선생님

                                                       우근 김  정  희

우리집에는 작은 절을 가지고 있다.

곡성에 있는 절은 스님 한분이 우리집 외가쪽 제사와 천도제

먼저 간 남동생제사를 지낸다.

신도도 없다.

스님들이 그동안 많이 오고 갔다.

나는 그때 교회를 다녔고 열심히 성경책을 보았다.

내가 본 성경책 어느 구절을 보아도 조상에게 절하지 말라는 이야기는 없었다.

나는 산소에 가서 절을 했고 부처님께도 삼배를 드렸다.

그러던 어느날 강남성모병원 산부인과 김선생님께서 말도 안되는 행동에

머리 끝까지 화가 났다.

스님께 전화를 드렸더니 양평에 계신다는 거다.

양평 묘각사로 같이 가자는 거다.

즉시 양수리 시장에서 만나서 묘각사로 갔는데

묘하게도 그날이 음력 3월 3일이였다.

신도들에 쌓여있는 일각큰스님의 첫 인상은 참 단아한 모습이셨다.

일각큰스님께서 며칠후에 전화를 주셨다.

해뜬날식품 강길태사장님과 만나 보라는 제안이셨다.

묘각사에서 만나뵙는 게 가장 나을것 같아서 그날 저녁 만나기로 했다.

묘각사로 갔다.

일각큰스님께서 나를 수양딸을 삼으시겠다고 말씀하셨다.

나는 30분을 안한다고 게겼다.

수양딸의 의미를 알기 때문이다.

내가 교회를 나가지 않으면 교회문을 닫을것 같아서 였다.

그때 큰스님께서 하신 말씀 "네가 왜 교회를 걱정하노.교회는 목사가 알아서 할일 아이가!"

듣고보니 그러네?

그래서 큰 절을 삼배 올렸다.

나는 그 시간 이후 교회를 가지 않았다.

우리 절 스님이 조계종 공부를 하신다고 절을 비우기 시작했다.

절을 비워둘 수 없어서 심산스님께서 우리 절로 들어 오셨다.

어느날 서울에 오셔서 청관선생님께 같이 가보자는 제안을 하셨다.

명리공부에 대해 제안을 하셨다.

나는 명리공부를 하는것은 좋으나 명리로는 밥 벌어먹지 않는다고 말씀드렸다.

국민학교시절 학교에서 돌아와 고무줄 놀이를 하고 있는데 길가시던 할머니가 나를 부른다.

"너의 눈과 행동을 지켜 보았다.손을 한번 만져보자."

할머니는 내 손을 만지시며 눈을 감고 생각하시더니 "저 아이들을 보내라."

"할머니 제가 떠나면 돼잖아요?"

"그래, 그러면 저쪽에 가서 이야기 좀 하자."

"너는 앞으로 살아가면서 공부를 많이 해야 한다.

불쌍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많이 많이 돌보아 주어야 한다."

"예. 외 할머니께서도 그렇게 살아가라고 하셨어요."

"그래, 훌륭하신 할머니를 두었구나. 그런데 네 꿈은 뭐냐?"

"제 꿈은 책을 많이 읽어서 훌륭한 사람이 되어서 어렵고 힘든 사람을 구할거예요."

"나랑 약속하자.자 새끼손가락을 걸고 약속하자."

새끼손가락을 걸고 오래 오래 손을 흔들었던 기억이 난다.

사람이 살다보면 만나야 할 사람은 만나는 법이다.

청관 김원희선생님께서는 나에게 길게도 말씀하신다.

나이 60이 될때까지 힘이 들것이니 그때까지 공부를 게을리 하지 말라고 하신다.

공부는 죽을때까지 해야하고 배움도 죽을때까지 배워야 한다는 걸 잘 알고 있다.

사람은 생로병사로 이어진 삶을 살다가 돌아간다.

세상이 이렇게 살아간다는게 힘이 들 줄은 정말 정말 몰랐다.

타인들은 모른다.

없어본 적이 없었던 시절.

나는 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없는 줄 아는 청관선생님께서 어느 겨울 그 집에서 가장 맛있는 소고기와 이슬이를 마시고

대리운전비라면서 3만원을 주셨다.

받는것에 익숙치 않은 나는 집에 오는 내내 마음이 울적했다.

그리고 오늘까지 나는 공기만 먹고 살아간다.

올해는 일을 좀 해볼려고 하지만 내가 설자리가 아니면 일이 안된다.

4월에는 활동보조인으로 누하동에서 27살짜리 와상환자를 돌보았다.

힘이 부쳐서 안된다.

5월엔 활동보조인 공부를 하고 수료증을 받았다.

그리고 5월엔 부정선거와 혼자서 힘겹게 싸웠다.

안된다.

62지방선거에서도 참패를 했다.

자원봉사를 했지만 안된다.

며칠을 끙끙 앓았다.

청관선생님이나 만나자.

어제 오랫만에 301번을 타고 신천역에서 내려보니 2번출구가 아니고 4번 출구 였다.

청관김원희선생님께서는 그동안 내가 궁금해 하는 모든 사람들의 명리를 그냥 봐 주셨다.

어제도 최선생님과 오랫만에 만나서 봐 달라고 하니 봐 주셨다.

김원희선생님께서 너무나 직설적으로 이야기를 하니 머리가 띵한 모양이다.

오늘 아침에 전화를 해서 어디냐고 물어보았더니 부천에서 일하고 있단다.

나는 일 할 수 있는 네가 부럽다.

나는 60살까지 무얼하면서 살아갈꼬.

어제도 막걸리,참이슬,생맥주,맥주 노래방까지 갔다.

보경이라는 아리따운 아가씨가 꽃이었다.

젊은이들이 명리를 공부한다는게 우리나라의 밝은 미래가 반짝 반짝이는 별들로 보인다.

역시 21세기에는 우리나라가 세계 최고의 나라가 될 모양이다.

노래방에서 오랫만에 "광야에서""상록수""사노라면""친구""아침이슬""작은연못"

그리고 보경을 만난 의미에서 "만남"을 불렀나 노래만 틀고 다른 아이들에게

노래를 빼앗겼나.

하하하 허허허 ---.

그래도 오랫만에 재미나는 하루였다.

이렇게 웃으면서 살다보면 60도 오겠지.

집으로 오는 택시에 몸을 실어 내내 기분좋은 웃음이 실실 입가에 퍼진다.

젊을때 공부나 열심히 하자.

공부해서 남주는게 아니라는 걸 안다면 머리에 남는 건 뭐니 머니해도 공부다.

어제 누구의 책에 대해서 말했다.

표지도 뜯어져나간 책을 선생님께서는 읽지 않으셨다 한다.

책을 가져다 드려야 하나 마나.

후후후 하며 또 웃음 하나가 오늘을 즐겁게 한다.

자신의 인생에 대해서 먼저 안다면 알고서 행동하는 것과 모르고 행동하는 것은

차원이 다르다고 말하고 싶다.

자신의 운명을 먼저 공부하라.

명리를 공부하시라 권하고 싶다.

 

음양철학연구원

원장 청관 김 원 희

주소: 서울시 송파구 잠실동 184 - 7번지 은성빌딩 305호 

신천역 2호선 3,4번출구 

전화:02 - 418 - 8834

팩스:02 - 412 - 8278

손전화: 011 - 9974 - 8834 

청관 김원희 선생님께서는 명리책을 13권을 쓰셨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계속 집필중이십니다. 

 

 

월간지 시사 대한화보 5월호에 98쪽부터 101쪽 "명리학자 초대석"에 게재되었습니다.

청관 김원희선생님께서는 "명리학(사주학)과 같은 위대한 학문은 세계에 널리 알려야 한다."

청관 김원희선생님은 "사주와 생명론" 1권, "기상론" 2권, "명리요론" 5권, "명리요결" 5권총13권의 책을 출간하셨고 지금도 계속집필중이십니다.

청관선생님은 절에 가셔서 기도도 게을리 하시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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